제120화
무대 위로 독수리 가면을 쓴 남성이 올라왔다.
스릉!
그는 검을 뽑더니 대뜸 화려하게 휘둘러댔다.
휙! 휙휙!
자신감을 보이려는 것일까?
와아아아아아아!
다행히도 그의 행동은 관객들에게 환호성을 자아냈다.
아마도 관객들이 상대를 도발하려는 행동이라고 인식한 듯싶었다.
저벅, 저벅.
이어서 해골 가면을 쓴 남자가 여유롭게 무대 위로 올라섰다.
독수리 가면을 쓴 남성처럼 화려한 퍼포먼스는 보여주지 않았다.
“사고, 부상은 걱정하지 마라. 너희들의 실력을 마음껏 펼쳐봐라.”
이번 대련의 심판은 크리스 교관이 맡았고, 그는 대련하는 생도들의 정체를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라이덴 녀석 그렇게 으르렁거리더니, 결국엔 여기서 카단을 부르는구나.’
크리스는 두 생도를 한 번씩 바라본 뒤, 두 걸음 뒤로 물러섰고.
“시작해라.”
크리스 교관의 신호에 맞춰 두 생도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파앗!
라이덴은 카단이 언데드를 꺼낼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시작하자마자 땅을 박찼다.
우웅!
아직은 오러를 두를 정도는 아니었는지, 그의 검은 마나를 머금고 있었다.
“그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마!”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라이덴이 빠른 속도로 검을 내질렀다.
물론 카단은 라이덴의 행동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슥.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옆으로 몸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라이덴의 검을 피할 수 있었고.
퍼억!
빈틈이 생긴 순간, 그대로 라이덴의 복부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쯧. 미리 마나를 둘러뒀네.’
그러나 라이덴은 마나를 이용해 몸을 강화해놓은 상태.
기습적인 공격이었지만, 맨주먹으로는 그에게 조금의 피해도 줄 수 없었다.
“날 또 얕보다니….”
카단의 주먹이 데미지는 줄 수 없더라도 기분을 상하게 하기엔 충분했던 것 같았다.
네크로맨서에게 주먹으로 복부를 맞았다는 사실이 쪽팔렸는지, 라이덴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시정잡배 새끼가!”
휙!
라이덴의 검이 좌에서 우로 빠르게 그어졌다.
‘흥분했는데도 동작이 간결하군. 이 자식도 열심히 살고 있나 보네.’
흥분한 상태로 이어진 공격.
그러나 라이덴의 동작은 크지 않았고, 효율적이었다. 공격에 필요한 최소한으로만 움직여지고 있었다.
채앵! 챙!
간결하고 빠른 공격이었지만, 카단은 아무렇지 않게 단검을 뽑아내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 빌어먹을 천박한 평민 새끼가! 끝까지 날 무시할 생각이냐!”
네크로맨서가 언데드를 부리거나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박투에 응하고 있지 않은가. 맨손으로 싸우다가 단검까지 뽑아내니 상대하는 라이덴으로선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라이덴은 단검째로 베어 버리겠다는 듯 자신의 검에 마나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마나는 점차 뚜렷히 검의 형태를 이루었고, 보다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이것도 막아보던가!”
타앗!
라이덴은 그대로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저 미, 미친놈!”
“피하든가 막든가!”
그러나 이번에도 카단은 단검을 들며 라이덴의 공격을 막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생도들이 핏빛 미래를 예상하며 경호성을 외쳐댔다.
마나를 날카롭게 두른 검을 막아내기 위해선 똑같이 마나를 두르던가, 마법을 이용해 막아야 했다.
단순히 검이나 방패만으로는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까아아아앙!
라이덴의 검은 카단의 단검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순간 연회장 안에 침묵이 맴돌았다.
믿을 수 없는 광경.
네크로맨서가 마나를 두른 검을 단검만을 이용해 막아내다니.
“이, 이건 뭐….”
가장 당황하고 있는 건 검을 휘두른 장본인. 라이덴이었다.
날카롭게 날을 세운 마나의 검은 카단의 단검에 막혀 전혀 움직이질 않고 있었다.
카단은 피식 웃으며 라이덴의 복부를 발로 차버렸다.
라이덴은 그대로 뒤로 밀려났고, 다행히 곧바로 중심을 잡아 넘어지진 않을 수 있었다.
“직접 보여주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었는데.”
카단이 보여준 기술은 마티아스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카단만의 방어 기술이었다.
이론상으로만 가능하던 걸 카단은 완성해 냈고, 이제야 그 기술을 마티아스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카단은 어깨를 으쓱이며 무대 아래쪽을 바라봤고, 그의 시선은 오우거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를 향했다.
그러자 오우거 가면을 쓰고 있던 마티아스가 가면을 벗고는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미친놈.
카단은 피식 웃으며 다시 시선을 옮겨 당황하고 있는 라이덴을 바라봤다.
“어, 어떻게….”
당황하던 라이덴은 빠르게 카단의 단검을 살폈다.
“설마 마나 실드?”
그때 무대 쪽에서 누군가의 물음표 담긴 외침이 들려왔고.
“마나 실드라고?”
“설마 단검에 마나 실드를 두른 거야? 얇게?”
“아니, 단검에 두를 정도로 마나 실드를 얇게 둘렀다면, 저 정도로 단단하지 않을 텐데?”
이어서 관객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웅성거림이 이어졌지만, 그 누구도 정답을 찾아내진 못했다.
답답하다는 듯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점차 커졌고, 라이덴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카단을 살폈다.
점차 웅성거림이 잦아질 때쯤.
“발칙한 생각이네. 얇은 마나 실드를 여러 겹 겹쳐서 마나 소드처럼 만들다니.”
벨리드 교관의 목소리가 고요한 분위기를 뚫고 연회장에 있는 생도들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그게 가능해?”
“이론상으로는 가능하지만, 전투 도중에 저렇게 사용하는 건 힘들어.”
“마나 실드를 얇게 여러 겹 만드는 건 생각보다 더 섬세한 작업이야.”
“그러니까 그냥 저 1학년 네크로맨서가 미친놈이라는 거지?”
관객들은 웅성거림을 듣던 카단이 어깨를 으쓱하며 라이덴에게 말했다.
“더 보여줄 거 없으면 그만 끝낼까?”
여유롭게 전해진 말에는 ‘네 공격은 통하지 않아.’ 라는 숨은 뜻이 있었다.
그 숨은 뜻을 이해한 것일까?
라이덴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어댔고, 이내 검을 고쳐 쥐며 다시 자세를 취했다.
“쯧. 이렇게 사용할 생각은 없었는데.”
흥분한 상태로도 라이덴은 곧바로 달려들지 않았다.
“천박한 네 놈이 이 기술을 보는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하길 바란다.”
오히려 중심을 낮추고 양손으로 검을 쥔 자세를 취하며 카단을 바라봤다.
독수리 가면까지 쓰고 있으니, 마치 독수리가 먹이를 노리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슥.
라이덴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자, 그의 주변으로 마나가 물결치기 시작했다.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마나의 파장이 라이덴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모, 몽브레이 가문의 검술이다!”
그때 관람석에서 라이덴의 검술을 알아차린 누군가가 외쳤고.
그 목소리에 라이덴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카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타앗!
순식간에 카단과 거리를 좁힌 라이덴은 곧바로 카단의 옆구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막기엔 늦어.’
막기보단 피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는지, 카단은 재빨리 땅을 박차며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풉.”
라이덴의 공격은 분명 빗나갔으나, 라이덴이 쓴 가면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웃어?’
그 웃음소리의 이유를 알 수 없던 카단이 헛웃음을 삼키려 했지만.
스륵.
순간 카단이 쓰고 있던 가면이 반으로 갈라졌고, 한쪽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분명 피했는데?’
카단은 어이없다는 듯 가로로 잘려 바닥에 떨어진 반쪽짜리 가면을 바라봤다.
“숨 좀 쉬라고 하관부터 잘라줬어.”
라이덴이 여유롭다는 듯 비아냥거렸고, 카단은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해야 후회하지 않을 텐데?”
라이덴이 다시 달려들 것처럼 자세를 취했고, 카단은 그를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성장했네.”
마치 윗사람처럼 말하는 카단의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라이덴은 재빨리 땅을 박찼다.
‘가만히 있어도 베이고, 막아도 베이고, 피해도 베인다.’
무슨 수를 써도 베이는 건 똑같다.
라이덴이 이렇게까지 나온 이상 카단도 계속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촤르르르륵!
카단은 재빨리 라이덴의 앞으로 뼈의 벽을 세워 걸음을 늦췄고.
툭! 툭! 툭!
빠르게 아공간을 열어 고블린들의 시체를 바닥에 던져댔다.
“라이덴. 알고 있지?”
카단은 뼈의 벽을 부수며 다가오는 라이덴을 향해 말을 걸었고.
라이덴은 카단의 말을 무시하며 빠르게 거리를 좁히려 했다.
“나 5성이다.”
카단은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떨군 시체를 향해 손을 뻗었고.
콰아아아아아아앙!
동시에 고블린의 시체가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폭발에 휩쓸린 줄 알았으나, 라이덴은 금방 방어 자세를 취하며 폭발을 피해냈다.
완벽하게 피해내진 못했는지, 이번엔 그의 가면이 투둑투둑 하며 조각나기 시작했고.
촤르르.
이내 그가 쓰고 있던 독수리 가면이 산산조각이 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빌어먹을!”
라이덴은 인상을 팍 쓰더니, 다시 땅을 박차려 했다.
“뭐, 뭐야!”
그러나 라이덴은 땅을 박찰 수도 없었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고블린의 시체가 폭발하며 무대 곳곳에 피가 뿌려졌고, 그 피에서부터 튀어나온 붉은색 밧줄이 라이덴의 몸 곳곳을 붙잡고 있었다.
“이깟 피쯤이야!”
라이덴은 온몸에 마나를 활성화하며 몸을 구속하고 있는 피의 밧줄을 태워버릴 생각이었다.
4성의 마나라면 피 마법 정도는 금방 증발시킬 수 있을 테니까.
“네가 그 피들을 증발시키는 동안 내가 가만히 있겠냐?”
카단은 피식 웃으며 라이덴의 앞으로 해골 병사 하나를 소환했다.
오크의 모습을 한 해골 병사가 거대한 도끼를 이용해 라이덴의 목을 겨눴다.
“구차하게 승부를 이어가겠다면 받아는 줄게.”
“으아아아아아악!”
카단이 여유롭게 도발했고, 라이덴은 분하다는 듯 소리를 질러 댔다.
“승부가 난 것 같군.”
더 진행해봤자, 라이덴에게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걸까?
무대 구석에서 대련을 지켜보던 크리스 교관이 양손을 펼친 채로 무대 중앙으로 걸어왔다.
“해골 가면을 쓴 생도의 승리다.”
크리스 교관의 목소리에 카단은 곧바로 소환한 해골들과 바닥에 내려놓은 고블린 시체들을 회수했다.
“제기랄!”
패배가 분했는지, 라이덴은 씩씩거리며 카단을 노려봤다.
그러나 크리스 교관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아득바득 자존심 세우기보다는 차이를 인정하고 더 노력해. 그래도 가능성은 있네.”
카단은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는 라이덴을 향해 마치 조언하듯 말을 내뱉었다.
“물론 내 말이 제대로 들리진 않겠지만.”
확실한 실력 차이를 보여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카단은 벌써 6성에 도달했고, 라이덴은 아직 4성에 머문 상태였다.
라이덴이 그 어떤 수를 쓰더라도 카단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만약 카단이 데스나이트라도 소환했다면 승부는 더 빠르게 끝이 났을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마나를 많이 썼네. 일단 회복부터 좀 해놔야겠다.’
단순히 몸만 풀 생각이었는데, 피 마법까지 쓰게 되었다며 카단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카단이 무대에서 내려오기 위해 발걸음을 돌린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앙!
큰 폭발음과 함께 연회장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