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폭 네크로맨서-124화 (124/186)

제124화

정적이 흘렀다.

“…….”

단검에 찔린 아이작은 피를 토해내면서도 멍한 표정을 지었고.

“가, 가디언께서 왜…?”

다른 이들 역시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여우 가면을 쓴 해밀턴을 바라봤다.

“참고로 지원군은 기대하지 마. 지원 요청하러 갔던 놈들은 전부 죽였으니까.”

여우 가면 너머로 비릿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아이작 교수. 잘 봐둬라. 죽기 전에 네가 가장 아꼈던 아카데미가 어떻게 무너지는 지를.”

해밀턴의 말에 사람들은 모두가 몸을 움찔하며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해밀턴의 목소리에 죽음의 공포가 아카데미 곳곳에 물들었다.

비아냥거림을 들었을 뿐인데, 이곳에 있는 모두가 자연스레 죽음을 떠올렸다.

“마, 마족이다….”

그때 발렌티나 교관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해밀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발렌티나와 해밀턴을 번갈아 바라봤다.

마족으로부터 왕국을 수호하는 가디언이 마족이라니? 어처구니없고 황당무계한 말.

“제법 눈치가 빠른 녀석이 있었네?”

그러나 해밀턴은 발렌티나의 말이 사실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비릿하게 웃어댔다.

설마 했던 생각이 현실이 되는 순간, 아카데미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희망이 절망이 되어버리는 순간, 사람들의 머릿속엔 허망함이라는 감정이 차올랐다.

“다들 정신 차려라!”

그때 겨우 몸을 일으킨 아이작이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외침에 얼어붙은 시간이 깨지듯 초점을 잃었던 눈들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저, 전투 준비!”

정신을 차린 교관 하나가 큰소리로 외쳤고.

척!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마나를 활성화하며 각자 전투를 준비했다.

“오늘이 또 다른 영웅의 날로 기억될 것이다!”

“왕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라!”

용기를 북돋기 위한, 바닥까지 내려간 사기를 다시 올리기 위한 외침들이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

“왕국을 위해서라. 참으로 안타까운 말이군. 지금 왕국이 너희들을 위한 곳이라 생각하는 건가?”

그러한 외침마저도 해밀턴에겐 우습게 들렸던 것 같았다.

해밀턴은 사람들이 딱하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저어댔다.

“해밀턴. 내가 알던 자네는 분명 인간이었어. 도대체 언제 마족이 된 건가?”

아이작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해밀턴에게 물었다.

분명 아이작의 기억 속 해밀턴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해밀턴의 부모, 형제까지 모두 만나본 적이 있었고, 그들 역시 인간이었다.

분명 아이작이 알고 있는 해밀턴은 인간이었는데.

“가디언이 되기 전부터라고 해야 할까?”

굳이 숨길 필요가 없던 것일까? 해밀턴이 어깨를 으쓱하며 곧바로 대답했다.

아이작은 화가 났다.

그동안 사람들은 인간의 탈을 쓴 마족에게 왕국을 지켜줘서 고맙다며 고개를 조아렸다는 것인가?

해밀턴의 대답이 이어질수록 아카데미에는 절망감과 허망함이 증폭되어 갔다.

“뭐, 어차피 이제는 숨길 필요도 없지. 숨어 살 필요가 없어졌으니.”

촤락!

해밀턴은 그렇게 말하며 목에 걸린 목걸이를 뜯어버렸다.

화아아아악!

목걸이가 끊어지는 순간 해밀턴의 몸에서부터 이질적인 기운이 폭발하듯 퍼져나갔다.

“휴. 개운하군.”

그가 차고 있던 목걸이는 마족의 힘을 감추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마도구였다.

그 성능을 증명하듯, 해밀턴의 몸에선 악의적인 기운이 불길하게 일렁거려댔다.

“설마….”

아이작이 말끝을 흐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마족의 힘을 감추는 도구가 필요 없어졌다는 뜻은 곧 마족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겠다는 뜻.

“왕국을 상대로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인가?”

“뭐, 내 뜻은 아니고 위에서 결정한 걸 알려주는 것뿐이랄까?”

해밀턴이 들고 있던 단검에 불길한 검붉은 기운을 모으기 시작했다.

마족의 힘이 단검에 모이는 모습을 본 아이작은 곧장 시선을 돌려 아카데미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다들 도망쳐라! 싸울 생각하지 마! 도망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라!”

“교수님?”

그런 아이작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교관과 교수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아이작은 그들에게 무언가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 곧바로 상급 언데드 무리를 소환해 해밀턴에게 돌격시켰다.

“두 팔이 멀쩡하더라도 나한테 타격 한 번 입히기 힘들 텐데, 그 꼴로 나에게 덤비겠다고?”

해밀턴은 고개를 저으며 아이작을 무시했다.

“아이작. 넌 언데드 소환에 관한 미친 듯한 재능을 지녔지만, 너의 언데드가 특별할 뿐, 정작 너는 특별하지 않아.

슥.

해밀턴은 자리에 선 채로 단검을 휘둘렀다.

단건이 허공을 가르자, 검붉은 기운이 점차 크기를 키우며 아이작을 향해 쏘아졌다.

촤라라라라라락!

그러자 해밀턴을 향해 돌격하던 언데드들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강화 마법에 걸린 상급 언데드들이 이렇게 손쉽게 쓰러질 줄이야.

이어서 파도처럼 크기를 키운 검붉은 기운이 아이작을 덮치려 했다.

피하기엔 늦었다. 지금 아이작의 상태로는 공격을 피하거나 막는 것 역시 불가능해 보였다.

아이작은 처참한 최후를 받아들이겠다는 듯 들고 있던 손마저 밑으로 떨궜다.

그때.

콰아아아아앙!

교관과 교수들이 아이작 앞을 막아섰고, 마법사들이 방어 마법을 펼치며 아이작을 지켜냈다.

“크헉!”

마법으로 방어해냈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이 있었던 걸까? 몇몇은 피를 토해냈고, 몇몇은 인상을 구기며 통증을 참아냈다.

“이야. 눈물겨운 장면이네?”

짝짝짝짝짝.

교관과 교수들이 힘을 합쳐 아이작을 지켜내는 모습을 보며 해밀턴이 박수를 보냈다.

감탄이 아닌 조롱을 위한 박수.

“다들 도망가라니까!”

아이작은 공격을 막아낸 교관, 교수들에게 감사를 전하긴커녕 되레 화를 냈다.

“팔 하나로 마족을 상대하시겠다고요?”

“더는 홀로 희생하시게 내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동료애라는 게 있지, 저희가 어떻게 갑니까?”

“힘을 합치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교관, 교수들은 전혀 그의 말을 따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훈훈한 대화가 오가는 따듯한 상황이었지만, 아이작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저어댔다.

‘불가능하다.’

영웅 아카데미의 교관, 교수들은 왕국의 엘리트 중 엘리트.

다들 각자의 위치에서 전설 같은 업적을 하나씩 남기고 교육으로 방향을 튼 사람들이다.

분명 뛰어나고 대단한 실력을 갖춘 것은 사실이나.

‘가디언을 상대하기엔 역부족해.’

왕국의 수호자. 가디언 중 하나인 해밀턴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해밀턴은 마족이다. 조금 전에 처리했던 마족이 최상급 마족이라면 해밀턴은 그 이상이야.’

또 다른 가디언이 나서지 않는 이상, 이 전투에서는 희망을 그릴 수가 없었다.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든 시간을 벌겠으니, 다들 생도들을 챙겨 도망치시죠.”

아이작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지만, 교관과 교수들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그들이 아이작의 곁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또 있었다.

“아이작 교수님. 솔직히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가디언이 마족이라고 하는 상황인데, 이 왕국에서 누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믿을 수 있는 건 이곳에 있는 사람들 뿐입니다.”

교관, 교수들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막대한 마족의 힘을 마주하며 공황에 빠진 생도들 역시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디로 몸을 숨겨야 하며, 누구에게 찾아가야 한단 말인가?

당장은 믿을 수 있는 안전한 곳이 없었다.

“교수님. 교육자로서 저 녀석들을 지켜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이 이어지던 중, 크리스 교관이 검을 고쳐 쥐며 아이작 교수에게 말했다.

그 말에 주변에 있던 교관, 교수들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반짝였다.

‘그렇군…. 갈 곳이 없다.’

아이작은 씁쓸하게 혀를 차며 해밀턴을 바라봤다.

여우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으나, 분명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을 것 같았다.

“해봅시다. 죽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다만, 벨리드 교관.”

“네. 교수님.”

“상황이 나빠진다면 그땐 교관님께서 아이들을 챙겨 도망가주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아이들을 챙기겠습니다.”

벨리드 교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작 교수가 마나를 활성화했다.

그의 주변으로 뼈로 만들어진 창이 100개 정도 만들어졌고.

훅!

동시에 100개의 뼈의 창이 해밀턴을 향해 쏘아졌다.

그러자 마법을 준비하던 교관, 교수들도 해밀턴을 향해 고위급 마법을 날려댔다.

콰아아아아아앙!

고위급 마법을 시작으로.

슈슈슈슈슈슉!

활과 투창을 이용한 원거리 공격들이 해밀턴을 향해 동시다발적으로 쏘아졌다.

오우거마저 단숨에 쓰러트릴 정도로 무자비한 공격들이 이어졌다.

“이, 이 정도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생도들 사이에서 누군가 희망 섞인 목소리로 혼잣말을 읊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의 말에 동의하듯 희망을 남은 눈으로 해밀턴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런 그들의 희망은 곧 절망으로 물들었고, 두려움이 그들의 눈에 담겼다.

폭발로 생겨난 흙먼지가 서서히 거쳐지자, 멀쩡한 모습의 해밀턴이 보였다.

해밀턴의 몸엔 자잘한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흠. 역시 대단하긴 하네. 과연 영웅 아카데미야.”

해밀턴은 희망을 그렸던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여유롭게 옷에 묻은 먼지들을 툭툭 털어냈다.

“역시 다 죽이기보다는 몇 놈은 내 수하로 만드는 게 좋겠어.”

해밀턴이 비릿한 눈빛으로 교관, 교수, 생도들을 훑어봤다.

그때.

퍼어어어억!

어디선가 튀어나온 주먹이 해밀턴의 얼굴을 가격했다.

“뭐, 뭐야?”

그 모습을 지켜본 이들은 모두가 당황했고, 어이없다는 듯 멈칫하고 말았다.

영웅 아카데미와 어울리지 않는 작은 키의 여자아이.

연약해 보이는 아이의 주먹에 해밀턴의 고개가 돌아갔으니, 다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쯧.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나?”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그 아이는 인상을 구기더니 재빨리 땅을 박차며 뒤로 물러섰다.

툭.

아이의 공격에 가면이 벗겨진 해밀턴이 헛웃음을 지으며 멀어지고 있는 여자아이를 바라봤다.

귀엽게 생긴 오렌지빛 머리칼의 여자아이는 자기 손과 해밀턴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느닷없이 나타나 해밀턴의 얼굴을 후려친 아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났지?

이곳엔 어떻게 온 거지?

아니, 그보다 조금 전 보여준 그 힘과 움직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걸까?

“카단. 힘들 것 같은데?”

꼬마 아이는 해밀턴을 노려보며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고.

“육탄전으로는 힘들단 거지?”

부서진 연회장 안쪽에서부터 카단이 걸어 나오며 대답했다.

“카, 카단?”

“카단? 네가 아는 아이야?”

사람들이 눈을 끔뻑이며 카단을 바라봤다.

도대체 저 아이는 누구이며, 카단과는 무슨 사이란 말인가?

그보다 의문인 건.

‘카단 저 녀석 왜 이렇게 멀쩡해 보이지?’

‘마족들과 전투하면서 꽤 많이 다쳤던 걸로 기억하는데?’

마족들과 전투를 치렀다기엔 카단의 상태가 너무나 멀쩡해 보였다.

오랜 시간 전투를 치렀음에도 지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전투를 치른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아 보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저, 저건….”

카단의 등 뒤로 피로 만들어진 사신이 거대한 낫을 들고 서 있었다.

“7성 피 마법?”

“카단이 어째서?”

피를 이용해 만들어진 사신의 정체는 언데드가 아닌 7성 피 마법 ‘데시메이션’.

극한의 형벌이라고 불리는 강력한 마법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카단은 루나의 옆으로 다가왔다.

카단의 눈빛은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고, 그는 팔이 잘린 아이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교수님. 저도 돕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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