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조금 전.
해밀턴이 마족이라는 걸 밝히는 순간, 카단은 은밀하게 움직여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연회장 안에는 카단만이 볼 수 있는 영혼의 결정들이 가득 있었다.
‘이것들을 전부 흡수하면….’
카단은 생각할 시간조차 아깝다며 곧바로 영혼의 결정을 전부 흡수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문어 가면을 썼던 마족 ‘베제르’의 시체 위에 떠 있는 영혼의 결정을 흡수하자, 카단은 예상대로 7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수많은 영혼의 결정을 흡수하며 상처가 치유됐고, 체력마저 충전된 상태.
이 정도면 어느 정도 희망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카단은 그렇게 생각하며 곧바로 루나를 소환했다.
“뭐, 뭐야?”
루나는 소환되자마자 당혹을 그대로 드러내며 카단을 바라봤다.
“너 왜 벌써….”
루나는 소환되면서 상당히 많은 제약이 풀렸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치 오래 차고 있던 족쇄가 풀린 것처럼 몸이 가벼웠고, 마나는 빠르게 순환되었다.
“어떻게 벌써 7성이 된….”
루나는 말을 이어가던 중 엉망이 되어버린 연회장을 발견했다.
휙!
루나는 무언가 불길한 힘을 느꼈는지 정색을 하며 연회장 밖을 바라봤다.
“귀족급 마족이라니.”
루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다시 카단을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루나의 질문에 카단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빠르게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주었다.
“나 참. 어이가 없네. 그러니까 마족을 지키기 위한 가디언이 사실은 마족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루나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맞아. 설마설마했는데 가디언 중에도 마족이 숨어있을 줄이야.”
카단 역시 씁쓸한 표정으로 연회장 밖을 바라봤고, 이내 의미심장한 얼굴로 루나에게 물었다.
“루나. 가능하겠어?”
“저 녀석을 쓰러트리는 거? 힘들 거 같은데?”
“가능할 수도 있다는 얘기야?”
“기적이 일어난다면.”
루나의 말에 카단은 한숨을 내뱉었다.
콰아아아아앙!
그때 연회장 밖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카단. 괜찮겠어?”
“뭐를?”
“너 힘을 숨겨왔잖아. 내 존재가 드러나면 꽤 귀찮아질 텐데?”
루나가 자기를 가리키며 말하자, 카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어댔다.
“죽음 앞에서는 숨기는 것도 의미 없어. 일단 살고 봐야지.”
힘을 숨길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다. 카단은 그렇게 말하며 연회장 밖을 바라봤고.
“이제 아카데미에 다니는 것도 의미가 없을 것 같아.”
“흠. 알겠어. 그럼 나
루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땅을 박찼고, 카단은 짧게 심호흡하며 마나를 활성화했다.
“7성이라….”
카단은 아공간을 열더니, 그 안에서 트롤의 시체 2개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당장 새로 소환할 언데드 재료는 없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마법뿐이야.’
촤아아악!
카단이 트롤의 시체를 향해 손을 뻗자, 트롤의 시체에서부터 피가 추출되기 시작했다.
“극한의 형벌을 집행하라.”
카단의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오자, 트롤의 몸에서 추출된 피가 빠르게 움직이며 어떠한 형태를 갖췄다.
스르륵.
피로 만들어진 사신이 피로 만들어진 거대한 낫을 들고 있었다.
데시메이션이라 불리는 피의 사신을 바라보던 카단은 이내 연회장의 무너진 벽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영웅 아카데미에 이런 녀석이 있었나?’
피의 사신을 등에 두고 나타난 카단을 발견한 해밀턴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7성 이상의 네크로맨서는 아이작 녀석밖에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가 알고 있는 정보에 의하면 영웅 아카데미에 있는 네크로맨서는 총 셋.
아이작 교수와 졸업반에 있는 6성 네크로맨서, 그리고 이제 막 4성이 되었다는 신입생까지.
‘6성 네크로맨서는 여자라고 들었는데.’
그러나 피의 사신을 짊어지고 오는 네크로맨서는 아무리 봐도 여자라고 할 수 없었다.
‘뭐, 상관없나?’
7성 네크로맨서가 나타났다고 해서 전황이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해밀턴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카단을 바라보더니, 어서 공격해보라며 손을 까닥거렸다.
촤라라라라락!
순간.
해밀턴의 주변에 수십 개의 마법진이 생겨났고, 마법진에서 피로 만들어진 밧줄이 튀어나왔다.
꽈악!
피로 만들어진 밧줄은 빠르게 해밀턴을 포박했고.
“됐어!”
붉은 안광을 내뿜던 루나가 카단을 향해 외쳤다.
그러자 카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해밀턴을 가리켰다.
스윽.
언제 이동했는 지, 카단의 등 뒤에 있던 피의 사신이 해밀턴 앞에 나타났고.
스릉!
날카로운 피의 낫을 치켜들었다.
“찢어라.”
카단의 말이 내뱉어짐과 동시에 죄수를 처형하듯 피의 낫이 해밀턴의 목을 향해 휘둘러졌다.
까아아아앙!
피의 사신이 휘두른 낫이 해밀턴의 목에 닿았으나, 마치 쇠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만 들릴 뿐, 조금도 목을 베어내지 못했다.
‘이게 무슨.’
데시메이션.
7성 네크로맨서의 강력한 마법 중 하나였고, 이는 오우거의 목도 단번에 베어낼 정도로 강력한 마법이었다.
이처럼 강력한 마법으로도 조금의 피해도 줄 수 없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내구력이 특징인 것 같은데?”
루나가 미간을 좁히며 카단에게 말했다.
멧돼지 가면을 썼던 플로리안 공작 부인은 몸을 불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지녔었다.
문어 가면을 썼던 베제르는 그림자를 아공간 마법처럼 다루는 능력을 지녔었다.
그리고 여우 가면을 쓴 가디언이자 마족인 해밀턴의 능력은 강력한 내구력인 듯싶었다.
“데시메이션이 전혀 피해를 줄 수 없을 줄이야.”
성공만 한다면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단숨에 목을 끊어내기로 유명한 마법.
그 마법이 너무도 쉽게 막히고 말았다.
피의 속박을 통해 완벽한 기회까지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해밀턴은 루나가 사용한 피의 속박 정도는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당해준 것이었다.
“느껴지나? 이게 인간과 마족의 차이다.”
해밀턴이 히쭉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고, 카단을 바라보며 제안했다.
“어때? 네크로맨서. 내 수하가 된다면 너 역시 이러한 힘을 얻게 된다. 인간을 뛰어넘는 힘.”
카단은 코웃음을 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대답할 가치가 없는 제안이었다.
“뭐, 상관없어. 마음에 드는 놈들은 강제로라도 수하로 만들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지금은 해밀턴이 자만심에 빠져 조롱하듯 가볍게 공격을 해왔지만, 그가 진심으로 공격해온다면 아카데미가 전멸하는 건 시간 문제.
‘지금쯤 도착했겠지?’
카단은 멀리 보이는 아카데미의 성벽을 바라봤다.
‘잭 카터 씨라면 어떻게든 가디언들에게 말을 전해줄 거야.’
연회장 밖으로 나오기 전, 카단은 데스나이트 앤서니와 레이스를 소환해 잭 카터를 찾아가라 명령했다.
앤서니가 무사히 잭 카터와 만났다면, 잭 카터는 그의 정보력을 이용해 근처 가디언들에게 연락을 돌렸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어떻게든 시간을 버는 거야.’
지원 요청하러 간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는 말에 카단은 언데드를 이용하기로 했다.
물론 데스나이트가 잭 카터에게 말을 전할 시간도 필요할 것이며, 잭 카터가 정보력을 이용하기까지도 시간이 걸릴 것.
‘제발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자만심에 취한 해밀턴이 지루함을 느끼기 전에 새로운 가디언이든, 지원군이 도착해야만 한다.
그래야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다.
‘전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
카단이 씁쓸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교관과 교수, 생도들 모두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었다.
그나마 교관과 교수들은 체력이 남아 보였지만, 생도들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였다.
“이봐, 네크로맨서야. 더 보여줄 건 없어?”
해밀턴이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묻자, 카단은 곧바로 마나를 활성화했다.
“그건 소용없다는 거 확인했잖아?”
해밀턴은 카단이 사용하는 마법을 바라보며 실망했다는 듯 고개를 저어댔다.
카단이 사용한 마법은 이번에도 데시메이션이었다.
바닥에 흩어진 피들이 뭉쳐 빠르게 사신의 형태로 변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멍청한 네크로맨서였나?”
해밀턴이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순간.
“어라?”
피의 사신이 그대로 카단의 몸에 깃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카단의 몸에서 핏빛 기운이 일렁였고. 그의 손에는 피로 만들어진 거대한 낫이 생겨났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저건….”
무엇보다 같은 네크로맨서이자 카단의 스승인 아이작이 놀란 표정으로 카단의 마법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를 바로 앞에서 지켜보고 있던 해밀턴의 표정에는 당혹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새로운 거 보여달라며?”
카단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고.
“……사신화?”
“역시 알고 있었군.”
데시메이션. 피의 사신를 소환한 뒤, 그 힘을 흡수해 마법을 시전한 네크로맨서 본인이 형벌 집행자가 되는 마법.
“그건 샬로트의 고유 기술일 텐데? 고작 영웅 아카데미의 생도가 어째서?”
말을 이어가던 해밀턴이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네가… 샬로트의 유산을 가져간 놈이냐?”
샬로트의 고유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샬로트와 깊은 관계가 있을 터.
해밀턴은 카단과 샬로트의 유산을 가져간 네크로맨서라고 확신하며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찾았다! 이 빌어먹을!”
해밀턴은 갑자기 땅을 박차더니, 곧바로 카단과 거리를 좁혔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온 해밀턴의 모습에 카단은 당황하며 땅을 박차 뒤로 물러 날려 했다.
그러나.
콰앙!
해밀턴의 손이 카단의 오른쪽 어깨를 짓누르며 그대로 땅에 꽂아버렸다.
“한참 찾았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 숨어있을 줄이야.”
해밀턴은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카단의 어깨를 더욱더 세게 움켜쥐었다.
“말해. 샬로트의 유산은. 열쇠는 어디에 숨겼지?”
그때.
콰릉!
커다란 천둥소리와 함께 은빛 번개가 쏘아져 해밀턴의 머리를 타격했다.
“큭!”
이번은 충격이 있었는지, 해밀턴이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곧바로 고개를 돌려 번개가 쏘아진 곳을 바라봤다.
“저건 또 뭐야?”
카단 역시 놀란 눈으로 번개가 쏘아진 곳을 바라봤다.
벌써 지원군이 온 건가? 아니면 교관이나 교수가 쏜 마법일까?
“알비스?”
번개를 쏜 사람을 확인한 카단이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4성 마법사인 알비스가 마법으로 마족에게 타격을 줄 줄이야.
알비스는 잔뜩 겁에 질린 모습으로 해밀턴을 바라보고 있었다.
“꺼, 꺼져! 이 마족 새끼야!”
있는 힘껏 두려움을 떨쳐내며 해밀턴을 향해 외쳤다.
“우선 귀찮은 것부터 다 쓸어버릴 테니까, 우리 대화는 잠시 후에 해야겠네.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라. 네크로맨서.”
해밀턴은 쓰러진 카단을 향해 비아냥거리듯 말했고, 이내 그의 몸 주변으로 검붉은 기운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해밀턴. 오랜 친구여.”
그때 어디선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아이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밀턴은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자네 말대로 나 자체로는 특별하지 않지만, 내 언데드는 특별하지.”
“다 죽어가면서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가만히 앉아서 아카데미가 무너지는 걸 지켜보라니까?”
해밀턴이 비아냥거리며 말하자, 아이작이 이번엔 카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카단. 시간을 벌어줘서 고맙습니다. 마티아스. 카단 좀 챙겨주세요.”
그 말에 어디선가 마티아스가 나타나 빠르게 누워있던 카단을 챙겨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다.
“쓸데없는 짓을.”
해밀턴은 멀어지는 마티아스를 향해 단검을 집어 던지려 했지만.
“거기까지 하게. 지금부터는 내가 다시 상대해줄 테니.”
아이작이 말로서 그를 붙잡았다. 해밀턴은 헛웃음을 지으며 아이작을 바라봤다.
“그냥 얌전히 기다리라니까 왜 굳이 나서서….”
그러나 이어진 상황에 해밀턴은 끝까지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어느새 허공엔 성을 삼킬 듯 커다란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쿠웅! 쿠웅!
그곳에서부터 거대한 무언가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설마 본 드래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