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가디언 길버트와 디미타르의 등장으로 마족이 불러온 재앙은 종료되었다.
처참한 전투가 이어진 아카데미는 그야말로 초토화된 상태.
마치 거대한 폭풍이 휩쓸고 가기라도 한 듯한 모습은 폐허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시신들을 전부 강당으로 옮겨!”
“부상자들은 연병장으로 가서 사제와 의사들에게 치료받도록 해라!”
“전투가 가능한 자들은 5인 1조로 뭉쳐서 아카데미를 순찰할 수 있도록!”
“마석이 보이면 곧바로 부수고 살아남은 마족이 있다면 즉각 마법탄을 하늘로 쏘아서 위치를 알려.”
초토화된 아카데미 곳곳에서 교관과 교수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상황이 종료되었으니, 이제는 수습할 차례.
다행히 길버트의 부하들이 도착했고, 이어서 근처 기사단과 신전에서부터 사람들을 보내주었다.
덕분에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신전에서 온 사제들은 아카데미 곳곳을 돌아다니며 전투에 참여한 이들에게 회복 마법을 걸어주었다.
게다가 상인 길드에서 보내온 회복 포션 덕분에 많은 이들이 병상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몸 상태가 좋아지니, 이어서 우울한 기운이 아카데미를 덮쳐왔다.
“제발 눈 좀 뜨라고!”
“거짓말이지? 이거 진짜 아니지?”
아카데미 대강당에는 희생자들의 시신이 줄지어 놓여 있었고, 생도와 아카데미 사람들은 목놓아 울어댔다.
졸업을 축하하는 즐거운 파티는 최악의 밤이 되었고, 웃으며 하루를 마무리했어야 할 이들이 영원히 눈을 감았다.
강당만 슬픔에 젖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는 검을 잡을 수 없는 건가?”
“빌어먹을. 다리에 감각이 없어.”
부상자들이 모인 연병장에는 간신히 목숨을 구했지만, 더는 영웅의 길을 걸을 수 없는 이들의 한탄이 들려왔다.
기적이 없이는 회복할 수 없는 이들의 울음소리가 연병장을 축축하게 적셨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서히 죽음을 기다리는 자들도 있었다.
“가족들에게 이 목걸이 좀 전해줘.”
“그래도 영웅들의 묘지에 묻힐 수 있다니, 그건 기쁘군.”
마족의 기습은 많은 것을 빼앗아 갔다.
누군가의 생명을, 인생을, 목표를, 희망을.
절망감이 아카데미에 드리웠고, 이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조차 이들을 위로하긴 힘들 것이다. 따스한 햇볕을 내려주는 것 말고는 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기적을 바라기엔 너무도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아이작. 괜찮은가?”
연병장 한쪽에 서 있던 가디언 ‘길버트’가 안쓰러운 눈으로 바닥에 누워있는 아이작을 바라봤다.
사제의 회복 마법을 꾸준히 받고 있었지만, 그의 상태는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
“괜찮지 않습니다.”
아이작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군요.”
“자네의 마나 하트가 모두 망가졌더군. 본 드래곤을 소환한 대가인가?”
길버트의 질문에 아이작은 미소를 지은 채 맑게 갠 하늘을 바라보며 답했다.
“네. 지금의 저로선 본 드래곤을 소환할 힘이 없었으니까요.”
“마나 하트를 터트리는 대가로 경지를 뛰어넘는 네크로맨시를 사용한 거로군.”
“네. 그래도 후회는 없습니다. 본 드래곤을 일으킨 네크로맨서는 근 1000년 안에 저뿐이지 않습니까?”
“그게 다 죽어가면서 할 소린가?”
아이작의 철없어 보이는 대답에 길버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분노나 짜증의 감정이 아니었다. 걱정과 슬픔의 감정이 그의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길버트 님. 다시 말하지만, 마족이 아님이 확실해질 때까지 그 누구도 믿어선 안 됩니다.”
“알고 있네. 왕국은 물론이고 가디언, 귀족, 그 어떤 집단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지.”
“부디 마족으로부터 왕국을 지켜주십시오.”
“걱정하지 말게. 몇 년이 걸리더라도 왕국에 자리 잡은 마족들의 뿌리를 뽑아낼 것이니.”
길버트의 눈동자에 분노가 담겼고, 아이작은 그런 길버트를 보며 자상하게 웃었다.
“전 아직 샬로트 님의 뒤를 이을 자격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조금만 더 강했다면….”
“아니. 자네는 최선을 다했어.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미 이곳에 있는 모두가 죽었을 걸세.”
“그래도 다행입니다. 길버트 님께서 와주신 덕분에 조금이라도 더 살릴 수 있었습니다.”
아이작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제가 급히 아이작을 향해 회복 마법을 사용했다.
“통증을 줄여주는 마법입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 마법뿐이라…….”
아이작에겐 가장 강한 회복 마법 역시 통하지 않았다.
마나 하트까지 터트리며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아이작의 몸은 그 어떤 회복 마법이나 포션을 쓴다고 하더라도 되돌릴 수가 없었다.
“괜찮네. 그저 고마울 뿐이야.”
아이작은 자신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는지 평온해진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제가 할 말은 다 건넨 것 같군요.”
아이작이 다시 길버트를 바라보며 말했고, 길버트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자네를 위해서라도 기필코 마족을 몰살시키겠네.”
해밀턴이 도망간 이후, 길버트는 아이작 옆에서 마족들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길버트라면 아이작도 믿을 수 있었는지, 아이작은 자신이 알고 있는 마족에 관한 진실을 모두 건네는 것으로 할 일을 끝냈다.
“마지막으로 제 제자를 불러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이작의 말에 길버트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침울한 얼굴의 카단이 서 있었다.
“자네를 부르는군.”
길버트의 말에 카단이 천천히 아이작을 향해 다가왔고.
“잠시 자리를 비워주지.”
길버트는 자연스레 뒤로 걸음을 옮기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자네도 잠시 비켜주겠나?”
아이작은 회복 마법을 걸어주던 사제를 향해 말했고.
“이 반지는 통증을 줄여주는 마법이 걸린 반지입니다. 이걸 착용하시면 조금 더 편하실 겁니다.”
사제는 아이작 교수의 손에 반지를 끼워준 뒤, 자리를 떠났다.
“교수님.”
이내 카단이 조심스레 아이작을 불렀고, 아이작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카단은 두 손으로 아이작의 손을 붙잡았고, 짧게 심호흡을 하며 말을 이었다.
“에스더 선배는 저쪽에서 회복 중입니다. 사제들의 말로는 치료 중 잠깐 정신을 잃었다고 했으니, 곧 깨어날 겁니다.”
“에스더를 못 보고 떠나는 건 조금 아쉽군요.”
아이작이 힘없이 웃음을 지었고, 카단은 이를 악물며 이어질 아이작의 말을 기다렸다.
“카단 잉그마르.”
이어진 아이작의 말에 카단의 표정이 굳어졌다.
“네…?”
카단의 성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고양이들의 주점을 운영하는 잭 카터뿐이었다.
아니, 잭 카터뿐이라고 믿고 있었다.
“지금의 카단을 본다면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샬로트는 자상하게 웃으며 말했고, 카단은 사고가 정지된 듯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걱정하지 마세요. 카단. 내가 알기론 카단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건 나뿐이니.”
“교수님이 어떻게….”
“그야, 샬로트 님과 나는 형제와도 같은 사이였으니까요. 샬로트 님이 처형되기 전 저에게 편지를 하나 보내오시더군요.”
아이작은 그리움을 담은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용을 다 말해줄 순 없겠지만, 요약하자면 카단 자네를 잘 부탁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제가 아카데미에 다니지 않았으면 저흰 만날 수 없었을 텐데….”
“샬로트 님은 분명 자네가 아카데미에 올 거라는 듯 편지를 쓰셨던데?”
아이작이 피식 웃음을 흘리자, 카단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카단. 샬로트 님은 마족과 내통하고 마족의 힘을 사용했다는 죄로 처형당하셨습니다.”
아이작이 전과 다르게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고, 카단은 마른침을 삼키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저는 그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제가 평생을 알아 온 샬로트 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었으니까요.”
만약 아이작이 샬로트를 믿지 않았다면, 카단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카단의 정체를 폭로해 왕국의 처형을 받게 했을 것이다.
“아마도 샬로트 님은 알고 계셨던 거겠죠. 왕국이 마족들에게 물들고 있다는 사실을.”
아이작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세한 진실은 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해주고 싶었어요. 샬로트 님은 죄가 없습니다.”
그 말에 카단은 참고 있던 눈물을 터트렸다.
“카단. 샬로트 님의 흔적을 찾아다니세요.”
샬로트가 카단의 손을 놓더니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끊어 카단에게 건넸다.
“제 연구실에 가보면 구석에 문이 잠긴 창고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건 그곳을 여는 열쇠입니다.”
카단은 조심스레 그가 건네는 목걸이를 받았고. 아이작은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샬로트 님의 편지와 샬로트 님의 흔적이 남겨진 곳의 위치를 표시해둔 지도가 있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교수님이?”
“말했잖습니까? 형제 같은 사이였다고. 아, 그렇다면 카단은 제게 조카 같은 존재군요.”
아이작은 통증을 느끼는 와중에도 껄껄 웃었다.
“후우.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군요.”
이내 아이작이 한숨을 내뱉으며 다시 진중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카단.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기에 지금이라도 말해주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카단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아이작을 빤히 바라봤다.
“카단은 마나를 흡수하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마나 드레인이라고도 알려진 능력이죠.”
“마나 드레인이요?”
“천부적인 재능. 오로지 하늘이 정해준 자만이 지닐 수 있는 능력이죠. 제가 아는 사람 중에는 카단이 그 능력의 유일한 소유자입니다.”
순간 카단의 머릿속으로 많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과거 그 능력을 지닌 악인 덕분에, 저주받은 능력이라고도 알려졌습니다.”
아이작의 이어진 말에 카단은 헛웃음을 삼켰다. 평생을 모르고 살았던 능력이라니.
“그 능력에 대해서도 잘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뒀으니, 한 번 확인해보세요.”
아이작은 그렇게 말하며 기침을 해댔다.
기침과 함께 피가 흘렀고, 카단은 급히 아이작의 고개를 옆으로 돌려 피를 토하게 했고, 소매를 이용해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전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그가 아쉬운 눈빛으로 카단을 바라봤다.
“샬로트 님을 대신해서 좀 더 오래 지켜보고 싶었는데. 참 아쉽습니다.”
“교수님….”
“사람은 언젠가 죽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진 마십시오.”
아이작이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카단. 당신은 제가 가르친 네크로맨서 중 가장 뛰어난 네크로맨서입니다. 그러니 꼭 살아남으십시오.”
마치 샬로트가 남긴 유언을 들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아, 그리고 네크로폴리스는 존재합니다. 샬로트 님이 먼저 다녀오셨으니, 전설 속에만 존재하는 곳은 아니지요. 그러니 꼭 찾아내십시오.”
점차 아이작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죽음이 다가오니 이제야 몸이 편안해지는 기분입니다.”
카단은 알고 있었다.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아이작이 더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만, 차마 힘이 없어 다 내뱉을 수 없다는 것을.
“궁금해하던 사후세계를 드디어 경험하게 되는군요.”
카단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저 그의 손을 붙잡고,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것.
“에스더와 아카데미 사람들에겐 저를 대신해 안부를 전해주시겠습니까?”
그뿐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스승으로서의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아이작은 후련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카단. 잘 지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