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희생자들을 위한 장례식.
“왕국의 모든 이들이 그대들의 희생을 기억할 것이고, 그대들의 죽음을 기억할 것입니다.”
한순간에 가디언을 잃었고, 미래의 영웅들을 잃었다.
마족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영웅 아카데미를 붕괴시켰다는 사실에 왕국 곳곳에 퍼져나갔다.
왕국은 슬픔에 물들었다. 동시에 두려움에 휩싸였다.
“왕국은. 아니, 우리는 그대들을 위해 싸울 것이오.”
언제 마족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른 것은 가디언 길버트의 선택이었다.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는 것이 첫 번째 의도였으며, 마족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두 번째 의도.
“우리는 평생 오늘을 기억할 것이고, 오늘부로 왕국에 자리 잡은 마족들의 뿌리를 뽑아 불태울 것이다.”
그리고 마족과의 전쟁을 선포하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장례식이 치러지는 대강당에는 희생자들의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 슬픔 속에 눈물을 흘렸다.
한참 장례식이 진행되는 도중, 멀리서 이를 바라보던 가디언 디미타르가 길버트에게 물었다.
“길버트.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왕국은 하루아침에 전시상황으로 변했으니, 지도자들이 나서서 혼란을 바로잡아야 했다.
“우리 두 사람을 중심으로 세력을 만들어야겠지.”
길버트는 생존한 아카데미의 교관과 교수. 그리고 생도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야 해. 가디언 중에서 누가 마족과 손을 잡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디미타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유물을 지니고 사용하는 가디언이라면 믿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신전의 사제와 팔라딘들 역시 소중한 아군이 되겠어.”
희망을 찾기 위한 대화였음에도 두 사람의 얼굴엔 그림자가 가득했다.
슬픔과 분노를 느끼면서도 두 사람은 가디언으로서 미래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길버트. 왕성에 믿을 만한 자가 있을까?”
“만일 국왕 폐하도 마족과 관련이 되어있다면 왕성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을 걸세.”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마족에게 대항하기 위한 세력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
막막하기만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두 가디언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빠졌다.
“우선 영웅 아카데미의 폐교는 막을 수 없겠군.”
“그렇겠지. 계속 운영해봤자, 모든 지원도 끊길 거야. 무엇보다 마족들의 표적이 될 게 뻔해.”
“길버트. 자네에게 아카데미 정리를 부탁해도 되겠나?”
“물론. 아카데미 정리는 물론 마탑을 비롯한 수도 인근에서 세력을 모아보겠네.”
“나는 에어록손 성벽을 중심으로 힘을 모아보도록 하지. 가디언들도 하나씩 만나볼 생각이야.”
이어진 디미타르의 말에 길버트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조심하게. 그 누구도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니.”
“걱정은. 현역 가디언 중 내가 가장 강하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디미타르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고, 길버트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함께 왕국을 구하세.”
“그러자고. 그런데 장례식은 언제까지 할 생각인가?”
“유족들이 찾아올 때까지. 챙겨줄 사람이 없는 희생자들은 내가 책임져야지.”
“그럼 그동안 함께 믿을 만한 사람이나 추려보도록 하자고.”
***
늦은 밤.
아카데미 연병장으로 교관과 교수. 그리고 생도들이 모였다.
그들은 모두 아카데미 정복을 입고 있었으며 암울한 표정으로 구령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 회의 끝에 영웅 아카데미는 폐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붕대를 칭칭 감고 있던 크리스 교관이 구령대에 오르더니,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를 들은 사람들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폐교.
수많은 영웅을 배출한 위대한 역사를 지닌 영웅 아카데미가 하루아침에 폐교를 결정했다.
이 사실을 거부하려는 이나 반박하려는 이는 없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영웅 아카데미가 더는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교관과 교수들은 퇴직하게 되었고, 생도 여러분들은 오늘부로 아카데미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아카데미를 이어갈 수 없으니, 생도들을 졸업시키는 것이 교관과 교수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3학년 15명. 2학년 12명. 1학년 10명. 총 37명의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영웅 아카데미의 생도는 총 96명. 그러나 마족과의 전투 끝에 살아남은 생존자는 겨우 37명뿐이었다.
부상이 심해 재기 불능한 생도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20명의 생도만이 온전한 상태로 아카데미를 졸업하게 되는 것.
“모두가 영웅의 길을 걸으십시오. 그대들은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는 씁쓸한 졸업 축하를 끝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여러분들에게 선택지를 드리겠습니다.”
교관과 교수들은 이미 내용을 알고 있기에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한숨만 내쉬고 있었고.
생도들은 모두가 고개를 들고 이어질 크리스의 말을 기다렸다.
“가디언 길버트 님과 디미타르 님이 이끄시는 저항군에 합류할지. 이곳을 떠나 자유롭게 살아갈지.”
크리스 교관은 눈빛 하나 흩트리지 않은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전투가 가능한 교관과 교수들은 대부분 저항군에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저항군의 기지는 에어록손, 더글라스, 트라팔가. 세 곳입니다.”
저항군에 합류하게 된다면 각자의 능력과 특기에 따라 목적지가 정해지게 될 것이다.
크리스 교관은 그렇게 말하며 생도들을 바라봤다.
생도들은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크리스 교관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친구, 동료, 스승을 잃은 이들의 분노는 마족을 향하고 있었고, 생도 모두가 저항군에 합류한다는 듯한 의지를 내비쳤다.
“감정에 이끌려 섣부른 판단은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중요한 결정입니다.”
크리스 교관은 생도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로 했다.
죽기 전 분노에 휩쓸려 저항군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충분히 생각해야만 했다.
“벨리드 교관님.”
크리스 교관의 부름에 벨리드 교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허공에 모래시계 하나가 생겨났다.
크리스 교관은 고맙다는 듯 고개를 꾸벅이더니, 다시 생도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모래가 다 떨어질 때까지 선택해주십시오.”
그 말에 생도들은 잠시 멈칫거리더니, 이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기사단, 길드 등에 제의를 받은 졸업생들은 혼란에 빠졌다.
“왕국의 기사단은 안전하지 않을까?”
“국왕 폐하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인데, 왕국의 검이 되겠다고?”
“콜린퍼스 기사단과 라이언 기사단은 독립하기로 했대.”
제의받은 단체에 입단할지, 이대로 저항군에 합류할지.
그때 클로제 더글라스가 뭘 그렇게 고민하냐는 듯 졸업반 생도들을 향해 말했다.
“교관님들께 물어보고, 저항군에 합류하기로 한 곳이라면 그곳에 들어가 마족과 싸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마족과 관련되지 않은 곳이라면 그 어떤 선택지를 선택해도 괜찮다.
“하지만 클로제. 만약 저항군에 간다면 가디언 님께서 직접 우릴 가르쳐 주시지 않을까?”
“맞아. 그게 고민이야. 어느 것이 더 도움이 될까?”
두 졸업반 생도의 말에 클로제 더글라스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졸업반 생도들은 개인의 이득을 계산하며 고민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마족을 상대할 힘을 키우기 위한 적절한 곳을 선택하기 위한 고민이었다.
“어느 곳이든 똑같아. 안전을 따지자면 저항군 쪽이겠지만.”
졸업반에 비해 2학년 생도들은 오랜 고민 없이 미래를 선택했다.
진로가 딱히 정해지지 않았으니, 마족과 싸우기 위해선 저항군에 들어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고민할 게 뭐 있어?”
“가족들이 걱정이긴 한데.”
“가족들도 모두 거처를 옮겨야겠지.”
“마족에게 대항하는 귀족 가문이라면 따로 힘을 합치고 있다니,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도 있어.”
귀족들은 가문으로 돌아가 가문과 함께 마족에게 맞설지를 고민했지만, 평민 출신들은 달랐다.
“우린 무조건 합류할 거야.”
“저항군에 들어가 마족들에게 복수하겠어.”
그리고 1학년 생도들은 한곳에 모여 있긴 했지만, 그 누구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생존한 1학년 생도는 10명.
그러나 부상자를 제외한다면 크리스 교관이 제안한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건 8명뿐이었다.
“각자 선택은 끝난 거야?”
푸른 머리칼을 질끈 묶은 블랑쉬가 조심스레 묻자, 1학년 생도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저항군에 합류할 거야.”
“가문으로 돌아가는 선택지도 있지만, 마족과 싸우려면 아무래도 저항군에 합류해야 할 것 같아.”
“두렵긴 하지만, 그래도 싸워야지. 먼저 떠난 녀석들을 위해서.”
가장 먼저 수다쟁이 삼인방은 허먼과 브렌트, 데이비드가 손을 들고 말했다.
“난 가문으로 돌아간다.”
이어서 라이덴이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대답했고.
“나, 나도 저항군에 합류하려고. 가족들이 걱정되긴 하지만 교관님들이 거처를 옮겨주신다고 했어.”
카단의 첫 친구인 알비스도 조심스레 손을 들며 답했다.
그들의 대답에 블랑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저항군에 합류할 거야. 어차피 저항군의 기지가 우리 가문에 지어지니까, 난 비교적 선택이 쉬웠어.”
이제 남은 사람은 둘.
1학년 생도들이 동시에 카단과 칼리아를 바라봤고.
“난 따로 갈 곳이 있어. 그곳에서 마족과 싸울 생각이야.”
먼저 칼리아가 분노를 억누르는 듯한 표정으로 겨우 입을 떼며 말했다.
말끝이 떨리는 것으로 보아 그녀 역시 마족에 대한 엄청난 분노가 쌓여 있는 듯했다.
“카, 칼리아 괜찮겠어?”
그러자 알비스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고, 칼리아는 심호흡을 가볍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걱정하지 않아도 돼. 스승님한테 갈 거니까. 나에겐 그곳이 제일 안전한 곳이야.”
마지막으로 카단의 대답만이 남아있었고, 생도들의 시선이 모두 카단을 향했다.
“카단. 너는?”
블랑쉬가 조심스레 묻자, 카단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나도 따로 행동할 생각이야.”
“뭐?”
그 말에 블랑쉬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카단이라면 분명 저항군에 합류한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따로 행동한다는 것일까?
“네가 아무리 7성이라고 해도 마족을 혼자 상대하는 건 무모한 짓이야!”
블랑쉬가 분노 섞인 듯한 목소리로 말하자, 알비스와 수다쟁이 삼인방 역시 놀란 눈으로 카단을 바라봤다.
“카, 카단. 칼리아는 갈 곳이라도 있지, 너는 어디 가려고?”
알비스가 당황한 목소리로 묻자, 카단은 괜찮다며 미소를 지었다.
“찾아야 할 게 생겼거든.”
카단의 말에 그를 붙잡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 누구도 카단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죽지 마. 널 처음으로 쓰러트리는 건 내가 할 거야.”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고, 침묵을 깬 건 블랑쉬였다.
블랑쉬는 매서운 눈으로 카단을 바라보며 말했고.
‘여전하네.’
카단은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어떤 선택을 하던 존중하겠습니다. 그러니 각자의 자리에서 끝까지 살아남으십시오.”
생도들은 다시 연병장 가운데로 모였고, 크리스 교관은 그들을 향해 말했다.
“이제 떠날 시간입니다. 짧게나마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크리스 교관의 말은 이별을 실감토록 했고, 몇몇 생도들은 눈물을 글썽였다.
“작별 인사가 끝난 생도 중 저항군에 합류할 생도는 저에게 오시고, 자유를 선택한 생도는 벨리드 교관님께 찾아가십시오.”
그 말에 저항군을 선택한 생도들과 자유를 선택한 생도들이 각자 악수를 하거나 부둥켜안으며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미 1학년들과 인사를 끝낸 카단은 곧바로 벨리드 교관에게 향하려 했으나.
“카단.”
누군가 카단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엔 익숙한 얼굴들이 서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마티아스. 졸업반인 클로제 더글라스, 루카스와 아라드. 그리고 카단 외의 유일한 네크로맨서인 에스더까지.
카단은 반가운 얼굴들을 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고.
“우린 모두 저항군에 합류하기로 했다.”
클로제 더글라스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카단.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너도 합류하는 거지?”
이어서 마티아스가 말을 걸어왔고, 카단은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뇨. 저는 아버지의 유산을 찾아다닐 생각입니다.”
“아버지? 너희 아버지는 상인이라고 하지 않았어?”
전시상황에 돈이라도 필요하다는 건가? 주변에 있던 이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뇨. 사정이 있어서 거짓말을 좀 하고 있었습니다.”
카단은 잠시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아버지는 네크로맨서입니다. 그리고 제 진짜 이름은.”
더 이해되지 않았다. 왜 상인 가문의 자식이라고까지 하면서 네크로맨서인 아버지를 왜 숨겼을까?
설마 악인의 자식인 걸까?
카단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카단 잉그마르입니다. 위대한 네크로맨서 샬로트 잉그마르의 아들이자 유일한 계승자입니다.”
이제는 이름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듯, 이제는 그 이름의 무게를 견딜 수 있다는 듯 당당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