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화
왕국 북쪽 성벽 인근에 있는 도시 라도미르.
우중충한 날씨 때문일까?
도시 안의 분위기는 우울했고, 거리는 지나가는 사람 몇몇만 보일 뿐 텅 비어 있었다.
작게나마 사람들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 곳은 술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주점뿐이었다.
“주인장. 그 얘기 들었나? 어제 또 도시 하나가 폐허가 되었다는군.”
바 테이블에 앉은 민머리 남성이 술잔을 비우며 한탄하듯 말했다.
“요즘 다시 마족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군요. 잠잠하다 싶었는데.”
“쯧. 말세네. 말세야. 이러다가 정말 마족들이 왕국을 통째로 지배하는 건 아닌지.”
민머리 남성은 인상을 찌푸리며 술잔을 비워냈다.
“그래도 저항군이 열심히 버텨주고 있지 않습니까?”
점장은 씁쓸하게 웃으며 그의 빈 술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3년. 벌써 3년이나 지났네. 저항군이 열심히 버텨주는 건 고맙지만… 솔직히 이젠 모르겠네.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까?”
민머리 남성은 채워지는 술잔을 바라보며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3년. 마족이 영웅 아카데미를 습격하며 세상에 다시 존재를 드러낸 이후 3년이 지났다.
더는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었는지, 마족들은 왕국의 주요 도시들을 공격해댔고, 가디언들이 이끄는 저항군들이 나타나 그들과 싸웠다.
그렇게 세 번째 마족 전쟁의 시대가 열렸다.
“비록 많은 영웅을 잃고, 많은 도시가 함락되었지만, 꼭 나쁜 소식만 있는 건 아닙니다.”
민머리 남성이 우울감에 빠져 한숨을 푹푹 내쉬자, 점장이 애써 웃으며 위로하듯 말했다.
“그렇다면 주인장이 기분 좋은 소식 좀 들려주게. 하도 우울한 소식만 듣다 보니 미쳐버릴 것 같구먼.”
민머리 남성이 술잔을 다시 비우며 말했다.
“마침 따끈따끈한 소식 몇 개를 가져왔습니다.”
점장이 웃으며 답하자, 주점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점장에게 쏠렸다.
“어서 말해주쇼.”
“저항군의 승리 소식인가?”
3년 동안 이어진 전쟁에 왕국은 암울한 구름에 뒤덮였고, 사람들은 작은 희망에도 기대를 걸었다.
사람들이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자, 점장은 기분 좋은 미소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남쪽에서 저항군이 도시 하나를 되찾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새로운 저항군의 요새가 되지 않을까요?”
점장의 말에 사람들이 작게 환호했다.
“그거 정말 좋은 소식이군. 이게 몇 달 만에 승리 소식이야.”
“저항군이 북쪽까지 올라오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래도 전진 기지가 하나 더 생겼으니 좋은 소식이지.”
“이번 전쟁에도 사상자가 많았겠네요.”
사람들의 말을 하나하나 귀담아듣던 점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게다가 새로운 영웅들이 등장했다고 합니다.”
이어진 점장의 말에 사람들의 눈이 다시 휘둥그레 떠졌다.
“마티아스, 클로제 더글라스, 에스더. 이 세 사람 이후로 새로운 영웅의 소식은 잠잠하더니!”
“드디어 새로운 영웅들이 탄생한 모양이군!”
“그 영웅들의 이름은 알고 있나?”
사람들이 기대감을 담은 눈빛으로 점장을 바라봤고, 점장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블랑쉬와 알비스, 그리고 라이덴. 셋 모두 영웅 아카데미 출신이라고 하더군요.”
“영웅 아카데미의 블랑쉬 님이라면. 더글라스 가문의 영애 아니신가?”
“라이덴 님은 분명 몽브레이 가문의 막내 자제분이시겠군.”
“알비스는 처음 듣는 이름인데?”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새로운 영웅들의 이름을 되뇌었다.
노동자인 이들이 영웅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주는 것.
살아남은 이들이 영웅들의 이름들을 후세에 알리는 것.
그렇기에 이들은 새로운 영웅들의 이름을 열심히 되뇌었다.
“저항군 소속은 아니지만, 왕국 곳곳에서 마족 사냥이 이뤄지고 있으니, 저희에게도 희망은 있습니다.”
점장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서쪽에는 ‘피의 기사’, 동쪽에는 ‘불멸의 불꽃’이라는 이명의 마족 사냥꾼들도 유명하지 않은가?”
점장의 희망찬 목소리 덕분인지, 주점 안의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우중충한 안개가 걷힌 듯 사람들의 얼굴에도 작게 미소가 걸렸다.
“희망에 젖은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정말 웃음도 안 나오는군.”
그때 주점 구석에서 홀로 술을 훌쩍이던 남자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고, 그는 술잔을 비우며 말을 이어갔다.
“당신들은 이 도시가 왜 멀쩡한 줄 알아?”
남자의 질문에도 사람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쯧쯧쯧.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네. 멍청한 놈들.”
남자가 비아냥거리며 혀를 차자, 민머리 남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보쇼. 뭘 알고 있기에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요? 어디 한번 들어나 봅시다.”
날이 선 목소리를 듣자, 구석에 있던 남자는 피식 웃으며 바 테이블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봤다.
“이 도시의 영주는 마족이야. 인간인 척 피난민들을 모으고, 그들을 몰래 납치해 마족으로 만들고 있지.”
“그, 그게 무슨 말이오? 영주님이 마족이라니?”
“거짓말하지 마! 영주님은 분명 마족 놈들에게 끝까지 저항하겠다고 하셨어!”
남자의 말에 사람들이 당황하거나 흥분하며 그에게 달려들려 했다.
“마족들이 이 도시를 뭐라고 부르는 줄 알긴 알아? 작업장! 이 도시는 피난민들을 납치해 마족으로 만드는 마족 양성소야! 쓰레기 같은 도시라고!”
남자의 외침에 그에게 달려들려던 이들이 멈칫하며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점장이 마른침을 삼키며 그에게 물었다.
“그걸 저희가 어떻게 믿습니까?”
술에 취한 자가 하는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세상이 흉흉해졌다지만, 거짓으로 영주를 모독한다면 당장이라도 그를 내쫓을 생각이었다.
“내가 산 증인이야. 그 빌어먹을 곳에서 겨우 탈출했는데, 쯧. 갈 곳이 없더군.”
아마 곧 붙잡히겠지. 남자는 씁쓸히 말하며 다시 술잔을 비워냈다.
작게나마 희망의 불씨를 키워내던 주점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변했다.
취객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없다지만, 이곳은 리베라 왕국 북쪽에 있는 도시.
저항군들의 요새와 가장 거리가 먼 곳이다.
왕궁도 마족들에게 지배당했으며, 가디언 중 한 명이었던 해밀턴마저 마족이었다.
영주라고 해서 마족이 아니라는 법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근처 도시들이 폐허가 되었다는 소식은 종종 들렸지만, 이들이 사는 도시 ‘라도미르’는 3년 동안 마족에게 그 어떤 위협도 당하지 않았다.
가디언, 저항군도 없는 이 도시는 왜 3년 동안 안전했던 걸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린 그저 이곳을 안전한 도시라고 속이기 위한 인형에 불과했던 건가?”
“영주님이 정말 마족이라고?”
사람들의 얼굴에 절망감이 물들어갈 때쯤.
스륵.
창가 테이블 쪽에서 조용히 앉아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던 남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코트를 입고 있던 그는 구석진 곳에 앉아 비아냥거리던 남자를 향해 걸어갔고.
“이봐.”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뭐, 뭐야?”
건장한 체격을 지닌 사람이 다가오자, 구석에 있던 남자는 겁먹은 듯한 표정으로 움찔했다.
“그 얘기 자세히 듣고 싶은데. 대신 술값은 내가 내도록 하지.”
그러자 건장한 체격의 남자는 테이블 위로 은화 하나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
도시 라도미르의 중앙 종탑.
사람이 있어선 안 될 종탑 꼭대기에 하얀 코트를 입은 남성이 올라서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카단이었다.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며 앳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생도 시절보다 키도 조금 자란 듯했으며, 이목구비도 좀 더 뚜렷해지면서 어엿한 남성미를 물씬 풍기게 되었다.
‘공장 같은 곳이라 이건가?’
도시를 내려다보던 카단은 고개를 저으며 좀 전에 취객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영주의 성 뒤쪽에 커다란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 창고라고 불리는 곳인데, 실은 납치한 피난민들을 가둬놓는 감옥이죠.
라도미르의 영주는 마족이었다.
영주는 안전한 곳을 찾아 라도미르에 도착한 피난민 중 쓸만한 인간을 납치해 마족으로 만드는 작업을 이어갔다고 한다.
-저는 반년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분명 봤습니다. 마족으로 변하는 피난민들을.
카단은 남자의 말을 떠올리며 도시 가장 안쪽에 있는 영주의 성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종탑 꼭대기에서도 내려다볼 수 없을 정도로 높게 지어진 영주의 성.
‘저 성 너머에 피난민들을 가둬놨다는 거지?’
카단은 성 너머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마족 놈들 아주 살판이 났군. 이딴식으로 마족을 양성하고 있다니.’
마계에서 마족을 소환하는 것은 제약이 컸다. 그러나 마석을 이용해 인간을 마족으로 만든다면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마족이 탄생하게 되었다.
‘마족들의 우두머리는 이곳을 마계로 바꿔버릴 생각인 것 같은데.’
짧게 한숨을 내뱉는 사이, 영주성 쪽에서 반투명한 영체가 빠른 속도로 카단을 향해 날아왔다.
-확인했습니다! 대충 세어봐도 30명은 넘게 감옥에 갇혀 있던데요?
반투명한 영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카단이 소환한 언데드. 레이스였다.
“다들 상태는 괜찮아 보여?”
-네. 아주 건강해 보여요. 물론 다들 혼이 빠진 듯한 모습이었어요. 삶의 의지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레이스는 영주의 성 뒤편에 숨겨진 가목에서 자신이 보고 들은 전부를 카단에게 알려주었다.
레이스의 보고를 들을 때마다 카단의 미간은 점차 좁혀졌고.
-그리고 마족화 부작용으로 괴물이 된 마족들도 감옥에 가둬놨더라고요.
이내 마족들까지 봤다는 말까지 듣게 되자, 카단은 혀를 차며 영주성을 바라봤다.
“빨리 처리해버려야겠네.”
-감옥을 지키는 병사들이 꽤 많았어요. 하나 같이 강해 보이던데?
“그 병사들이 마족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영주의 기사단일 수도 있고.”
레이스의 경고에도 카단은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튼 고생했어.”
카단은 레이스에게 그만 돌아가도 좋다는 듯 손짓했고.
스륵.
레이스는 완벽히 투명한 상태로 변하며 서서히 사라졌다.
잠시 후.
카단은 그 어떤 변장도, 싸울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영주의 성 앞까지 도착했다.
“영주님의 허락을 받지 않은 자는 이 성문을 지나갈 수 없습니다.”
“따로 약속이 없다면 돌아가 주시길 바랍니다.”
영주성의 성문으로 다가가자, 그 앞을 지키고 있던 자들이 긴 창으로 X자를 그리며 카단의 앞을 막아섰다.
“루나. 이 자들은 인간이야? 마족이야?”
그러자 카단이 뒤쪽에 있는 루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3년이 지났다지만, 루나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사랑스러운 말괄량이 소녀 같은 모습 그대로였다.
“둘 다 마족화가 진행 중이야. 꽤 많이 진행된 거 같은데?”
루나는 미간을 좁히며 대답했고, 카단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나만 살리고 하나는 죽여.”
카단의 말에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크아아아아아악!”
그와 동시에 경비병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순식간에 동료를 잃은 경비병이 마족의 힘을 활성화하며 카단과 싸우기 위해 창을 내지르려 했다.
“가서 영주한테 전해.”
카단은 자신에게 창을 겨눈 경비병을 향해 무덤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웬 미친놈 하나가 쳐들어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