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칼리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고.
“그러게.”
카단도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카데미 폐교 후 저항군에 합류하지 않았던 두 사람이 3년 뒤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반가운 건 둘째치고. 카단. 네가 왜 여기에 있지?”
칼리아가 순간 얼굴에서 반가움을 지우더니, 경계하는 눈빛으로 카단을 바라봤다.
그녀의 손은 자연스레 검의 손잡이를 향했다.
만약 카단이 마족과 어떤 연관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검을 휘두를 것만 같았다.
“오지랖.”
“뭐?”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도시에 잠깐 들렀다가 우연히 이 도시의 비밀을 듣게 됐거든.”
“비밀?”
어차피 숨길 것도 없었기에 카단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이 도시의 비밀들을 곧바로 알려주었다.
“이 도시가 마족들의 양성소라고 하더라. 확인해보니 사실이었고.”
카단의 말이 끝나자 칼리아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칼리아 넌 아무래도 이 사실을 모르고 온 것 같은데, 여기엔 어쩌다가 오게 된 거야?”
카단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칼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그냥 근처를 지나다가 폭발 소리를 듣고 마족이 나타났다고 생각해서 왔을 뿐이야.”
즉. 칼리아는 그저 마족이 도시에 쳐들어왔다고 생각하며 무작정 달려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마족 앞이 아닌 카단의 앞이었다.
“그래도 잘못 온 건 아닌가 보네. 카단. 그 마족 양성소에 대해서 자세히 듣고 싶은데.”
칼리아가 묻자, 카단은 기꺼이 그러겠다며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이곳의 영주가 피난민들을 납치해 강제로 마족으로 만들고 있었다는 거지?”
“응. 맞아. 감옥에 사람들을 가둬놓고 강제로 마석을 심는 거지.”
카단이 고개를 끄덕이자, 칼리아의 눈동자가 계단을 향했다.
“도시 하나를 통째로 마족 양성소로 쓰다니. 이 빌어먹을 마족 새끼들이…!”
도시 라도미르의 비밀을 알게 되자 칼리아는 분노한 듯 씩씩거렸다.
“영주성 안의 병사들은 대충 다 처리한 것 같고, 이제 영주를 만나러 갈 예정인데, 같이 갈래?”
카단이 천천히 손을 내밀며 제안하자, 칼리아가 곧바로 카단의 손을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영주의 집무실.
벌컥!
영주의 그 어떤 허락이 없었음에도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영주는 예상하였다는 듯 담담하게 활짝 열린 출입문을 바라봤다.
‘침입자는 하나라고 들었는데.’
문 너머에서부터 집무실로 들어온 침입자는 둘이었다.
검을 든 붉은 머리칼의 여성과 흰 코트를 걸친 남자.
뭐, 상관없나. 영주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두 명의 침입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겁도 없이 여기까지 왔군.”
그러자 침입자. 아니, 카단이 영주를 훑어보며 대답했다.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없는 모양이야. 고맙게 도망가지도 않았네.”
“크하하하하! 네까짓 놈한테 겁이라도 먹어야 했단 말이냐? 내가?”
카단의 말에 영주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어댔다.
분명 영주성의 유일한 생존자가 자기 하나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영주는 침입자들을 보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포식자의 눈으로 두 침입자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봐, 영주 나리. 마족 공장. 아니, 마족 양성소를 계획한 건 너 혼자 한 거야? 아니면 도와준 마족이 또 있었나?”
카단은 마치 심문이라도 하듯 여유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주제도 모르고 내 죄를 물으려 하다니. 한심한 인간이로군.”
“순순히 답해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
카단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손목에서부터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5기의 데스나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단. 내가 해도 될까? 저 비열한 웃음을 보고 있으니 참기가 좀 힘든데.”
스릉!
그러자 칼리아가 검을 뽑으며 카단에게 다가와 말했다.
“당장 죽이기보다 정보를 좀 얻을 생각이었는데.”
“어차피 마족이라 팔, 다리 잘라도 죽진 않을 거야. 전투 불능 상태로만 만들어 놓으면 되는 거지?”
“뭐, 그래. 여긴 칼리아 너한테 맡길게.”
칼리아가 마무리하겠다는 말에 카단은 기꺼이 양보하겠다며 뒤로 물러났다.
3년 동안 칼리아가 얼마나 발전했을지 궁금하기도 했으니, 이번엔 뒤에서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때.
“칼리아…? 카단?”
영주가 고개를 갸웃하며 칼리아와 카단의 이름을 계속 되뇌었다.
“설마 피의 기사와 샬로트의 자식인가?”
영주의 말에 카단이 눈을 끔뻑이며 옆에 있는 칼리아를 바라봤다.
“피의 기사…?”
칼리아는 애써 카단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왜 네가 피의 기사야?”
카단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질문을 던졌고, 칼리아는 짙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어댔다.
“몰라. 굉장히 민망하니까, 그렇게 부르지 말아 줄래?”
칼리아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에 카단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칼리아도 이런 모습이 있었구나.
늘 당당하고 시크한 모습을 보여줬던 칼리아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게 되니 무언가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크하하하하! 오늘 내가 운이 좋은 모양이군. 현상금이 걸린 인간 두 명이 제 발로 찾아오다니!”
영주는 뭐가 그리 기쁜지 큰 소리로 웃어댔고, 카단과 칼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영주를 바라봤다.
“마족들 사이에서 우리가 꽤 유명한 것 같은데?”
“카단. 네가 샬로트 님의 자식이라는 건 사실인 건가?”
칼리아가 고개를 돌려 카단에게 물었다.
3년 전, 카단이 샬로트의 자식이자 유일한 제자임을 밝혔을 당시 칼리아는 그 자리에 없었다.
칼리아는 소문으로만 카단이 샬로트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고, 이번 기회에 제대로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맞아.”
“상인의 아들이라더니. 내가 아는 샬로트 님은 상인이 아닌데?”
“그 당시엔 어쩔 수 없었으니까. 속여서 미안하다.”
“괜찮아. 충분히 이해해.”
카단이 사과하자, 칼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훈훈한 대화가 이어지려던 찰나.
“두 사람 모두 편히 죽을 순 없을 것 같다.”
영주가 마족의 힘을 활성화했고, 그의 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이 정도면 상급 마족 정도려나.’
영주는 확실히 병사, 기사단보다 강함 힘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마족화도 거의 끝이 났는지, 마족의 힘을 자유롭게 다루는 것 같았다.
“칼리아. 조심해. 보기엔 약해 보여도 위험한 녀석이니까.”
카단이 경고하자, 칼리아는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이며 검을 고쳐 쥐었다.
“말했듯이 팔, 다리 하나씩만 잘라둘게. 나머진 알아서 처리해.”
칼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땅을 박찼다.
‘정교한 검술은 여전하군. 아니, 실력이 더 늘었나?’
마나를 활성화하고 검에 오러를 담는 과정이 너무나 깔끔했다.
달려가면서 오러를 날카롭게 만드는 것 역시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더 무시무시해졌군.’
카단은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으며 기대감 어린 시선으로 그녀의 모습을 쫓아갔다.
화륵!
영주는 달려오는 칼리아를 향해 불로 만들어진 창을 집어던졌다.
불의 창은 하나가 아니었다.
놀라운 속도로 허공에 불의 창이 계속 만들어졌고 칼리아를 향해 쏘아졌다.
‘마법사 쪽이군.’
불을 다루는 마족을 보니 괜히 바네사 플로리안 공작 부인과의 전투가 머릿속에 잠시 떠올랐다.
바네사 플로리안 공작 부인은 상급 이상의 마족.
영주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 여자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약한 놈이다.’
상급 이상의 마족이라면 위험한 상대임이 틀림없다.
도시에 상급 마족 하나만 나타나도 하루아침에 그 도시는 폐허가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그러나 카단에게선 전혀 두려움이나 불안함 따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여유롭게 팔짱을 끼며 칼리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칼리아 역시 마족의 힘을 바라보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불의 창이 수십 개가 날라왔지만, 칼리아는 가벼운 발놀림으로 날아오는 창을 모두 피해냈다.
‘순발력도 더 좋아졌네. 움직임도 더 깔끔해졌고.’
지난 3년간 칼리아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3년 전 마족 앞에서 무기력하게 검을 휘두르던 칼리아는 이제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상급 마족 앞에서도 여유로울 수 있는 강자가 되었다.
서걱!
어느덧 거리를 좁힌 칼리아가 곧바로 검을 휘둘렀고, 무언가 잘려 나가는 소리가 집무실에 퍼졌다.
툭.
허공에 떠오른 영주의 팔이 곧바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 빌어먹을 녀석이!”
영주는 팔이 잘린 고통을 참아내며 마법을 준비했고, 칼리아의 발밑으로 마법진 하나가 나타났다.
카단은 급히 칼리아에게 경고를 하려 했지만.
토옥.
칼리아는 뒤로 살포시 몸을 던졌다.
콰아아아아앙!
칼리아가 뒤로 몸을 던진 동시에 마법진에서부터 불기둥이 솟아났다.
불기둥을 가볍게 피해낸 칼리아가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고작 팔 하나 잘랐다고 검을 집어넣어? 누구 앞에서 여유를 부리는 것이냐!”
그 모습에 짜증이 났는지 영주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외쳤다.
“여유로우니까 여유를 부리지.”
칼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카단을 향해 몸을 돌렸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말한 대로 팔다리 하나씩 잘라놨어. 나머진 알아서 해.”
“어?”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끄아아아아악!”
영주가 괴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쓰러졌다.
‘도대체 언제?’
분명 검은 한 번만 휘두른 것 같았는데, 어째서 반대쪽 다리도 잘린 것일까?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해졌구나. 칼리아.’
카단은 속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고개를 돌려 쓰러져서 울분을 토해내는 영주를 바라봤다.
“잠깐 쉬고 있어. 칼리아. 금방 끝내고 올게.”
***
영주의 집무실을 빠져나온 카단은 곧바로 칼리아를 데리고 감옥에 있던 동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니까 이곳의 영주도 가디언이었던 해밀턴. 그 빌어먹을 자식의 부하였다는 거지?”
“응. 보니까 등에 여우 문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더라고.”
끝까지 발악하던 영주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았다.
그가 인간들을 마족으로 바꾼 뒤 꾸준히 병력을 보충하고, 강한 마족이 태어나면 가디언이었던 마족 ‘해밀턴’에게 보낸다.
이것이 카단이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정보들이었다.
“아마 이런 도시가 더 있을 거야. 남쪽과 저항군이 있어서 덜 하겠지만, 왕국 북쪽은 아무래도….”
카단의 말에 칼리아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서 나도 북쪽으로 올라온 거야. 원래는 계속 서쪽에서 생활했거든.”
“아, 피의 기사로?”
“죽고 싶다고…?”
칼리아가 얼굴을 붉히며 말하자, 카단이 손을 저으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니, 어쩌다가 그렇게 불리게 된 거야?”
“머리카락이 붉다는 이유로 피의 기사로 불리는 것 같아. 이명이라는 게 참 이렇게 단순하고 부끄러운 건지 몰랐는데. 쯧.”
칼리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일단 저기 갇힌 사람들부터 구하고 시간 괜찮으면 대화 좀 할까?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카단의 말에 칼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어차피 나도 며칠 정도 여유는 있으니까.”
“따로 목적지가 있었어?”
카단의 질문에 칼리아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응. 실은 나 혁명단 소속이거든.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쭉.”
그 말에 카단이 잠깐 멈칫하며 칼리아를 바라봤다. 그러자 칼리아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나도 너랑 비슷해. 숨겨야만 했어. 속여서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