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망했어! 이제 다 끝이라고….”
“솔직히 이 도시가 마족들에게 그렇게 매력적인 곳은 아니잖아?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까?”
“맞아. 우리가 마족들한테 피해를 준 적도 없고.”
“우린 약해서 마족으로 만들 필요도 없겠지!”
도시 라도미르의 광장에 모인 주민들은 어떻게든 희망을 쥐어짜고 있었다.
희망을 논하기엔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입으로라도 희망을 내뱉는 것뿐.
그때 광장 가운데 서 있던 마일드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마족은 아무리 약한 인간이라도 실험체라며 마석을 주입했습니다.”
마일드는 이 도시도 당신들도 안전하지 않다며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억지로 쥐어 짜낸 희망마저 사라지자 사람들의 얼굴엔 절망만이 남게 되었고, 광장의 분위기는 그 어느때보다 무거웠다.
그때.
저벅, 저벅.
흰 코트를 어깨에 걸친 남성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광장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절망감에 빠진 사람들은 그의 걸음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광장 중앙에서 위험을 알리던 남자 ‘마일드’만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흰 코트를 걸쳐 입은 남자가 마일드의 어깨를 토닥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대충 의견은 모인 겁니까?”
“네? 아, 네. 모두 이 도시를 떠나고 싶어 합니다.”
아무리 이 도시에 인생을 걸었다고 한들 목숨보다 아까울까?
도시를 떠나는 게 마음이 편하지 않겠지만, 주민 대다수가 더 안전한 곳으로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저희가 피난을 간다고 하더라도 금방 마족들에게 붙잡힐 겁니다.”
마족들만 위협의 대상인 건 아니었다.
마족의 등장으로 치안이 엉망이 되었고, 왕국 곳곳엔 다양한 범죄자들이 생겨났다.
“마족의 눈을 간신히 피하더라도 괜히 도적이라도 만나면 그들이 돈을 받고 마족들에게 저희를 팔아넘길 겁니다.”
마일드가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푹 숙였다.
힘없는 자들의 피난길은 목숨을 걸어도 성공을 보장할 수 없었다.
게다가 도시의 주민 모두가 함께 떠나는 피난길이라면, 위험은 몇 배가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카단은 다시 한번 마일드의 어깨를 두드려주었고, 이내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바라봤다.
우울감에 빠진 이들은 땅이 꺼져라 한숨만 푹푹 내쉴 뿐, 카단에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 마족이 이 도시에 찾아올지 모릅니다.”
카단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그러니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해두십시오.”
그러자 대장장이로 보이는 남자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카단을 노려보며 외쳤다.
“떠나긴 어딜 간단 말이오! 길에서 다 뒤질 일 있습니까!”
그의 말을 시작으로 주민들이 카단을 향해 불평을 내뱉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당신이 뭔데 떠나라 마라야!”
주민들이 악을 쓰며 외쳐댔지만, 카단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주민들의 악 받친 외침들이 잦아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스륵.
이내 주민들이 잠잠해지자, 카단은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높게 들었다.
“이건 용병왕 제이드 님의 편지입니다. 조금 전 용병 길드의 마법사를 통해 받았습니다.”
용병왕이라는 말에 사람들이 순간 숨을 멈추며 카단에게 집중했다.
가디언은 아니지만, 가디언보다 조금 아래, 혹은 동급으로 여겨지는 자.
용병들의 왕이자 영웅.
이 도시의 사람들 역시 그의 명성을 듣고 살았었기에 용병왕 제이드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다, 당신이 뭔데 용병왕님과 편지를 주고받는단 말입니까?”
“지금 거짓말하는 거 아니오?”
느닷없이 나타나 용병왕이 온다고 하면 어느 누가 믿어줄까?
카단은 이들의 반응을 예상하였다는 듯 어딘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한 여성이 광장 중앙으로 다가오며 조심스레 말했다.
“전 용병 길드 소속의 마법사 스칼렛입니다. 제가 직접 용병왕님의 편지를 받아 저분에게 전달해 드렸습니다.”
텔레포트 마법을 통해 먼 곳까지 편지를 주고받는 마법사들만의 방식.
용병 길드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먼 곳에 있는 길드 사람들과 소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카단은 용병 길드로 찾아가 마법사 스칼렛에게 부탁했었다.
“저도 처음엔 믿기지 않았는데, 용병왕님의 편지를 통해 저분께서 용병왕님과 친분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스칼렛의 말은 곧 카단의 말이 진실임을 밝혀주었다.
빛을 잃은 주민들의 눈동자에 점차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절망 속에서 피어난 새로운 희망을 본 그들은 기대를 품으며 카단을 바라봤고.
카단은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용병왕 제이드 님께서 남쪽 저항군이 있는 도시까지 피난을 도와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와아아아아아아!
카단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살았다!”
“용병왕님이 오신다고? 정말이야?”
“아이고! 용병왕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주민들은 용병왕이 마치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늘을 바라보며 손을 모아 감사를 전했다.
몇몇은 기쁨의 눈물까지 흘려댔고, 그 모습에 카단은 잠시 입을 다물고 그들에게 충분히 기뻐할 시간을 주었다.
이내 환호성이 잦아지자 카단은 미소를 지우며 다시 입을 열었다.
“문제는 용병들을 이끌고 이곳까지 오시기까지 14일 정도의 시간이 걸리신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주민들을 호위할 용병들을 모집하고, 또 이곳까지 이동하는 데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전시 상황이라 마음대로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하기도 힘들 테니까.’
전시 상황엔 왕국 곳곳에 텔레포트 마법을 방해하는 마법이 활성화되기 때문에 잘못하다간 몸이 찢겨질 위험이 있었다.
길버트처럼 8성 이상의 대마법사가 아닌 이상, 텔레포트 마법이라든지, 포털을 만드는 마법은 사용할 수 없었다.
“14일 동안 마족이 찾아오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만약 마족이 이 도시에 찾아왔을 때의 상황도 대비해야 합니다.”
카단의 말에 주민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몇몇이 조심스레 카단에게 말했다.
“우, 우리 중에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의 거의 없습니다.”
“도시를 지키던 건 영주의 군대뿐이었소.”
“경비대들이 있지만, 그들도 마족을 상대로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할 텐데….”
도시에 남은 주민들은 남을 구하긴커녕 스스로를 지키기에도 힘이 부족한 이들이었다.
무기를 쥐여 주면 어떻게든 싸우기야 하겠지만, 무언가를 해보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하고 말 것이다.
카단 역시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만약 마족이 나타나면….”
카단은 무언가 해결책을 말하는 것처럼 진중한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은 각자 집 안에 들어가 문을 잠그세요.”
워낙 진지한 모습으로 말했기에 순간적으로 사람들은 카단에게 몰입했고, 이어진 그의 말에 모두가 당황하고 말았다.
“네?”
집에 들어가 문을 잠그라니.
7살짜리 아이도 이런 해결책은 내놓지 않을 것이다.
“잘 숨어만 계시면 나머진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카단은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고, 사람들은 헛웃음을 삼키며 카단을 바라봤다.
어쩐지 무덤덤하게 말하는 카단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신뢰가 느껴졌다.
***
며칠 뒤.
도시 라도미르의 성문 앞.
“뭐야? 왜 이 도시는 문지기도 하나 없어?”
“그냥 들어가도 괜찮은 건가?”
“우선 들어가자. 뭐, 폐허가 된 것 같지는 않으니까.”
세 명의 남성이 성문 너머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도시 분위기가 왜 이렇게 으스스하냐?”
“그러게. 이 도시가 북쪽 지역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 맞지?”
“꼭 언데드라도 나올 것 같은 분위기야. 아무리 늦은 밤이라지만, 사람 하나 안 보이지?”
세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곳곳에 횃불이 놓여있는 것을 봐선 사람이 살고 있긴 한 것 같네.”
“맞아. 라도미르가 폐허가 됐다는 소문은 들은 적 없다고.”
“그냥 자원도 아낄 겸 다들 일찍일찍 자는 게 아닐까?”
으스스한 분위기를 떨쳐내기 위해 세 사람은 끝없이 대화를 이어가려 했다.
그때.
달그락.
그들의 뒤쪽에서 뼈끼리 부딪치는 소름 돋는 소리가 들려왔고.
“흐익!”
세 사람은 동시에 얼어붙고 말았다.
달그락. 달그락.
뼛소리는 점차 가까워져 갔고, 세 사람은 서로 달라붙은 채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해, 해골이다!”
이내 눈앞까지 다가온 해골에 세 사람은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달그락, 달그락!
그러자 그들에게 다가온 해골이 진정하라는 듯 뼈만 남은 손으로 손짓했다.
어쩐지 그 모습이 더 섬뜩하게 느껴졌고, 세 사람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해골을 피해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해싿.
“나쁜 해골은 아닙니다.”
그때 뒤쪽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악!”
갑작스럽게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뒷걸음질 치던 세 사람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고.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들을 놀라게 했던 목소리의 주인은 가볍게 웃으며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처음 뵙는 분들 같은데.”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카단이었고, 그는 누군가 성문을 넘어왔다는 레이스의 보고에 급히 찾아왔던 것이었다.
“아, 저희는 피난민들입니다.”
“저희가 살던 도시가 폐허가 되는 바람에, 돌아갈 곳이 없어졌거든요.”
“이 도시가 가장 안전한 도시라고 해서 이렇게 찾아오게 됐습니다.”
세 사람은 자리에 일어나 곧바로 카단에게 자신들의 상황을 들려주었다.
“뭐, 이곳도 그렇게 안전한 곳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쪽으로 오시죠. 빈방이 있으니 그곳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밤이 늦었으니 자세한 얘기는 내일 하도록 하자. 카단은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카단의 뒤를 따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여관방 앞에서 카단과 세 사람의 걸음이 멈춰졌다.
“지금은 빈 여관입니다. 편한 방에서 편하게 쉬도록 하세요.”
카단이 자상하게 웃으며 말하자, 세 사람은 연신 고개를 꾸벅거리며 카단에게 감사를 전했다.
이내 감사를 끝낸 세 사람이 여관 안으로 들어서려고 할 때.
“아, 저기 가죽 갑옷 입으신 분?”
카단이 누군가를 불러 세웠다.
“저요?”
갈색 가죽 갑옷을 입은 남성은 고개를 갸웃하며 카단을 바라봤고, 카단은 방긋 웃으며 남자에게 말했다.
“이런 식으로 납치하는 거였어?”
“네? 그게 무슨?”
“하마터면 감쪽같이 속을 뻔했네.”
카단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자, 가죽 갑옷을 입은 남자와 그의 일행들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이러니 사람들이 죄다 속아서 이 도시로 넘어왔지.”
스릉.
카단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가죽 갑옷을 입은 남성의 목을 겨눴다.
“왜, 왜 이러세요!”
가죽 갑옷을 입은 남성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의 일행들이 재빨리 그의 곁으로 다가오려 했다.
“말로 하세요 말로!”
“아니, 저희가 싫었으면 애초에 여관으로 안내해주시지 말던가! 이게 무슨 짓입니까! 신종 도적이에요?”
카단은 무덤덤한 얼굴로 당당히 외치는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마족이랑 같이 죽고 싶지 않으면 뒤로 물러서세요. 이 사람 마족입니다.”
그 말에 두 남성이 당황하며 가죽 갑옷을 입은 남성을 바라봤다.
“하…. 어떻게 알았냐?”
가죽 갑옷을 입은 남성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으며 카단에게 말했다.
사람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순진무구하고 바보 같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싸늘하고 소름 돋는 분위기만이 그에게서 풍겨질 뿐이었다.
그가 본색을 드러내자, 카단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남자의 발목을 가리켰다.
“그 발목에 문신 좀 잘 숨기지 그랬어. 보고 딱 알았네. 이 마족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