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약해.’
카단은 발밑에 깔린 마족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너무 강한 마족들만 만났던 건가? 아무리 오랜만이라지만, 마족들이 전부 약하다.’
카단은 걱정했다.
3년 사이 왕국을 지배하려는 마족 세력이 얼마나 강해졌을지 걱정했었다.
그러나 막상 마족들을 상대하며 느낀 감정은 허무함이었다.
마족은 본 모습까지 드러내며 덤벼댔지만, 카단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비, 빌어먹을!”
언데드들을 소환할 필요도 없었다.
피와 뼈 마법만으로도 인간인 척 도시에 잠입한 마족은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흠. 대충 봐도 중급 마족인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약하지?’
분명 느껴지는 힘을 봤을 땐 중급 마족이었으나, 막상 붙어보니 하급 마족을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이거 놔 이 새끼야!”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마족이 악을 쓰며 외쳤다.
“…….”
그러나 카단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마족은 어떻게든 카단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피와 뼈 마법을 쓰는 걸 보면 분명 네크로맨서인데?’
네크로맨서가 어째서 이렇게 힘이 센 것일까? 마족이 된 이후로 인간에게 이렇게 짓밟힌 적이 있었던가?
“이건 말도 안 돼!”
도무지 믿기지 않은 상황에 마족이 소리를 치자.
꾸욱-
카단은 그를 더 세게 짓밟았다.
“생각 중이니까 조용히 좀 해줄래?”
이어서 카단의 시선이 마족의 발목을 향했다.
‘문어 문신….’
낯익은 문신을 바라보며 카단은 잠시 3년 전 기억을 떠올렸다.
‘쳐들어온 마족 중 문어 가면을 쓴 남자. 그 녀석이 제일 강한 놈이었어.’
중간에 나타난 해밀턴을 제외한다면 문어 가면을 썼던 마족이 가장 위협적이었다.
‘그 녀석이 대장이었나?’
그렇다면 문어 문신은 문어 가면을 쓴 마족의 부하라는 뜻일까?
‘문어파야 뭐야? 유치하게 동물 가면 가지고.’
순간이나마 카단은 자신이 전생에 쌍룡파의 행동대장이었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아무튼. 마족들이 약하다고 느껴지니 왠지 꺼림칙한데.’
문어 가면을 썼던 마족 외에도 영웅 아카데미에 쳐들어왔던 마족들은 전부 강했다.
실전 경험이 많은 교관과 교수도 버거워할 정도의 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마족들이 힘을 숨기고 있는 건가? 아니면 인간들을 마족으로 만든 부작용 같은 게 있는 걸까?’
마족이 약하게 느껴지는 게 당장은 긍정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지만, 카단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제, 제발 살려줘! 살려만 준다면 너의 개가 될게! 짖으라면 짖을게!”
발밑에 깔린 마족이 방법을 바꿔 카단에게 애원하며 말했다.
“개가 얼마나 귀여운데. 개한테 미안한 말이야. 그건.”
그러나 카단의 무심한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콰직!
***
“이 빌어먹을 애송이.”
용병왕 제이드가 도시 라도미르 성문 앞에 서 있는 카단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오셨습니까?”
카단이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자, 제이드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오랜만이구나. 카단.”
“여전히 강해 보이십니다.”
카단은 제이드가 가장 듣고 싶어 할 것 같은 말을 건네며 미소를 지었다.
“크하하하하! 그 입도 여전히 살아있구나!”
제이드는 그런 그가 마음에 든다는 듯 말에서 내려와 카단에게 다가갔다.
“내 제자 놈을 이기고 얻은 소원권을 이런 식으로 사용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소원권을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지랖이 넓은 놈이군. 솔직히 이 도시 사람들은 너랑 상관없는 사람들 아니냐?”
제이드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카단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그래도 영웅 아카데미 출신인데, 저랑 상관없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무시하고 갈 순 없죠.”
“그건 그렇지. 나처럼 돈으로 움직이는 용병이면 모를까, 너는 오지랖을 부릴 수밖에 없었겠구나.”
영웅 심리는 아니었다.
카단 역시 사람들이 말이 통하지 않았다면 설득이고 뭐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을 것이다.
“제이드 님은 잘 지내셨습니까?”
“보시다시피. 아주 건강하고 멀쩡하지. 아직은 쓸만한 몸이라네.”
용병왕의 위상은 여전했다.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고, 어깨가 무거워진 듯한 착각이 든다.
“네 놈의 소원대로 사람들을 안전하게 호위하도록 하겠다.”
제이드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엔 100명은 넘어 보이는 용병들이 서 있었다.
“마족을 상대로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는 용병들이네.”
카단이 자연스레 시선을 옮겨 용병들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정예들인가?’
하나같이 강해 보이는 사람들 뿐이었다.
“역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용병왕인 그가 이끄는 정예 용병들이라면 분명 무사히 도시 사람들을 피난시킬 것이다.
듬직한 용병들을 보니 자연스레 신뢰가 생겼다.
“우선 안으로 들어오시겠습니까? 먼 길을 오셨을 텐데 떠나기 전에 휴식을 취하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카단의 제안에 제이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용병들은 곳곳으로 흩어져 빈 여관방을 찾아가 각자만의 휴식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카단과 제이드는 주점에 앉아 식사 시간을 가졌다.
“마티아스에게 들었다. 부친이 샬로트 님이시라고.”
“네. 맞습니다.”
“참 멋진 분이셨다. 비록 반역죄로 처형당하시긴 했지만, 다행히 가디언들이 샬로트의 무죄를 주장했더군.”
용병왕 제이드까지 샬로트가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가디언 디미타르가 3년 전 카단과 했던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과거엔 샬로트 님께 참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목숨도 몇 번 구해주셨지.”
제이드는 무언가 그립다는 듯 천장을 보며 말했고, 카단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를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함께 공략한 던전이 몇 개인데, 어떻게 내가 샬로트 님을 모르겠나?”
미소를 지으며 식사를 이어가려던 제이드가 다시 입을 열어 질문을 던졌다.
“아, 그런데 3년 동안 어떻게 지냈나? 영웅 아카데미 출신들의 이름을 소문으로 몇 번은 들어봤는데.”
수많은 소문 중에서도 카단의 이름은 전혀 들을 수 없었다.
“마티아스에게 듣기론 샬로트 님의 유산을 찾아다닐 거라고 했다던데.”
“네. 맞습니다. 그 흔적들이 참 짓궂은 곳에 있어서 고생 좀 많이 했죠.”
카단과 제이드는 마치 오랜만에 만나 친구처럼 식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 그래서 뭐 좀 찾은 게 있었어?”
제이드의 질문에 카단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참 많은 흔적을 남겨두셨더라고요.”
“말해줄 수 없는 정보라며 말하지 않아도 되니 부담가지지 말게.”
제이드가 피식 웃으며 답하자, 카단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말하기 어려운 건 아니지만, 듣고 믿기 힘드실 수도 있어서 조심스럽습니다.”
어차피 세상의 풍파란 풍파는 다 맞아봤다. 웬만한 것엔 놀라지도 않는다.
제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카단에게 말해보라 손짓했다.
“음.”
카단은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이내 결심이라도 한 듯 진중한 얼굴로 제이드를 바라봤다.
“제이드 님은 혹시 전설을 믿으십니까?”
“전설?”
“아버지는 네크로맨서의 전설을 믿으시던 분이셨습니다.”
“네크로맨서의 전설이라면…. 혹시 네크로폴리스를 말하는 건가?”
제이드의 대답에 카단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흔적이 남은 대부분의 장소에는 네크로폴리스에 관한 정보들이 있더군요.”
정말 네크로폴리스가 존재하는 것일까?
분명 아이작도 죽으면서 네크로폴리스가 존재한다고 얘기했다.
‘그곳에만 갈 수 있다면 가면을 쓴 마족들을 좀 더 쉽게 죽일 수 있을 텐데.’
잠깐 생각에 젖었던 카단이 다시 제이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제이드 님은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저항군에 합류헀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저항군 소속이긴 한데, 용병들은 워낙 자유분방해서 군대에 들어가거나, 도시 하나에 갇혀 지내는 걸 끔찍이 싫어해.”
용병들은 마치 혁명단처럼 따로 왕국을 돌아다니며 마족들과 싸우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용병분들도 고생이 많군요.”
“뭐, 녀석들도 왕국이 다시 멀쩡해져야 돈을 버는 놈들이니까.”
돈 앞에서 장사 없다는 말이 이런 말일까?
용병들은 돈을 벌기 위해 싸우는 이들. 그러나 전시 상황과 비슷한 지금 왕국이나 사람들은 용병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즉, 용병들의 일자리가 줄어들고 말았다.
“뭐, 이런 시기에는 돈의 가치도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그래서 녀석들이 자발적으로 마족을 사냥하는 중일세. 물론 던전 소탕도 꾸준히 하고 있고.”
용병들은 생각보다 바쁘게 살고 있었다.
현재 그들에게 주어진 건 ‘자유’.
그 누구의 억압도 받지 않고 활동하는 평화로운 시기였다.
그러나 막상 며칠이 지나니 자유를 얻은 용병들이 자발적으로 전쟁터나 던전으로 향했다.
“뭐, 아무튼 나도 왕국 곳곳에서 열심히 마족들을 사냥하고 다니고 있네. ”
대화는 점차 훈훈한 분위기로 이어졌고, 이내 두 사람의 식사 시간이 끝이 났다.
“언제 출발하실 생각이십니까?”
“내일 아침 일찍이 좋겠지. 다들 고생했으니. 그런데 자네는 어쩔 생각인가? 함께 가겠나?”
“아뇨. 저는 아직 해야 할 게 있어서요.”
“이곳에 남겠다고? 생각보다 위험할 텐데?”
카단이 남겠다고 하자 제이드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북쪽 지역은 전부 위험 지역이다. 마족이 곳곳에 활보하고 다니며 사람도 쉽게 죽이는 곳.
이곳보다는 확실히 저항군들이 머무는 남쪽에서 지내는 것이 훨씬 안전할 터.
“그 흔적을 찾아야 해서 그러는 거라면 남쪽에서부터 천천히 찾는 건 어때?”
이어진 제이드의 제안에도 카단은 고개를 저었다.
“계획이 있습니다. 조심히 다니겠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카단의 표정만큼은 단호했다. 생각을 바꾸지 않겠다는 듯 뚜렷한 눈빛에 제이드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선택은 본인의 몫. 어떤 계획이나 생각이 있는 거겠지?”
“물론입니다.”
카단이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도시 사람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제이드 님.”
“물론. 용병왕 체면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니, 최선을 다해야겠지. 덕분에 이번 일이 끝나면 명성이 많이 오르겠어.”
제이드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카단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건 그렇고 카단. 오랜만에 한 판 어떤가?”
“오랜만에요? 무엇을?”
이어진 질문에 카단은 눈을 끔뻑이며 되물었고, 제이드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카단을 향해 말했다.
“3년 만에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고 싶군.”
“제가 제이드 님이랑요?”
카단이 많이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용병왕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는 한참이 부족하다.
게다가 오랜만이라고 하기엔, 3년 전에도 카단은 제이드와 대련을 해봤던 적은 없다.
그렇다면….
“혹시 롭스?”
순간 3년 전 대련했었던 용병왕의 제자 이름이 떠올랐다.
“그래. 그 녀석도 자네를 보고 싶어 하더군. 어떤가? 롭스와 대련 한 번 해보는 것이?”
과연 3년 전 카단에게 깔끔한 패배를 당했던 롭스는 얼마나 성장했을까?
카단 역시 호기심이 생겼고, 용병왕의 제자라면 3년간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좋습니다. 하죠. 대련.”
“시원시원해서 좋군.”
“아, 그런데 제이드 님.”
카단은 무언가 생각났는지, 다시 제이드를 불렀고, 제이드는 말해보라는 듯 손짓하며 이어질 카단의 말을 기다렸다.
“이번에도 소원권 하나 걸린 대련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