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제가 졌습니다.”
뼈로 만들어진 원형 경기장 안.
용병왕의 제자 ‘롭스’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고, 그의 얼굴에선 뚝뚝 땀이 떨어져 경기장 바닥을 적셨다.
그 모습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지쳐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고생했습니다.”
롭스가 숨을 고르는 사이, 경기장 밖에 있던 카단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동시에 그의 데스나이트들이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고, 이어서.
촤르르르륵!
뼈로 만들어진 원형 경기장이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용병왕 제이드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어댔다.
‘농락당한 기분이군. 단순히 언데드만으로. 아니, 그것도 한 마리씩 상대하게 해서 가볍게 승리를 거두다니.’
땀을 뚝뚝 흘리는 롭스와 다르게 카단의 피부는 여전히 뽀송뽀송해 보였다.
땀이라고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편안한 모습.
이제 막 씻고 나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멀끔한 상태였다.
제이드가 헛웃음을 짓고 있을 때, 카단이 먼저 걸음을 옮겨 롭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대단한 실력이십니다.”
롭스를 인정한다는 듯한 모습에 롭스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왜 기분이 좋지?’
졌음에도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기뻤던 것일까?
롭스는 이 패배를 굴욕적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고, 분노의 감정을 느끼지도 않았다.
3년 전 대련에서는 허무하게 패배하며 설욕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설욕이라는 단어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역시 대단한 사람이야.’
롭스는 카단과 자신의 실력 차이를 확실히 느꼈다.
단순한 노력만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
‘날 봐주신 거겠지.’
만약 4기의 데스나이트가 한 번에 달려들었다면, 대련은 시작과 동시에 끝났을 것이다.
‘과연 마티아스 형님이 인정한 분이시다.’
롭스는 카단의 손을 붙잡고 일어서며 잠시 마티아스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카단. 그 녀석한테 잘해라. 내가 인정한 녀석이야. 만약 녀석이 네크로맨서를 포기하고 검을 잡는다고 해도 너 정도는 금방 따라잡힐걸?
-형님. 그건 절 너무 무시하시는….
-널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 정도로 카단 녀석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는데. 미안.
노력하는 천재. 타고난 재능만 믿고 사는 천재가 아닌, 끝없이 노력하는 광기를 지닌 천재.
마티아스는 카단을 그렇게 설명해주었다.
3년이 지난 지금도 롭스는 카단의 털끝 하나 건들 수가 없었다.
방패로 한 번 밀쳐냈던 게 전부.
‘나도 놀고만 있던 건 아니었는데.’
마족들이 나타난 이후, 롭스는 실전을 통해 더욱 강해졌고, 주변에서는 재능이 꽃을 피운다는 칭찬마저 들었다.
게다가 여러 마족을 쓰러트리며 명성까지 쌓고 있었고, 용병왕 마저 롭스의 재능과 노력을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카단은 그런 롭스를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제압했다.
마치 자신의 언데드 실력을 하나하나 확인해보는 것처럼.
‘잠깐. 이거 기분 나빠야 하는 건가?’
어쩌면 이건 대련이 아니라 실험이 아니었을까?
롭스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카단 역시 속으로 감탄을 하고 있었다.
‘과연 용병왕의 제자인가.’
아이작에게 배운 강화 마법을 통해 데스나이트들을 강화했다.
하나하나 7성 수준의 기사라고 봐도 무방한 힘을 지녔고, 쉽게 쓰러질 언데드가 아니었다.
‘데스나이트를 3기나 쓰러트릴 줄은 몰랐는데.’
그러나 롭스는 데스나이트를 압도하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패배한 건 순전히 체력 부족.
아무리 용병왕의 제자라고 하더라도 언데드를 상대로 체력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언데드의 오러가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습니다. 방심했다간 첫 번째 데스나이트한테 당했을 겁니다.”
첫 상대였던 데스나이트 카록이 가장 버거운 상대였다.
흉측하고 거대한 도끼를 빠르게 휘두를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덩치가 거대하다면 빈틈이 많이 보일 법도 했지만, 데스나이트는 조금의 빈틈도 보여주지 않았다.
이후 상대했던 데스나이트들은 그나마 압도했다고 생각했지만, 카록만큼은 운이 좋아 쓰러트릴 수 있었다.
“제 첫 데스나이트입니다. 정말 강한 녀석이에요.”
카단이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롭스가 대뜸 허리를 숙이며 외쳤다.
“형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롭스의 행동에 카단은 눈을 끔뻑거렸고.
“크하하하하!”
용병왕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큰 소리로 웃어댔다.
“뭐, 대충 친해지자는 얘기라네. 용병들 사이에서도 대련에서 패배 후 형님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아.”
그 의미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저 잠시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카단. 아니, 이석훈이 처음으로 조직에 들어갔을 때 많은 이들이 덤벼들었다.
이석훈이 덤벼드는 조직원을 때려눕히자, 그들은 전부 롭스처럼 허리 숙이며 형님으로 모시겠다 외쳐댔었다.
‘다들 잘 지내려나.’
비록 조폭이라 불리는 이들이었지만, 친했던 이들이었기에 잠깐 그들의 얼굴을 그려봤다.
“저야 나쁠 건 없는데.”
카단은 가볍게 웃으며 답했고, 롭스는 다시 고개를 들며 말했다.
“필요하실 때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지옥이라도 달려가겠습니다.”
롭스가 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카단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죽을 생각은 없는데.”
***
다음날.
“소원권이 하나 더 생겼군. 이럴 줄 알았으면 소원권은 걸지 않는 거였는데.”
성문 앞에 서 있던 용병왕 제이드가 혀를 차며 카단에게 말했다.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좋은 경험은 무슨. 그래. 이번엔 뭘 부탁할 생각인가?”
“다음번에 부탁 드려도 될까요? 어차피 지금은 할 일도 있으신데.”
카단은 피난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성문 앞으로 도시 라도미르의 주민들이 한가득 짐을 챙겨 피난을 준비하고 있었다.
용병들은 피난민들 사이사이에 서서 그들을 호위할 준비를 하는 듯싶었다.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제이드는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자네는 어디로 갈 생각인가?”
“북쪽 성벽 너머로 향할 생각입니다.”
“북쪽 성벽이라면 도시 로베른을 말하는 거겠지?”
“네.”
카단이 고개를 끄덕이자, 용병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그곳의 상황이 어떤 줄 모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모릅니다.”
카단이 당당하게 말하자, 제이드는 헛웃음을 지으며 잠시 멈칫했다.
“아, 3년 동안 사람들과 교류를 끊고 살았다고 했지?”
이내 지난날 대화를 떠올린 제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로베른의 영주는 마족이라네.”
저항군이 왕국 가장 남쪽에 거점을 세우자, 마족들은 왕국 북쪽에 있는 도시들부터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점령당한 곳이 도시 로베른.
“소문으로는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라더군.”
“도시 주민 대부분이 마족이라는 뜻이겠죠?”
“그것도 그렇고 남아있던 인간들은 모두 노예가 되었다고 하네. 귀족이든 평민이든.”
이어진 제이드의 말에 카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족들이 왕국의 북쪽부터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벌써 인간을 노예로 부리며 지낼 줄이야.
“혹시 그곳에서 영웅 행세를 하고 싶다면 말리고 싶군.”
“조심하겠습니다. 어차피 목적지는 로베른이 아니니까요.”
카단이 웃으며 말했지만, 제이드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의심의 눈빛을 보냈다.
“혹시 모르니 용병 몇 명을 데려가겠나? 피난길에 한두 명 빠진다고 위험한 건 아니니.”
제이드가 그렇게 말하며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는 롭스를 가리켰다.
“아뇨. 혼자가 편합니다.”
3년 전 마족을 상대로 영웅 아카데미를 지키려고 했던 아이작만 봐도 그랬다.
지킬 것이 있을 때, 아군의 시체가 바닥에 널려 있을 때 네크로맨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이작은 최강의 네크로맨시라고 알려진 본 드래곤을 소환하고도 브레스 한 번 쏠 수 없었다.
그 브레스 한 번으로 마족은 물론 영웅 아카데미와 사람들 모두가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 아이작 녀석도 늘 그렇게 말했었지. 너의 아버지도 그렇고.”
제이드가 피식 웃으며 카단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북쪽. 그래. 북쪽 도시라고 하니까 정보 하나가 생각나는군. 도둑 길드 녀석들도 모르는 아주 귀중한 정보.”
“말해주실 것 같으니,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쯧쯧. 아이작 녀석을 닮아 뻔뻔하구나. 애송이.”
제이드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로베른의 성벽 너머에 성유물이 봉인된 곳이 있다네.”
“성유물이요?”
“그래. 꽤 오래전에 발견되었는데, 봉인해뒀다고 했어.”
성유물이 있는 곳을 발견했지만, 여태까지 알려지지 않았다면 이유는 하나.
그곳을 발견한 사람이 그 사실을 고의로 감췄다는 것이다.
“그곳을 발견한 건 얼마 전 죽은 팔라딘이었네. 녀석이 죽기 전에 내게 알려주더군. 가디언도 모르는 정보라면서.”
“왜 봉인했고, 왜 여태까지 말하지 않았답니까?”
“그야, 성유물에서 느껴지는 힘이 워낙 불결했기 때문이지. 분명 성유물의 기운이었지만, 성유물이 아닌 것 같다고 했어.”
“그런 성유물이 있습니까?”
“나야 모르지. 직접 본 적도 없고, 팔라딘에게 들었던 게 전부라네.”
제이드가 어깨를 들썩이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왕국이 정상적으로 흘러갈 때면 모를까, 지금 같은 시기에는 성유물의 소유권이 왕국이 아닌 개인에게 주어지게 되어 있네.”
즉, 찾은 사람이 주인.
아무리 성유물이라고 해도 국가에게 보상금을 받고 넘길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어차피 나는 그곳에 갈 생각이 없으니, 필요하다면 한 번 가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목숨은 장담할 수 없지만. 제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카단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이제 슬슬 가보겠네. 인사는 이쯤으로 하지.”
“네. 주민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있어요.”
“누가 보면 이 도시 주민인 줄 알겠는데?”
“오지랖이죠. 뭐.”
“그래. 걱정하지 말게. 또 나한테 연락하고 싶은 게 있으면 이번처럼 하면 돼. 용병 길드를 통해서.”
제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고.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단은 제이드의 뒷모습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형님! 다음번에 만나면 제가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하겠습니다! 제가 요리도 잘합니다!”
그때 멀리 있던 롭스가 손을 힘차게 흔들어대며 외쳤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안전하게 피난을 갈 수 있었어요!”
“은인이십니다!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이어서 피난을 준비하던 사람들도 카단을 향해 외쳐댔다.
도시를 구한 영웅이자, 피난민들의 피난길마저 안전하게 준비해준 은인.
갑작스럽게 사람들의 호의 가득한 관심을 받게 된 카단은 부끄러운지 귀가 빨개지기 시작했다.
“너 이제 큰일 났네.”
그때 뒤에 서 있던 칼리아가 조심스레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큰일?”
카단은 그게 무슨 말이냐며 칼리아를 바라봤고, 칼리아는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명 하나가 생기겠어.”
“이명?”
“부디 나보다 더 부끄러운 이명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