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클로제! 뭐해!”
벨리드의 외침에 클로제가 번뜩 정신을 차리며 재빨리 몸을 돌렸다.
키에에에엑!
마족들이 계단을 통해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으며, 몇몇 마족들은 힘을 개방한 채 클로제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제기랄!”
클로제는 다시 오러를 활성화하며 달려드는 마족들을 베어냈다.
서걱!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
길을 막는 것.
마족들이 벨리드와 루나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교관님! 어떻게 된 겁니까!”
그러나 마족을 막아내는 것에 온전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오랜 친구. 가장 오래된 친구들이 마족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녀석들이 다 마족이 된 겁니까!”
클로제의 목소리에 울분이 섞인 것을 눈치챈 벨리드가 이를 악물며 마나를 활성화했다.
제압해야 할 상대는 루카스와 아라드뿐이 아니었다.
“죽어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감옥에 갇혀 있던 이들 모두가 검붉은 기운을 풍기며 벨리드와 루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어쩔 수 없어.’
아무래도 텔레포트를 위해 아껴뒀던 마나를 사용해야 할 것 같았다.
클로제도 이성을 놓기 직전이고, 루나 혼자서는 이 많은 사람 전부를 상대하기는 벅찰 테니.
그때.
“마법 쓰면 안 된다며.”
루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전하며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카단도 구해야지. 그리고 걱정하지 마. 사람들한테 마족의 힘이 느껴지긴 하지만, 마족화가 된 것 같지는 않아.”
사람들의 눈은 검게 물들어 있었으며, 그들의 몸에선 검붉은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직 마족이 안 되었단 건가?”
벨리드가 조심스레 묻자,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확인은 해봐야겠지만, 아직 마족화가 진행되는 건 아닌 것 같아.”
루나는 그렇게 말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쯧. 확실해지기 전까지 제압만 해야겠네.’
마족이라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처치해버렸겠지만, 루나의 눈으로 보이겐 아직 인간인 자들.
게다가 카단과 그의 일행들이 구하려는 이들이었기에 루나는 힘 조절을 해야만 했다.
“오랜만에 세상 구경이나 좀 해라.”
루나는 그렇게 혼잣말을 내뱉으며 옆으로 손을 뻗었다.
우웅!
그녀의 손에서부터 피 한 방울이 튀어나오더니, 피는 곧바로 바닥에 떨어져 거대한 마법진을 만들어냈다.
“부르셨습니까.”
마법진에서부터 붉은빛이 번쩍하더니, 검은 드레스를 입은 한 여성이 나타났다.
“저 녀석들 좀 잡아놓고 있어봐.”
루나는 달려드는 인간들을 가리키며 말했고.
“명을 따르겠습니다.”
드레스를 입은 여성은 히쭉하고 웃으며 곧바로 앞으로 손을 뻗었다.
“다, 당신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벨리드가 깜짝 놀라며 묻자, 검은 드레스의 여성이 잠깐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벨리드 교관님.”
“발렌티나 교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의 정체는 다름 아닌 발렌티나 교관이었다.
“당신도 뱀파이어였습니까?”
뱀파이어의 부름에 응했다면, 분명 발렌티나 역시도 뱀파이어라는 뜻.
“이야기는 나중에 할까요? 루나 님이 시키신 일부터 해야 해서.”
발렌티나는 살짝 윙크를 보낸 뒤, 다시 고개를 돌려 마나를 활성화했다.
그러자 그녀의 주변으로 핏빛 기운이 일렁거렸고.
우웅!
복도 곳곳에 마법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촤라라라라라라락!
수십 개의 마법진에서부터 붉은빛을 띤 쇠사슬이 튀어나왔고.
“크윽!”
“이거 놔!”
쇠사슬들은 곧바로 인간들을 포박해댔고, 인간들은 이를 악물며 발악해댔다.
“무, 무슨!”
그 모습을 본 벨리드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분명 발렌티나는 몬스터를 길들이거나 붙잡아 소환하는 소환사.
소환사가 포박 마법에 특화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의 위력을 지녔다고는 상상한 적이 없었다.
“잘 붙잡고 있어 봐.”
루나는 그렇게 말하며 쇠사슬에 묶인 사람들 사이를 천천히 거닐기 시작했다.
철그렁!
루나가 지나갈 때마다 눈이 검게 변한 인간들은 어떻게든 공격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발버둥을 칠수록 그들을 묶고 있는 쇠사슬의 조임이 강해졌다.
“이거 풀어!”
“이 멍청한 인간들이!”
통증이 심해졌는지, 그들은 발버둥을 포기하고 날 선 목소리로 외쳐댔다.
“시끄러워. 입을 꿰매버리기 전에 조용히 하는 게 좋을 거야.”
루나는 그들의 협박이 하찮다는 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한 사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마석을 심은 것 같지는 않은데.’
루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앞에 인간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어떻게 마족의 힘을 사용하는 거지? 잠깐만….’
순간, 루나가 무엇을 느꼈는 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휙!
그녀의 시선은 감옥 복도 끝에 있는 활짝 열린 문 너머를 향했다.
“하아.”
이내 한숨을 내뱉은 루나는 재빨리 카단을 떠올리며 그에게 말을 전했다.
‘카단.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아직 버틸 만하지?’
-무슨 일인데?
‘귀찮은 놈이 나타났어.’
***
로베른 남쪽 성벽.
“네크로맨서만 죽이면 끝이라고! 네크로맨서부터 죽여!”
“데스나이트부터 어떻게 좀 해봐! 뭐가 이렇게 강해!”
혼란스러운 전장 속 마족들의 짜증 섞인 외침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인간임을 포기하고 마족이 되면서 상상 이상의 힘을 얻었다.
그런데 고작 네크로맨서 하나에게 이렇게 고전할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어째서 네크로맨서 하나가 일으킨 언데드 군단 따위에게 밀리고 있는 것일까?
“설마 죽은 샬로트가 되살아나기라도 한 건가? 애초에 죽은 적이 없었다던가!”
“개소리! 샬로트는 죽었어!”
“그렇다면 아이작? 아이작 아니야?”
“아이작도 3년 전에 죽었잖아! 왕국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을 왜 넌 모르냐!”
“그럼 도대체 저 녀석은 뭐냐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3년간 마족이 인간들을 학살하고 다닐 때도 이 정도로 강한 네크로맨서는 등장한 적이 없었다.
그나마 왕국의 동쪽 도시 트라팔가에서 활동한다는 ‘검은 파도’라는 네크로맨서가 마족들 사이에서도 주의해야 할 인물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검은 파도는 흰 머리칼의 여성으로 알려져 있었고, 지금 마족들이 상대하는 건 검은 머리의 남성.
“제, 젠장 조심해!”
마족들이 짜증을 내뱉는 사이.
서걱!
피로 만들어진 사신이 날아와 마족 하나의 목을 베어버렸다.
“이 빌어먹을!”
마족들이 분노한 듯 피의 사신을 바라보자, 사신은 즐겁다는 듯 미소를 그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건 또 뭐야!”
꽈아아아악!
바닥에서 튀어나온 해골의 손이 마족들의 발목을 붙잡아댔다.
“히, 힘이 빠지는데?”
“갑자기 왜 이래?”
게다가 갑자기 힘이 빠지거나 미친 듯한 갈증에 고통스러워하는 마족도 있었다.
데스나이트들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서걱!
마족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사이 데스나이트들이 달려들어 그들의 목을 베어냈다.
검은 오러가 전장 곳곳에서 번쩍이기 시작했고, 그를 기점으로 언데드 군단이 조금씩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카단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언데드 군단이 활약하고 있음에도 그의 얼굴에선 여유가 아닌 불안함이 그려졌다.
‘단순히 시간 끌기만으로는 위험해. 더 압박해야 한다.’
조금 전 루나의 말이 신경 쓰였다.
‘강한 놈들이 감옥 쪽으로 몰려가기 전에 내가 시선을 끌어야 해.’
그렇기에 카단은 무리해서라도 마족들을 압박하기로 작정했다.
저주 마법과 뼈 마법을 이용해 마족들의 발을 묶었고, 쉬지 않고 언데드를 되살려냈다.
그뿐이랴?
피로 만든 창과 화살을 날려대며 데스나이트들의 전진을 돕기도 했다.
‘이대로만 가면 성벽을 무너트릴 수도 있겠는데?’
언데드 군단이 마족을 밀어내는 모습을 보자, 조금의 희망이 보였다.
어쩌면 성벽을 무너트리고, 도시 안으로 진격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카단의 머리에 스쳐 지날 때쯤.
쩌엉!
성벽 너머에서부터 빛이 번쩍하더니, 검붉은 섬광이 전장을 휩쓸었다.
콰과과과과광!
섬광은 마족, 언데드 할 것 없이 삼켜버렸고, 섬광이 지나간 자리에 살아남은 것은 없었다.
‘쯧. 왔구나.’
카단은 바닥에 생겨난 커다란 선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고, 이내 성벽 너머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정도 힘을 지녔다면 최소 최상급 이상의 마족이려나.’
어쩌면 여태껏 상대했던 마족 중 가장 강한 녀석일지도 모른다.
카단은 그렇게 생각하며 언데드 군단을 멈췄고, 마른침을 삼키며 성벽 너머의 불길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렸다.
마족들 역시 갑작스러운 큰 공격에 말문이 막혔는 지, 입을 다문 채 성벽 너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벅, 저벅.
일순간 전장이 고요해졌고, 그 고요함을 뚫고 부드러운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이익.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렸고, 성문 너머로 뿔 달린 사슴의 가면을 쓰고 있는 마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위대한 마족! 페코스 님을 뵙습니다!”
“페코스 님을 뵙습니다!”
그러자 멈춰 서 있던 마족들이 일제히 성문을 무릎을 꿇으며 외쳤고.
“멍청한 놈들.”
모습을 드러낸 마족 ‘페코스’는 낮고 위엄있는 목소리로 마족들을 질타했다.
“보, 보통 네크로맨서가 아닙니다!”
“데스나이트들이 생각보다 더 강했습니다! 상급 마족들도 겨우 상대할 수 있….”
“시끄럽다.”
페코스는 변명하는 마족의 말을 잘라내더니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서걱-
페코스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던 마족은 그대로 연기가 되어 사라졌고.
“죄, 죄송합니다!”
마족들은 큰 목소리로 외치며 고개를 숙여댔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카단이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이건 좀 곤란한데.’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새로 등장한 마족의 강함이 느껴졌다.
‘문어 가면을 썼던 놈이나 여우 가면을 쓴 해밀턴 녀석과 같은 급의 마족인 것 같은데.’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벽.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압박이 느껴질 정도의 강함을 지닌 마족.
몇 번을 생각해보고 희망적인 회로를 돌려봐도 머릿속에 승리. 아니, 생존이 그려지지 않았다.
‘저 녀석이 이 도시를 관리하는 놈인가?’
카단은 새로 등장한 ‘페코스’라는 이름의 마족이 이 도시에서 가장 강한 마족이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적어도 루나와 벨리드, 클로제가 있는 곳이 조금 더 안전하다는 뜻이니.
‘쯧. 8성만 되었어도 어떻게든 시간을 더 끌어볼 수 있었을 텐데.’
카단은 아쉽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3년 전 폭풍처럼 빠른 성장을 보여줬던 카단이었지만, 7성이 된 이후로는 도무지 그 경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야만 가능하다는 8성.
8성에 도달한 자는 왕국. 아니, 세계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8성을 넘었다고 알려진 자들은 7명의 가디언과 용병왕. 그리고 왕국 5대 기사단의 기사단장들뿐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커다란 벽을 마주한 카단은 7성에 머물러야 했다.
‘아무리 영혼의 결정을 흡수해도 8성이 되지 않아. 어쩌면 급성장의 후유증 같은 걸까?’
카단은 혀를 차며 멀리 보이는 마족 ‘페코스’를 바라봤고, 페코스 역시 카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털이 쭈뼛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카단은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재빨리 루나에게 말을 걸었다.
‘루나. 아무래도 오래 버틸 수 없을 것 같은데?’
-왜? 넌 무슨 일인데?
‘여기도 무서운 놈이 나타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