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도시 루반 근처의 숲속 어딘가.
“역사적인 날이군.”
여관 주인. 아니, 혁명단 동쪽 지부의 지부장 ‘윌슨’이 흡족한 표정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바라봤다.
허름한 복장의 사람들.
그들은 모두 포탈을 타고 이곳으로 넘어온 도시 로베른의 주민들이었다.
‘설마 내가 죽기 전에 로베른의 주민들을 다시 보는 날이 찾아올 줄이야.’
도시 로베른은 3년 전 마족들에게 가장 먼저 점령당한 곳이었다.
왕국 북쪽 끝에 있는 도시었기에 저항군도 혁명단도 로베른의 주민들을 구해낼 수가 없었다.
‘이게 다 그 어린 네크로맨서 덕분인가?’
그런데 어린 네크로맨서가 나타나더니 하룻밤 사이 로베른의 주민들을 구해냈다.
그 누구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을 당연하다는 듯 해내고 말았다.
“정말 역사적인 날이야.”
윌슨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혁명단의 베이스캠프입니다! 안전한 곳이니 다들 안심하셔도 됩니다!”
“자리에 앉아계시면 물과 식량을 나눠드리겠습니다!”
혁명단 단원들이 캠프 곳곳을 돌아다니며 로베른의 주민들을 향해 외쳐댔다.
다행히 주민들은 얌전히 자리에 앉아 단원들의 통솔을 따라주고 있었다.
‘처음엔 그렇게 경계하더니, 이제는 다들 안심한 모양이야.’
벨리드의 포탈을 타고 넘어오거나, 텔레포트 된 사람들은 처음에 혁명단을 보며 경계심을 내비쳤다.
아무래도 3년간 마족에게 당하고 살았기 때문인지, 쉽게 경계심을 놓을 수가 없었던 모양.
그러나 몇 시간이 지나도 마족이 나타나지 않고, 평화가 유지되자 조금씩 긴장이 풀어졌다.
‘저들이 평화나 안전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적이 언제일까?’
윌슨은 씁쓸한 얼굴로 로베른의 주민들을 살폈다.
마족의 노예로 살면서 ‘평화’라는 단어는 잊고 살았을 것이다.
숲속의 상쾌한 새벽 공기나 간지럽게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소리조차 그들에겐 두려움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혁명단 단원들의 꾸준한 보살핌 덕분에 그들의 얼굴에 평온함이 드러났다.
파밧!
그때 빛과 함께 캠프 옆 공터에 또다시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번에도 감옥에 갇혔던 사람들일 테니, 조심해서 모셔라!”
윌슨은 빛이 번쩍하는 동시에 자리에 일어나 단원들에게 명령했다.
그런데.
“다들 움직이지 마십시오!”
빛과 함께 나타난 남자가 다가오는 혁명단 단원들을 향해 경고하듯 외쳤다.
걸음을 옮기려던 단원들은 그 외침에 멈칫하며 텔레포트 되어 온 사람들을 바라봤고.
“헉!”
“저, 저게 뭐야?”
“왜 마족이 여기에?”
사람들 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일렁이는 것을 확인하자, 무기를 뽑아 들며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나 그들이 무기를 휘두르는 일은 없었다.
철그렁!
검붉은 기운을 내뿜는 사람들은 전부 핏빛 쇠사슬에 묶인 상태.
“당장 이거 풀어!”
“다 죽일 거야! 다 죽일 거다!”
불길한 기운을 미친 듯이 풍기며 발악하고 있었지만, 정작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진 않았다.
“묶여 있다지만 가까이 다가가시면 위험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게만 막아주십시오.”
푸른 머리칼을 지닌 거대한 덩치의 남성이 단원들을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누구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단원들 사이에서 지부장 윌슨이 걸어 나오며 말을 이었다.
“전 혁명단 동쪽 지부의 지부장 윌슨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윌슨 지부장님. 저는 저항군 소속 기사 클로제입니다.”
클로제가 자신을 소개하자, 혁명단 단원들이 모두 휘둥그레 눈을 뜨며 클로제를 바라봤다.
“분명 크, 클로제라고 했지?”
“선의의 방패 클로제?”
“선의의 방패가 왜 이곳에?”
클로제의 명성이 꽤 알려졌는지, 혁명단 단원들 모두가 그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서, 설마 저 어린애까지 감옥에 갇혀 있던 겁니까?”
윌슨이 당황과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잔디 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루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클로제는 잠깐 고개를 돌려 루나를 확인하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번 작전에 큰 힘이 되어주신 분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클로제는 어서 뒤로 물러나라 손짓하며 말했다.
그때 핏빛 쇠사슬에 묶인 사람들이 검게 물든 눈을 부릅뜨며 한 여성에게 외쳤다.
철그렁! 철그렁!
“이봐! 거기 여자! 이거 풀라고 당장!”
“너부터 죽인다! 너부터!”
그들이 바라보는 곳엔 발렌티나가 서 있었고, 그녀는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나 님. 시끄럽지 않습니까? 입도 막아버릴까요?”
발렌티나가 바닥에 앉아 쉬고 있는 루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묻자, 루나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저어댔다.
“좋은 생각이야. 그런데 카단이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 내버려 둬.”
“네. 알겠습니다.”
발렌티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다시 핏빛 쇠사슬에 묶인 자들을 바라봤다.
“쯧. 힘을 너무 많이 썼네.”
루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그녀의 손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손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에도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으며, 그녀가 입는 옷도 여기저기 망가진 상태였다.
“옷도 갈아입고 싶고….”
꽤 지친 상태였는지, 루나는 그대로 잔디 바닥에 몸을 뉘었다.
“괜찮습니까?”
그러자 혁명단 단원들에게 설명하러 갔었던 클로제가 루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응. 난 괜찮아.”
루나는 피곤한 듯 눈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 친구들은 카단이 오면 그때 해결해줄게. 지금은 내가 힘을 못써.”
클로제는 무언가 묻고 싶은 게 많았는지, 불안정한 눈빛으로 루나를 바라봤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쉬고 계십시오.”
그러나 피곤해 보이는 루나에게 더는 질문을 던질 수 없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예의가 아니다. 지금은 기다리는 게 맞아.’
클로제는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조금씩 밝아지고 있는 하늘을 바라봤다.
‘뱀파이어. 강한 종족이다.’
그리곤 천천히 눈을 감으며 감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감옥 끝에서 나타난 마족은 최상급 마족. 7성급 기사들도 상대하기 힘들어하는 존재가 나타났었다.
자칫 마나를 아껴야 하는 벨리드가 마법을 사용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위험하다면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오는 마족들을 막고 있던 클로제 역시 최상급 마족을 향해 달려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가장 먼저 마족에게 달려든 건 핏빛 기운을 내뿜는 루나였다. 이내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카단의 사역마라고 했지? 그렇다면 지금의 카단은 얼마나 강할까?’
다시 대련하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진짜 무서운 놈은 카단이었군.’
그때.
파밧!
다시 캠프 옆 공터에 빛이 반짝였고, 그와 동시에 카단과 벨리드가 나타났다.
“살았다.”
카단은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 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는지, 곧바로 바닥에 주저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카단. 그 녀석은 뭡니까?”
그 옆에 있던 벨리드는 기겁한 얼굴을 하며 카단에게 물었다.
카단을 데려가기 위해 텔레포트 한순간, 벨리드는 숨 막힐 정도로 위협적인 기운을 느꼈었다.
그 기운을 감지하는 순간부터 머릿속에는 빨리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상황 따위는 묻지도 않고 곧바로 카단을 데리고 이곳으로 텔레포트 해야만 했다.
“가면을 쓴 마족. 아마 해밀턴과 비슷한 힘을 지닌 마족일 겁니다.”
“마족의 간부 중 하나로군요….”
“네. 교관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저 정말 죽었을지도 몰라요.”
카단은 지쳤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짧은 시간에 많은 마나를 사용하느라 온몸의 힘이 쫙쫙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눕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이어진 벨리드의 말 덕분에 카단은 몸을 일으켜야만 했다.
“카단. 덕분에 사람들을 전부 구할 수 있었어요.”
벨리드는 혁명단의 베이스캠프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좋은 일도 다 해보는군.’
카단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전생. 그러니까 조폭 시절에는 자신과 관련 없는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거나 목숨을 걸었던 적이 없었다.
오로지 조직과 보스만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워왔다.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사람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 형님께서 이 모습을 보신다면 굉장히 어이없어하실 텐데.’
과거 그가 모셨던 보스를 떠오르며 카단은 미소를 지었고, 다시 벨리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도시 안에 있던 사람은 전부 구하신 겁니까?”
“네. 광부, 노예로 살던 사람들, 그리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까지.”
“아, 그런데 루나가 귀찮은 놈이 나타났다고 하던데?”
순간 루나의 말이 떠오른 카단이 재빨리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 뱀파이어라면 저기 누워서 쉬고 있네요. 저 뱀파이어가 아니었으면 아마 저희는 전멸했을 거예요.”
카단이 고개를 갸웃하며 벨리드를 바라봤다.
“강한 마족이라도 나타났던 겁니까?”
“네. 최상급 정도의 힘을 지닌 마족이었는데, 저 뱀파이어. 아니, 루나가 해결했어요. 아마 그 전투 덕분에 지쳐 있을 겁니다.”
카단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고개를 돌려 휴식을 취하고 있는 루나를 바라보려고 했다.
‘응? 발렌티나?’
그때 발렌티나가 눈에 들어왔고, 이어서 핏빛 쇠사슬에 묶인 사람들을 발견했다.
“교관님. 저 사람들은?”
쇠사슬에 묶인 사람들 전부 불길한 검붉은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마치 마족처럼.
“설마 저희가 늦은 겁니까?”
카단이 조심스레 묻자, 벨리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루나의 말에 의하면 마족이 되었거나 마족화가 진행되고 있는 건 아니라고 했어요.”
“그런데 어째서….”
“저도 잘 모르겠어요. 자세한 건 루나에게 물어보시는 게 빠를 겁니다. 루나가 최상급 마족을 쓰러트리는 순간 모두 이곳으로 보냈거든요.”
무언가 정확히 들을 수 있는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벨리드는 그렇게 말하며 루나를 가리켰고, 카단은 곧바로 걸음을 옮겨 루나에게 다가갔다.
“루나. 나 왔어.”
카단의 목소리가 들리자, 루나가 천천히 눈을 뜨더니 작은 손을 내밀어 살짝 흔들었다.
“안녕.”
“힘 좀 썼다면서? 고생했다.”
“피곤해. 얼른 집에 가고 싶어.”
루나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양손을 이용해 자기 눈을 비벼댔다.
“루나. 저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야?”
카단이 핏빛 쇠사슬에 묶인 사람들을 가리키며 묻자, 루나는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 도시에 사는 마족 중에 현혹 마법이 뛰어난 자가 있는 것 같아.”
“현혹 마법?”
“응. 저 사람들은 마족에게 지배당하고 있어. 마족의 기운이 느껴지는 건 현혹 마법 때문이고.”
아마 현혹 마법을 건 마족이, 마족의 힘도 나눠줬을 것 같아.
루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카단은 몸을 숙여 그녀와 키 높이를 맞췄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아직도 현혹되어있는 것 같은데?”
“현혹 마법을 건 마족이 직접 마법을 해제하거나, 더 강한 현혹 마법을 사용해서 저 마법을 풀어버려야 해.”
“더 강한 현혹 마법?”
“응. 우리가 해야 할 건 당연히 두 번째 방법이고. 그래서 말인데.”
루나가 한쪽 손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피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