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이제 막 햇볕이 숲속에 새어 들어오기 시작한 이른 아침.
텅 빈 혁명단 베이스캠프 옆 공터에 벨리드 교관과 카단이 마주 보며 서 있었다.
“일주일 동안 준비는 잘했어요?”
“나름대로 열심히 해봤습니다.”
일주일이 지나 벨리드 교관과 대련을 약속한 날이 찾아왔다.
“준비를 너무 열심히 한 거 아닌가? 왜 이렇게 피곤해 보이죠?”
벨리드가 자기 눈 밑을 가리키며 카단에게 물었다.
그러자 카단이 양손으로 눈을 살짝 비비며 고개를 저었다.
“요새 잠을 푹 못 자서 그런 것 같아요. 자꾸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하고.”
“컨디션 관리도 영웅의 자질 중 하나입니다.”
벨리드 교관이 혼내듯 말하자, 카단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입학시험을 봤을 때가 떠오르네요.”
입학시험 당시 벨리드 교관은 ‘영웅의 자질’이 부족하다며 수험생 하나를 떨어트린 적이 있었다.
카단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고, 벨리드는 그게 문제 있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대련할 수는 있죠?”
다시 벨리드가 묻자, 카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대련을 포기할 정도로 컨디션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규칙은 똑같아요. 한 명이 패배를 인정하면 대련은 종료. 물론 상대를 죽인다는 마음으로 대련에 임하셔야 해요.”
“심판은 따로 없는 건가요?”
대련 중 이성을 놓쳐 필요 이상의 공격을 할 수도 있었다.
물론 벨리드나 카단이 그럴 확률은 낮았지만, 안전하고 확실한 것이 좋았기에 카단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도움을 요청했어요. 그만 나오셔도 됩니다.”
벨리드가 베이스캠프에 있는 막사를 향해 외쳤다.
그러자 익숙한 외모의 남성이 막사 안에서부터 나와 카단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관 주인님?”
“윌슨입니다. 벌써 5번이나 알려드렸는데….”
카단이 혁명단 동쪽 지부 지부장인 윌슨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자, 그는 실망한 듯 입술을 삐쭉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얼굴은 잘 외우는데, 이름은 잘 외우지 못해서요.”
“뭐, 괜찮습니다. 여관 주인이라는 걸 기억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카단의 사과에 윌슨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저어댔다.
“윌슨 씨가 배불뚝이 아저씨처럼 보여도 괜히 동쪽 지부장이 된 건 아니에요. 그러니 최선을 다해 덤비셔도 좋아요.”
위험하다면 윌슨이 알아서 말릴 테니,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라.
벨리드는 그렇게 말하며 히쭉 웃었고, 카단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교관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런 거겠죠.”
“아, 참고로 뱀파이어를 소환해도 좋아요.”
벨리드가 기꺼이 허락하겠다는 듯 손짓하자, 카단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루나가 있으면 좋겠지만, 휴식을 약속했거든요. 꽤 고생했을 테니 쉬게 해주고 싶습니다.”
분명 루나를 소환한다면 이 대련을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다.
‘루나가 없는 상황의 전투도 늘 생각해둬야 해.’
만약 루나와 휴식을 약속하지 않았더라도 카단은 루나를 소환하지 않았을 것이다.
루나를 포함한 최종 전투력을 시험해보고 싶은 것이 아닌, 개인의 역량을 시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뱀파이어를 소환하지 않는 게 발전과 성장에 도움이 되겠죠.”
오래전부터 생각했었다.
언제까지나 루나에게 기댈 수만은 없다고.
그렇기에 홀로 왕국을 떠돌았던 3년간은 웬만해선 루나를 소환하지 않고 혼자서 난관을 풀어가려 노력했었다.
물론 이번에도 그럴 생각이고.
“좋아요. 그럼 곧바로 시작할까요?”
벨리드가 그렇게 말하며 마나를 활성화했다.
“네. 준비됐습니다.”
카단 역시 마나를 활성화하며 곧바로 언데드를 소환할 준비를 끝냈고.
“자, 편하게 시작하십시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윌슨이 두 사람 모두 마나를 활성화한 것을 확인하자 곧바로 시작 신호를 보내왔다.
달그락!
대련이 시작함과 동시에 카단은 데스나이트와 해골 병사를 소환했다.
‘소환 속도가 더 빨라진 것 같네. 이래서 천재들은….’
이를 지켜보던 벨리드는 혀를 차며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마법은 못 써. 마법은 못 써. 마법은 못 써. 마법은 못 써.
-우리가 방해할 거니까. 마법은 못 써.
-어디 한 번 써봐. 네 생명력을 갉아먹어 줄 거야.
그 순간 음산한 소리가 벨리드의 귓속을 파고들어 왔다.
‘레이스? 아니, 해가 떠 있는데 어떻게 레이스를?’
레이스는 어둠 속에서만 활동하는 언데드.
햇볕에 취약하다는 약점이 있었기에, 아무리 뛰어난 네크로맨서라고 해도 대낮에 레이스를 활용하긴 힘들어했다.
‘참나.’
레이스의 속삭임을 무시하기 위해 빠르게 뒤로 이동하던 벨리드가 무언가를 발견하곤 헛웃음을 지었다.
뼈로 만들어진 거대한 벽.
그 벽이 햇볕을 완벽하게 가려내며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법을 쓸 생각이야?
-어디 쓰기만 해봐.
-너의 마나는 우리의 좋은 양분이 될 거야.
레이스들은 벨리드의 옆에 달라붙어 기분 나쁜 목소리를 연달아 전했고, 그 소리에 벨리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대낮에 레이스한테 협박당해보는 건 또 처음이네.’
화륵!
벨리드는 곧바로 불로 만들어진 창을 날렸다.
쉐에에에에엑!
불의 창은 카단이 아닌 카단이 만들어낸 뼈의 벽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퍼엉!
그러나 불의 창은 데스나이트가 날린 녹색의 오러와 부딪히며 허공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3년간 샬로트 님의 유산만 찾아다녔다고 하지 않았나?’
뛰어난 신체 능력과 타고난 재능으로만 전투를 치르던 3년 전과 달랐다.
상황 대처 능력도 좋아졌으며, 전투를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가는 방식 또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제법이네요?”
그러나 아직 벨리드가 보기엔 부족해 보이는 부분이 많았다.
화륵!
벨리드가 다시 한번 불의 창을 만들어 날렸다.
이번에도 역시 데스나이트 하나가 초록빛 오러를 허공에 날리며 불의 창을 격추하려 했다.
파밧!
“사라졌다?”
그러나 쏘아 올린 오러가 불의 창을 격추하기도 전에 불의 창이 사라졌고.
콰아아아아앙!
얼마 지나지 않아 햇볕을 가리고 그림자를 만들었던 뼈의 벽 쪽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쿠구구구구구궁….
뼈의 벽은 빠른 속도로 무너졌고, 카단은 헛웃음을 지으며 무너지는 뼈의 벽을 바라봤다.
‘저건 너무 사기인데?’
투사체를 텔레포트 시키다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과연 이런 사람을 이길 방법이 있을까?
‘소모전으로 이끌어야 하나?’
마나의 사랑을 받는다고 알려진 자들의 필승법 중 하나.
상대방이 마나를 지속해서 소모하게 만들어 승리로 이끄는 방식.
비등한 실력을 지녔으며 까다로운 전투 방식을 지닌 적을 상대할 때 사용하기 좋은 방법이었다.
‘아니야. 벨리드 교관님은 베테랑이다. 소모전으로 유도한다고 해도 따라오지 않으실 거야.’
그러나 상대방은 수많은 전투 속에서 살아남고 승리를 거머쥐었던 베테랑.
단순한 소모전 따위로 벨리드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팟!
“카단. 생각이 너무 많은데요?”
카단이 무너지는 벽을 바라보던 사이, 벨리드 교관이 블링크 마법을 이용해 재빨리 카단의 앞에 나타났다.
“어?”
화륵!
당황하기도 잠시.
퍼억!
불을 휘감은 벨리드의 주먹이 정확히 카단의 복부에 박혔다.
“윽!”
뼈 방패를 만들 시간도, 반격할 시간도 없었다.
순식간에 나타난 벨리드는 카단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은 뒤, 곧바로 블링크 마법을 통해 거리를 벌렸다.
카단이 할 수 있는 건 통증을 참으며 멀어진 벨리드를 바라보는 것뿐.
“봐주는 건 여기까지. 다음에도 그런 빈틈을 보이면 후회할걸요?”
벨리드가 히쭉 웃더니, 불을 이용해 수십 개의 화살을 허공에 만들어냈다.
슈슈슈슈슈슉!
‘뼈 방패를….’
카단은 자연스레 뼈 방패를 만들어내려 했지만, 본능적으로 마나 운용을 멈추곤 옆으로 몸을 날렸다.
파밧!
조금 전까지 카단이 서 있던 자리로 포탈이 생겨나더니, 그 안에서부터 불의 화살들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내렸다.
폭! 포복폭!
만약 카단이 몸을 던지지 않았다면, 불화살이 잔뜩 박혀 통증을 호소해야만 했을 것이다.
‘방패를 만들었다면 시야가 가려져 대응이 느려졌을 거야.’
생각을 길게 이어갈 수 없었다.
벨리드는 카단이 오랫동안 생각을 이어가도록 내버려 두질 않았다.
슈슈슈슉!
제대로 일어서기도 전에 허공에 나타난 포탈에서부터 화살들이 날아왔고.
“어?”
겨우 피했다 싶으면 눈앞에서 불꽃이 폭발했다.
촤르르르륵.
빠르게 뼈 방패를 만들어내 공격을 막아내지 않았다면 머리카락은 물론 입고 있던 옷까지 전부 재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스릉.
카단은 재빨리 뼈를 이용해 단검을 만들어 자신의 손등을 그었다.
촤락!
피는 빠르게 사신의 형태로 변했고, 그대로 카단의 몸에 흡수되었다.
타앗!
피의 사신. 네크로맨서의 7성 마법인 데시메이션이 그대로 카단의 몸에 흡수되자 카단의 속도가 빨라졌다.
땅을 박차는 순간부터 벨리드에게 도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건 이미 봤는데?”
당황할 법도 했지만, 벨리드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거리를 좁혀온 카단을 향해 손을 내밀어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콰아아아아아앙!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카단과 벨리드 사이에 큰 폭발이 일어났고.
“크윽!”
카단은 양손으로 얼굴을 보호한 채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아무리 상대가 마법사라지만, 네크로맨서가 근접전부터 생각하는 건 너무 위험한데요? 뭐, 순발력과 대처 능력은 인정.”
그새 또 거리를 벌린 벨리드가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며 가르치듯 말을 전해왔다.
“미끼였습니다.”
“네?”
“전 미끼였습니다.”
카단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벨리드의 양옆에서 거대한 검과 도끼가 휘둘러졌다.
부우우웅!
카단의 데스나이트 앤서니와 카록이 기다렸다는 듯 블링크 마법을 이용해 뒤로 물러난 벨리드가 허공에 나타나는 순간 향해 무기를 휘두른 것이었다.
‘블링크 이동 범위를 예측했다고?’
파밧!
벨리드는 당황하는 동시에 다시 한번 블링크 마법을 써야 했고.
촤르르륵!
이번엔 그녀가 나타난 곳에서부터 뼈로 만들어진 손이 튀어나와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
블링크 마법을 계속해서 사용하기엔 마나의 부담이 갈 수도 있는 상황.
철퍼덕!
벨리드는 하는 수 없이 바닥에 몸을 던져 데굴데굴 몸을 굴려야만 했다.
촤락!
그녀가 겨우 몸을 일으킨 순간, 이번엔 허공에 마법진이 수십 개가 생기더니, 그곳에서부터 피로 만들어진 밧줄이 튀어나왔다.
“생각해낸 게 포박입니까?”
비웃듯 말을 내뱉었지만, 벨리드의 표정에서 더는 여유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은 감탄에 젖어있었으며, 입가에는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제법이네. 계속 블링크로 도망 다니니까 쉴 틈을 주지 않겠다. 이건가?’
벨리드는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마나를 활성화해 다시 한번 블링크를 사용했다.
‘됐다.’
블링크를 통해 다시 멀어진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벨리드를 보며 카단이 미소를 지었다.
벨리드를 혼란스럽게 몰아붙이는 사이, 미리 함정을 몇 개 준비해 놓았다.
그건 바로.
달그락.
고블린 시체를 번쩍 들고 있는 해골 병사였다.
“시체?”
해골 병사를 발견한 벨리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살이나 근육 따위가 없는 해골 병사가 미소를 짓는 건 말이 되지 않지만, 어쩐지 고개를 갸웃하며 턱뼈를 미친 듯이 움직이는 해골 병사를 보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딱딱딱딱딱!
게다가 해골 병사가 들고 있는 고블린 시체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몸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끝입니다.”
카단이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짓자, 벨리드의 입꼬리 한쪽이 씩 올라갔다.
“카단. 승리는 끝날 때까지 장담하는 게 아니에요. 방심은 금물입니다.”
파밧!
그녀의 말과 함께 시체를 든 해골 병사가 순식간에 사라졌고.
“어라…?”
카단이 눈을 끔뻑한 사이, 시체를 든 해골 병사가 그의 앞에 나타나 있었다.
달그락?
갑작스러운 이동에 해골 병사도 당황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고.
“이미 마법을 써버렸네?”
카단은 헛웃음을 지으며 폭발하는 고블린 시체를 바라봤다.
콰아아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