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후….”
눈을 뜬 카단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내 마법에 내가 당한 건가?’
정신을 잃기 전 기억을 떠올린 카단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방심했다. 설마 시체 폭발을 쓰는 동시에 시체를 내 앞으로 텔레포트 시킬 줄이야.’
벨리드를 우습게 본 적은 없었다. 베테랑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고, 계속해서 경계했다.
‘블링크를 연속으로 쓸 수 없다는 걸 확인한 뒤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는데….’
블링크 마법을 연속으로 사용하는 것은 시전자에게 큰 부담을 안길 것이다.
불안정한 마나를 다루며 블링크 마법을 사용했다간 자칫 몸이 갈기갈기 찢길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카단은 벨리드가 블링크 마법을 쓰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방어 마법 정도로 몸을 보호할 줄 알았는데, 설마 거기서 텔레포트를 쓸 줄이야.’
그러나 벨리드의 선택은 텔레포트.
마나가 불안정한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그녀가 텔레포트 시킨 대상은 스스로가 아닌 언데드와 폭발 마법이 발동된 고블린 시체였다.
갈기갈기 찢겨도 상관없는 존재였기에 벨리드는 과감하게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했다.
그 결과.
‘깔끔하게 패배했네.’
카단은 오랜만에 패배의 쓰디쓴 맛을 봐야만 했다.
물론 성장의 밑거름이 될만한 패배.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패배였기에 카단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래도 기절까지 할 줄이야.”
카단이 헛웃음을 지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응?’
그런데 이상했다.
묘하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환경.
‘TV?’
그의 눈에 카단이 사는 세계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 보였다.
‘이건 핸드폰이고 저건 에어컨….’
카단. 아니 이석훈으로 살던 시절에나 볼 수 있던 물건들이 보였다.
“이게 무슨?”
꿈을 꾸는 것일까?
카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리모컨을 이용해 텔레비전을 켰다.
-오늘 서울 지역의 날씨는….
단정한 원피스를 입은 아나운서가 지도를 가리키며 날씨를 설명하고 있다.
띠링.
-단돈 3만 9천 900원! 지금 구매하시면….
띠링.
-예진이 선화 딸이에요…!
채널을 몇 번이고 돌려봤지만,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이게 도대체?”
카단은 헛웃음을 지으며 TV를 끄고 조금 전까지 누워있던 침대를 확인해보았다.
‘여긴 내가 살았던 방인데?’
카단으로 20년을 살아왔기에 이제는 잊었다고 생각했던 공간.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진 추억의 공간이 서서히 눈에 익기 시작했다.
띵동!
그때 현관문 쪽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고, 카단은 화들짝 놀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괜히 마른침이 삼켜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석훈이 형님! 접니다! 아직 주무십니까!”
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잊을 수 없는 목소리.
“민규냐?”
조심스레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을 불러보았다.
“네! 형님! 일찍 일어나셨네요? 식사 좀 챙겨왔습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카단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러나 꿈이라고 하기엔 모든 감각들이 너무나 생생하다.
노총각 혼자 살면 냄새난다며 부하들이 챙겨준 디퓨져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허브향이.
띵동!
“형님! 저 화장실이 급합니다! 제발! 아~ 장난치지 마십시오!”
문을 열어달라며 초인종을 누르는 옛 부하의 목소리.
스슥.
맨발에서부터 느껴지는 차가운 바닥의 촉감까지.
그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럼 카단으로 살았던 게 꿈이라는 건가?’
그럴 리 없다.
카단으로 환생하여 샬로트 밑에서 자라나며 영웅 아카데미에 입학해 루나를 만나고 마족들과 싸웠던 그 모든 기억이 생생했다.
밥도 먹었고 잠도 잤으며, 분노에 눈물도 흘렸고, 미칠 듯한 훈련을 이겨내며 땀까지 흘렸었다.
그런 게 꿈일 리 없지 않은가?
쿵쿵쿵!
“아! 형님! 저 진짜 미칠 것 같아요! 살려주세요!”
그때 문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카단은 곧바로 걸음을 옮겨 문을 열어주었다.
철컥!
“형님! 저 화장실부터 다녀오겠습니다!”
그러자 회색 양복을 입고 있던 민규라는 남성이 재빨리 현관문을 넘어서더니 화장실을 향해 달려갔다.
“진짜 민규네?”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부하 중 가장 친했고, 가장 자신을 잘 따랐으며, 마지막엔 카단. 아니, 이석훈을 칼로 찌르며 배신했던 부하.
어찌 그 얼굴을 잊을 수 있을까?
카단은 재빨리 고개를 젓더니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나 하트가… 없어?’
수년간 쌓아왔던 마나 하트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죽음을 기억하라….”
허공에 손을 뻗어 네크로맨시를 사용했지만, 고요함만이 카단의 살결을 간질일 뿐이었다.
“네? 뭘 기억하라고요?”
그때 화장실 문이 열리며 개운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민규가 나왔다.
“어?”
“형님. 잠시만 앉아계십시오. 제가 저 앞 국밥집에서 포장 좀 해왔습니다. 금방 준비할게요.”
민규는 마치 자기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익숙하게 주방으로 향했고, 냄비를 꺼내 포장된 순대국밥을 부어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탁 위로 국밥을 담은 그릇이 올려졌고.
“석훈이 형님! 식사하십시오!”
민규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단을 불렀다.
“어? 어, 그래.”
카단은 헛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이내 식탁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호로록.
‘맛도 느껴져.’
막 끓인 국밥의 뜨거운 국물이 혓바닥을 자극했다.
익숙하며 그리웠던 그 맛이 느껴지며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어제 술 많이 드셔서 해장하시라고 준비해봤는데, 어떻습니까?”
김민규는 해맑게 웃으며 카단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맛있네.”
카단의 대답에 김민규가 흡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식사를 시작했고.
‘미치겠네.’
카단은 수저를 내려놓으며 새악에 잠겼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하루아침에 카단에서 이석훈으로 돌아왔다는 게 말이 되나?
이석훈은 분명 죽었다.
아침 일찍 집으로 찾아와 국밥을 차려준 김민규의 손에.
‘설마 내가 쓴 시체 폭발에 내가 죽은 건가?’
그럼 이곳은 정말 사후 세계라는 말인가? 그리워했던 곳을 보여주는 그런 사후 세계?
“형님. 안 드십니까? 오늘 큰 형님께서 중요한 일 있다고 일찍 모이라고 하셨는데?”
“어? 중요한 일?”
“네. 오늘 도끼파 녀석들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간부들 전부 집합시키셨는데? 기억 안 나십니까?”
이어진 김민규의 말에 카단이 무언가 떠올린 듯 눈을 번쩍 떴다.
‘도끼파?’
카단은 급하게 주머니를 뒤졌고, 이내 고개를 돌려 벽면에 붙은 달력을 확인했다.
“오늘이 4월 17일. 맞냐?”
달력을 살피던 카단이 질문하자, 국밥을 먹던 김민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형님. 오늘따라 참 이상하시네. 꼭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습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김민규가 수저를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물어보자, 카단은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4월 17일. 이날은 카단. 아니, 이석훈이 죽기 하루 전날이었다.
***
서울의 어느 한식집.
“안녕하십니까!”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고급 소파에 앉은 흰 머리의 남성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래, 다들 앉아라.”
사납게 생긴 남성의 손짓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은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형님….’
이석훈의 모습을 한 카단은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고, 이내 그립다는 감정과 함께 보스를 바라봤다.
“다들 잘 지냈나?”
“네! 형님!”
“모이라고 한 이유는 다들 대충 알고 있겠지?”
“네! 알고 있습니다!”
남자들이 큰 목소리로 동시에 대답하니, 마치 방안이 울리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도끼파 녀석들이 우리 애들을 건드렸고, 우리 구역으로 넘어와 행패를 부린다던데?”
보스의 질문에 민머리 남자 하나가 조심스레 손을 들며 답했다.
“맞습니다. 형님. 제가 관리하는 구역에 도끼파 놈들이 나타나 행패를 부렸습니다.”
“다친 애들은?”
“10명 정도가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형님. 이건 명백한 선전포고입니다.”
“그래. 선전포고지.”
보스는 흰머리를 뒤로 넘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표정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공기가 무거워졌고, 다른 조직원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이어질 보스의 말을 기다렸다.
“명색의 쌍룡파가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겠지?”
“네! 형님!”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을 왜 건드리는지. 쯧쯧.”
보스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석훈아.”
보스는 카단을 바라보며 그의 이름을 불렀고, 카단은 고개를 꾸벅이며 대답했다.
“네. 형님.”
느닷없이 전생의 인생을 이어가게 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우선은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겨볼 생각이었다.
이렇게 보고 싶던 사람도 볼 수 있으니, 지금 당장은 이 흐름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이번에도 고생 좀 할 수 있겠냐?”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든든한 놈. 그래. 괜찮은 애들 좀 붙여줄 테니, 협박하든, 전쟁을 치르고 오든. 상황에 따라 알아서 처리하고 와.”
“알겠습니다. 형님.”
보스의 말에 카단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기억하는 과거와 똑같다.’
자꾸 시비를 걸어오는 도끼파의 아지트로 쳐들어가라는 보스의 명령.
그 명령에 따라 이석훈은 조직원들을 이끌고 도끼파 아지트로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었었지.’
이것이 카단이 기억하는 전생의 마지막 날이다.
여태까지 그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이 하루는 카단이 기억하는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잠시 후.
식사가 끝난 후, 보스가 카단을 따로 불렀고 두 사람은 식당 앞마당에 나와 검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훈아. 매번 위험한 일만 부탁해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다른 놈들은 구역 관리도 해야 하고 위험 부담이 많은 일을 처리하는데, 너만 안전하면 불만이 들어와.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카단. 아니, 이석훈은 보스의 배려로 불법적인 일과 거리가 먼 오로지 주먹으로 해결하는 일만 도맡았다.
“난 언젠가 네가 이 조직을 떠나 평범하게 살길 바란다. 지금은 이게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내 최대한의 배려야.”
폭력 전과. 그 이상의 범법행위를 남기지 않도록 도와주려 했다.
“뭐, 네 녀석 성향 때문에 다른 일을 맡기긴 힘든 것도 있지만. 크하하!”
“잘 알고 있습니다.”
“석훈아. 혹시 내 밑에 들어온 게 후회된 적은 있냐?”
보스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묻자, 카단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형님은 저에게 아버지 같은 분이십니다. 형님이 아니었다면 길거리나 전전하는 양아치로 남았겠죠.”
“그래. 넌 내 아들 같은 놈이지. 그러니 조심해라. 언제 출발할 생각이냐?”
후우.
보스가 내뱉은 담배 연기가 허공에서 옅어지며 바람에 따라 흩어졌다.
“12시가 지나면 곧바로 쳐들어갈 생각입니다.”
“연장도 좀 챙겨. 도끼파 놈들이 네가 나타난 거 알면 연장부터 꺼내 들잖아?”
“네. 알겠습니다.”
“그래. 애들이랑 얘기도 해봐야 할 테니, 그만 가봐라.”
보스는 마당에 놓인 재떨이 위로 담배를 지지며 말했고, 카단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형님.”
“뭐, 인마.”
“보고 싶었습니다.”
“미친놈.”
보스는 피식 웃더니, 이상한 사람보는 듯한 눈빛으로 카단을 바라봤다.
“아, 맞다. 석훈아.”
“네. 형님.”
“전에 말했던 건 좀 생각해봤냐?”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야망. 인마. 야망. 사람이 야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고 ”
보스의 말에 카단은 멍한 표정으로 검게 물든 하늘을 바라봤다.
‘야망….’
야망이라는 단어에 수많은 얼굴이 떠올랐다.
그건 이석훈이 기억하는 얼굴들이 아니었다.
샬로트, 잭 카터, 루나,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만든 인연들.
그 많은 인연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카단이 되어 살았던 삶은 꿈 따위가 아니야.’
카단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름대로 생각 좀 해봤습니다.”
“크하하! 그래. 석훈이 네가 어떤 야망을 품었는지는 도끼파 녀석들을 처리하고 들려주도록 해라.”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카단은 옷매무시를 단정히 한 뒤, 보스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카단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몸을 일으켰고, 이내 몸을 돌려 한식집 출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건 꿈이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카단이 한식집을 빠져나오자, 검은색 세단 차량의 문이 열렸고, 김민규가 급히 튀어나와 카단을 반겨주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애들은 불러놨지?”
“네. 다들 준비하고 있습니다. 연장도 충분히 준비했고요.”
연장이라는 말에 카단은 김민규의 허리 부근을 바라봤다.
‘도끼파와 전쟁이 시작되면, 등 뒤에 숨겨놓은 칼을 꺼내 나를 찌르겠지.’
잠시나마 씁쓸한 표정을 짓던 카단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카단은 그렇게 다시 한번 자신이 죽었던 시간과 마주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