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몇 시간 전.
“형님. 저녁에 모시러 올 테니, 그 전에 필요한 거 있으시면 연락해주십시오!”
아침 일찍 찾아와 국밥을 챙겨줬던 김민규가 떠난 후, 카단은 홀로 집에 남게 되었다.
카단은 멍한 표정으로 현관문을 바라보고 있었고,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그때.
“여긴 어디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카단은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루나?”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카단이 눈을 떴던 방 안이었다.
그곳엔 검은 드레스를 입은 루나가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며 서 있었다.
“루나 네가 여기에 왜?”
카단이 헛숨을 삼키며 물어보자, 루나가 피식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여주었다.
그녀의 약지엔 붉은 실로 만들어진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건?”
“미리 대비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
붉은 실로 만들어진 반지는 카단이 현혹 마법에 걸렸을 때를 대비해 만든 루나의 마법이었다.
“그럼 이게 현혹 마법이라는 거야?”
카단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자, 루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정확히는 꿈. 이 현혹 마법의 주인은 몽마거든.”
“몽마?”
“꿈을 파먹고 사는 마족. 더럽고 추악한 녀석이야. 어떤 놈인진 모르겠지만.”
루나가 혀를 차며 카단. 아니, 이석훈의 집을 천천히 걸어 다녔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야? 도대체 카단 너는 무슨 꿈을 꾸고 사는 거야?”
루나는 신기하다는 듯 집 곳곳에 있는 물건들을 바라보고 만져보고 또 냄새까지 맡아보았다.
카단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것들이 루나에게는 생소하게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보통 몽마에 의해 꾸게 된 인간의 꿈은 가장 그리웠던 순간, 혹은 가장 바라는 순간일 텐데?”
루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카단을 바라봤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샬로트라는 사람을 보게 될 줄 알고 기대했단 말이야. 루시아 언니가 하도 칭찬해서.”
루나가 생각하기로 카단이 가장 그리워하고 바라는 순간이 샬로트와 함께할 때가 아닐까 싶었다.
‘아버지가 나타났다면 조금 더 좋을 뻔했네.’
그렇다면 궁금했던 걸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왕국 곳곳에 유산을 숨겨놓은 이유와 마족이 노리는 샬로트의 유산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 유산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루나에겐 얘기해줄 필요가 없겠지? 어차피 믿지도 않을 텐데.’
이곳은 전생에 살던 집이다. 라는 말을 루나가 믿어줄까? 아니, 애초에 전생이라는 걸 믿기나 할까?
“루나. 이 꿈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해?”
“몽마를 쓰러트려야지.”
“죽이라는 거야? 몽마가 어디 있는데?”
그렇기에 카단은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굳이 모든 걸 설명할 필요는 없으니까.
“몽마가 알아서 찾아올 거야. 그런데 몽마가 널 찾아와도 카단 너는 몽마를 공격할 수 없어.”
이어진 루나의 대답에 카단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이 꿈의 세계를 만든 건 너지만, 꿈의 주인은 몽마거든. 녀석이 만든 규칙에 따라 너는 몽마를 공격할 수 없어.”
자칫하면 몽마가 꿈을 조종해, 꿈속 모든 인물이 카단을 공격하게 될 것이다.
루나는 그렇게 설명하며 카단에게 다가왔다.
“그렇지만 난 가능하지.”
루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카단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면 난 어떻게 해야 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건가?”
“그냥 꿈을 즐겨.”
“즐기라고?”
“네가 무의식중에 바라며 만들어낸 세계잖아? 다신 올 기회가 없으니까 충분히 즐기라고.”
루나는 여유롭게 손짓하며 말했고, 카단은 그 말에 피식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흘러가면 흘러가는 대로 행동하라는 거지?”
루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단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현관문을 바라봤고.
‘그리웠던 얼굴을 잔뜩 볼 수 있겠네.’
이내 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 * *
도시 루반에 있는 여관 ‘고독한 여행가들의 쉼터’.
“진짜 미치겠네.”
벨리드가 불안한 표정으로 여관 1층 식당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녀는 대련 도중 폭발과 함께 기절해버린 카단 때문에 굉장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너무 과했어. 카단이 7성이라는 사실에 너무 힘을 줘버린 건가? 적당히 거리 좀 두고 시체 폭탄을 텔레포트 시켰어야 했는데!”
그녀는 자책하듯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혁명단 단원들은 괜히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
“벨리드 님. 정신 사납습니다.”
그때 2층에서부터 내려오던 여관 주인 ‘윌슨’이 고개를 저으며 벨리드에게 말했다.
“윌슨! 카단은 좀 어때요?”
윌슨이 1층으로 내려오자, 벨리드는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다가가 질문을 던졌다.
“잘 모르겠습니다. 상처도 없고 이상한 곳은 없어 보이는데, 도통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폭발에 휩쓸렸다지만, 카단의 몸은 멀쩡했고 상처 하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정신을 잃은 지 벌써 3일이 지났고, 덕분에 대련 상대였던 벨리드는 안절부절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제들이라도 데려올까요? 회복 마법이라도 더 충분히 걸어주면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요?”
“이미 첫날 해보지 않았습니까? 아무래도 피로가 누적되어 깊은 잠에 빠진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여관 주인 윌슨은 기절한 카단을 깨워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보았다.
물을 뿌려보거나, 바늘 같은 것으로 콕콕 찔러도 봤고, 깃털로 코를 간질이는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지만, 카단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사제의 회복 마법도 통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여관 주인은 카단이 극심한 피로감에 깊게 잠들었다고 판단했다.
“정말 미치겠네.”
벨리드는 괴롭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고는 털썩하고 의자에 앉았다.
“충분히 회복할 때까지 기다립시다. 만약 생각보다 길어진다면 그때 대사제님이라도 모셔와 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괴로워하는 벨리드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여관 주인이 진정하라는 듯 얼음물을 건네며 말했다.
“고마워요. 윌슨.”
“그러게…. 힘 조절 좀 하시지.”
윌슨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벨리드가 매서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고.
“그렇죠? 제 잘못이죠? 내가 너무 과했어! 빌어먹을!”
이내 울상을 지으며 바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벨리드 님. 농담입니다. 농담. 마지막에 카단 님에게 실드 마법도 쓰셨고, 보셨다시피 카단 님은 아무런 상처 없이 멀쩡합니다.”
대련 중 카단이 갑작스러운 폭발에 반응하지 못할 것 같았기에 벨리드는 곧바로 방어 마법을 사용해 카단을 보호했었다.
덕분에 카단은 조금의 상처도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카단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타앗!
그때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서부터 오렌지빛 머리칼을 지닌 어린아이가 빠른 속도로 뛰어 내려왔다.
“응? 저 아이는?”
익숙한 얼굴. 분명 그 아이의 정체는 카단과 사역마 계약으로 이어진 뱀파이어 ‘루나’였다.
쾅!
루나는 곧바로 여관 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 나갔고.
타앗!
이어서 카단이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빠르게 내려왔다.
“카, 카단!”
벨리드가 급히 카단을 불렀지만, 카단은 잠깐 손을 들어 인사만 건넬 뿐, 그 어떤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어디 가세요!”
벨리드가 다시 급하게 질문을 던졌지만, 카단은 루나의 뒤를 따라 여관을 빠져나간 후였다.
“멀쩡하네요?”
여관 주인은 멍한 표정으로 활짝 열린 여관 문을 바라봤고.
“그, 그러게요?”
벨리드 역시 헛웃음을 지으며 카단이 떠난 여관 문을 바라봤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저도 다녀올게요!”
벨리드는 윌슨이 건넸던 얼음물을 빠르게 마신 뒤, 곧바로 카단을 따라 여관 문을 나섰다.
다행히 카단은 아직 멀리까지 가지 못했고, 벨리드가 블링크 마법을 몇 번 사용하니 금세 따라잡을 수 있었다.
“카단!”
벨리드가 급히 부르자, 카단은 힐끗 옆을 바라보며 답했다.
“교관님. 급히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금방 돌아올게요.”
“아니, 어딜 가는데요? 3일 동안 기절한 상태였는데, 어딜 간다는 거야?”
3일 동안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도 않았을 텐데, 그 상태로 어딜 가서 뭘 한다는 말일까?
“3일이요?”
“그래요. 대련 중 쓰러져서는 3일이나 기절해있는데, 갑자기 어딜 간다니까 내가 말문이 다 막히네?”
벨리드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하자, 카단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꿈 속에서 보낸 시간은 겨우 하루.
아니.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3일이나 지나있을 줄이야.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마족 잡으러 갑니다.”
“눈 뜨자마자 갑자기 마족이라니?”
벨리드가 걱정스레 물어보자, 카단은 달리는 것을 이어가며 몽마에 의해 꿈속에 갇혔던 일을 전해주었다.
물론 어떤 꿈이었는지까지는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다.
“몽마? 몽마라고요?”
“네. 감옥에 갇힌 저항군에게 현혹 마법을 걸었던 마족. 그 녀석이 이 근처에 와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루나에 말에 의하면, 몽마가 꿈속에 찾아와 꿈을 조종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거리를 좁혀야만 가능하다고 해요.”
즉, 멀지 않은 곳에 마족이 있다는 뜻.
“같이 갈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 게다가 현혹 마법을 사용했던 마족은 꽤 강력한 힘을 지녔을 것이다.
카단 혼자만 보내기엔 걱정이 되었기에 벨리드는 그와 동행하기로 했고.
“교관님이 계시면 든든하죠.”
카단은 굳이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말려봤자 어떻게든 따라올 사람이었으니, 말싸움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벨리드가 약한 사람도 아니고.
“카단. 이쪽으로!”
카단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앞서 달리던 루나의 외침이 들려왔다.
타앗!
그 목소리에 카단과 벨리드가 재빨리 땅을 박찼고, 그렇게 뱀파이어 하나와 두 사람은 도시 루반의 성문을 넘어섰다.
* * *
“제길!”
잠에서 깨어난 몽마 ‘줄리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빌어먹을 꼬맹이가!”
쿵!
평생 이런 치욕은 없을 것이다.
꿈을 먹고 사는 마족이라 불리는 그녀가 인간의 꿈 속에서 미친 듯이 두들겨 맞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말도 안 돼. 도대체 그 꼬맹이는 뭘 하는 인간이야!”
어떻게 현혹 마법을 간파했으며, 미리 대비를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제아무리 강력한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꿈속에 가두면 그곳에선 줄리아를 이길 수 없어야 정상이다.
몽마로서 제3자의 개입은 처음 겪는 일. 줄리아는 혼란스럽다는 듯 이를 악물며 숨을 씩씩 내뱉었다.
비록 카단의 꿈속에서 두들겨 맞았다지만, 통증이 남아있기라도 한 듯 그녀는 얼굴 여기저기를 만져보았다.
‘무슨 꼬맹이의 힘이….’
마족이 된 후로 누군가에게 이렇게 두들겨 맞아 본 적이 있던가?
아니. 없었다.
같은 마족끼리는 싸운 적도 없으며, 몽마로서 각성한 이후로는 직접적인 전투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그저 한 사람씩 꿈의 노예로 만들고 다니며 여왕과 같은 삶을 살아왔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해.”
카단에게 마법을 걸기 위해 혁명단이 숨어있는 도시를 찾아다녔었고, 수소문 끝에 카단이 도시 루반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기사가 성문을 지키고 있어 도시 안까지 들어갈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줄리아는 근처 숲속에서 카단의 꿈에 간섭하기로 하며 버려진 오두막에서 며칠간 머물러야 했다.
“기회는 다시 온다. 그땐 반드시….”
줄리아가 주섬주섬 주변에 놓인 자신의 짐들을 챙기려던 순간.
콰아앙!
굉음과 함께 오두막의 벽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찾았다. 헤헤.”
커다랗게 뚫린 구멍 너머로 익숙한 여자아이가 보였다.
여자아이는 명랑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자기가 벽면에 구멍을 뚫었다는 걸 자랑이라도 하듯 주먹을 빙글빙글 돌려 보였다.
“네, 네가 어떻게 여길?”
카단의 꿈에서 쫓겨나기 직전, 오렌지빛 머리칼을 지닌 아이. ‘루나’는 줄리아를 향해 말했었다.
그러나 줄리아는 급히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마족을 찾아내기 힘들 테니까.
이렇게 빨리 루나가 찾아온다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내가 말했지? 찾아가서 죽여주겠다고.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 빌어먹을!”
몽마는 이를 악물며 재빨리 힘을 방출하기 시작했고, 그녀의 주변으로 검붉은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카단. 저 몽마 죽여도 돼?”
루나는 몸을 푼다는 듯 팔을 빙빙 돌리다가 카단을 바라보며 물었고.
“어차피 정보도 말해주지 않을 것 같은데, 하고 싶은 대로 해. 그전에 마족한테 한마디만 해도 될까?”
“물론.”
루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카단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고맙다.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어.”
그 말이 몽마가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