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콰아아아앙!
포탈을 넘어온 순간 가장 먼저 들려온 소리는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였다.
“기마대! 보병 부대는 모두 출전 준비! 적이 성벽에 다가오지 못하게 하라!”
“마법사들은 날아오는 마법들을 요격한다!”
“성벽을 보수해! 방어선이 무너지면 다 죽는 거야!”
이어서 다급한 지휘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거대한 바위나 마법 따위가 날아오고 있었고.
콰와아앙!
성벽 위 마법사들이 열심히 마법을 이용해 성벽을 지켜내고 있었다.
전쟁을 준비하는 분주한 분위기 속, 카단은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저쪽인가?’
카단은 거대한 막사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발견하더니, 옆에 있는 루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루나. 성벽 너머로 가서 마족들의 상황 좀 보고 와줄 수 있어?”
“강한 놈이 얼마나 있나 확인하고 오라는 거지?”
“부탁할게. 전투해야 할 것 같으면 곧바로 소환 해제해.”
“알겠어. 걱정하지 마.”
루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땅을 박차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이내 루나는 성벽 너머로 사라졌고, 카단은 막사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내 그의 걸음은 가장 큰 막사 앞에서 멈춰졌다.
“우선 별동대를 보내 공성 병기를 부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마족의 수가 상당히 많습니다. 저희 병력만으로 막아낼 수 있을지가 의문입니다.”
“마족입니다! 단순한 병력만으로는 막아낼 수 없습니다! 서둘러 지원 요청을 해야 합니다!”
막사 안에서는 무언가 다급하게 보고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왔고, 카단은 잠시 호흡한 뒤 천으로 된 막사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누, 누구냐!”
낯선 이의 등장이기 때문일까? 소리 없이 들어왔기 때문일까?
스릉!
막사 안에 있던 자들은 무기를 뽑아 들며 경계 어린 눈빛으로 카단을 바라봤다.
문 앞에 선 카단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혁명단 벨리드 님의 말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전 카단….”
“카, 카단?”
그때 누군가 카단의 말을 끊었고, 말을 잘라낸 익숙한 목소리에 카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크리스 교관님?”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영웅 아카데미의 1학년 총책임자였던 교관 크리스였다.
“교관님이 왜 여기에?”
“카단 네가 왜 여기 있냐?”
두 사람은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고, 이내 크리스가 방긋 웃으며 카단에게 다가왔다.
와락!
3년 만의 만남.
그 반가움에 크리스는 곧바로 카단을 끌어안았고, 카단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이게 얼마 만이냐! 잘 지냈어? 다른 애들은 가끔 봤는데, 아무도 네 소식을 모르더라! 어디서 죽은 건 아닌지 걱정했잖아, 인마!”
“이곳에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지낸 거야? 몸은… 더 좋아졌구나! 역시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어!”
크리스 교관은 목소리까지 높여가며 마음껏 반가움을 표현했다.
“크흠.”
그러자 막사 안쪽에서 누군가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제야 크리스가 자세를 바로 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죄, 죄송합니다! 이 녀석은 영웅 아카데미 생도 출신입니다!”
“마지막 생도 중 하나인가?”
“네! 그리고 네크로맨서죠. 단장님도 아실 겁니다. 샬로트 잉그마르 님의 유일한 후계자.”
크리스가 카단을 소개하자, 단장이라 불린 자가 놀란 눈으로 카단을 바라봤다.
“이 자가 샬로트 님의 아들….”
단장이 놀란 사이, 크리스가 방긋 웃으며 카단을 바라봤다.
“카단. 인사드려라. 저분은 콜린퍼스 기사단의 기사단장. 지크 그림발트 님이시다.”
크리스의 말이 끝나는 순간 카단이 순간 숨을 멈추며 지크 그림발트를 바라봤다.
왕국 5대 기사단.
가디언 다음으로 강하다고 알려진 최강자 중 하나.
그 유명한 콜린퍼스 기사단의 기사단장을 이렇게 보게 될 줄이야.
척!
“위대한 왕국의 검. 콜린퍼스 기사단의 기사단장님을 뵙습니다.”
카단은 다시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보게 되어 반갑네. 잉그마르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 그만 고개를 들도록 하지.”
지크의 말에 카단은 곧바로 고개를 들며 그를 바라봤다.
“이렇게 보게 되어 반갑긴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대화를 나누기 좋은 상황은 아니군. 벨리드가 보내서 왔다고?”
“네. 도시 라다메스의 생존자 그룹을 구출했으며, 그들을 데리고 더글라스로 향했습니다.”
이어진 카단의 말에 막사 안에 있던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도시 라다메스가 점령당했다는 말에 다들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어서 더글라스에서 지원군을 올 테니, 그때까지 마족들을 막아달라는 말을 전해달라 했습니다.”
카단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지크가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내가 있는 이 방어선이 뚫릴 걱정을 할 정도라면…. 성벽 너머로 몰려오는 놈들이 꽤 강한 녀석들인가 보군.”
가디언 다음의 강자라고 불리는 지크 그림발트와 그가 이끄는 콜린퍼스 기사단.
왕국 5대 기사단이 지키는 서쪽 방어선이 뚫릴 것을 걱정할 정도의 적이라는 뜻일까?
지크가 혀를 차며 한숨을 내뱉더니, 이내 카단을 바라봤다.
“자네도 이곳을 지키러 왔다고 했지?”
부드럽지만 묵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카단은 몸을 바로 세우며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난 네크로맨서를 따로 지휘해본 적이 없다.”
지크는 엄격해 보이는 얼굴에 미소를 그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자네는 자유롭게 움직이며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주게.”
* * *
전장에서 네크로맨서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저기 네크로맨서님! 이쪽 성벽도 무너졌습니다!”
“네크로맨서님 저쪽 성벽도 복구해야 합니다! 부탁드릴게요!”
“네크로맨서님!”
성벽 곳곳에서 카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카단은 재빨리 성벽 위를 뛰어다니며 보수가 필요한 성벽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촤라라라라라라!
뼈를 이용해 부서진 성벽 앞에 또 다른 벽 하나를 만들어냈다.
“임시방편일 뿐이지만, 없는 것보단 안전할 겁니다.”
촤라라라라락!
곳곳에서 날아오는 마족의 마법과 거대한 바위들.
성벽을 지키는 마법사들만으로는 그 모든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오러를 다룰 수 있는 자들도 나서서 날아오는 마법과 바위들을 막아내긴 했지만, 모든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던 모양.
콰아아아아앙!
“제기랄! 저쪽 성벽도 부서졌다! 부상자 챙기고, 곧바로 보수 작업 들어가!”
요격하지 못한 바위 하나가 또다시 성벽을 부쉈고, 병사들은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이러다간 끝이 없겠는데.’
열심히 보수를 하고 날아오는 공격을 요격했지만, 이대로 가다간 인간들이 먼저 지치고 말 것이다.
“제기랄 별동대는 뭐 하고 있는 거야? 투석기라도 좀 부수던가! 바위 던져대는 괴물이라도 죽이던가!”
“이 멍청아! 저길 봐! 저렇게 마족이 바글바글하잖아. 별동대라고 해서 쉽게 투석기를 부술 수 있겠냐?”
물론 인간들도 당하고만 있는 건 아니었다.
투석기를 이용해 성벽 뒤에서 바위를 날리며 대응했고, 별동대를 꾸려 마족의 뒤를 치는 작전도 수행 중이었다.
‘마족 녀석들이 쉽게 접근하지 않아. 멀리서부터 말려 죽일 생각인가?’
카단은 보수 작업을 도우며 성벽 너머로 보이는 마족 군단을 바라봤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들에게서는 검붉은색 기운이 불길하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오히려 좋아. 지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다.’
마족들은 쉽게 전진해오지 않았고, 이는 지원군을 기다리는 저항군으로서는 긍정적인 상황.
“저, 저건 뭐야!”
그때 누군가가 허공을 가리키며 외쳤다.
“마족인가?”
“뭐야? 꼬마애잖아?”
“어, 어떻게 하지? 쏴야 하나?”
그가 가리킨 곳엔 오렌지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날아오는 루나가 보였고.
“잠깐만요. 아군입니다.”
카단은 재빨리 활을 든 궁수들과 마나를 활성화한 마법사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루나가 마법이나 화살 따위에 당하진 않겠지만, 그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다.
“카단! 다녀왔어!”
톡.
루나는 성벽 위로 가볍게 착지하며 반갑게 웃어 보였다.
“고생했어. 어때? 저쪽 상황은?”
카단이 가볍게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조심스레 물었다.
“좋진 않아. 대부분 상급 마족들이야. 순간이지만 마계에 다녀온 기분이었어.”
“저 많은 놈들이 대부분 상급 마족이라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상급 마족들의 수가 저렇게 많아진 걸까?
“대부분 마족화 된 인간들이고, 아직 불안정한 놈들도 있는데, 얕볼 수는 없어. 게다가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은 최상급 마족 같아.”
이어진 루나의 말에 카단은 헛웃음을 지으며 성벽 너머를 바라봤다.
‘상황이 좋지 않은데?’
과연 더글라스에서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최상급 마족도 마족화가 된 인간이야?”
“응. 꽤 강해 보였어. 분명 인간일 때도 상당히 강한 인간이었을 거야.”
최상급 마족이 이끄는 상급 마족 군단이라니.
서쪽 방어선을 지켜낸다고 하더라도 저항군 쪽의 피해가 상당할 것이다.
그것도 희망회로를 돌렸을 때 가능한 일이지, 지금 당장의 상황은 저항군에게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저 녀석들이 알아서 시간을 끌어주길 바라야 하는 건가?’
방어선을 지키는 저항군의 수도 많고, 콜린퍼스 기사단이라는 강력한 병력도 존재했지만,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혹시 3년 전에 봤던 그 여우 가면을 쓴 마족만큼 강한 놈이야?”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무시할 수는 없어. 지금의 너는….”
말을 전하던 루나가 잠깐 말을 끊더니, 카단의 눈동자를 깊이 바라봤다.
“이길 수 없어.”
카단이 이길 수 없는 상대.
‘거미 가면을 썼던 녀석쯤이라면 어떻게든 해봤을 텐데.’
최상급 마족들 사이에서도 등급은 존재했다. 거미 가면을 썼던 마족은 카단이 상대하기에 상성도 좋았으며, 약한 쪽에 속했다.
루나가 단호하게 이길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카단이 걱정되어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냉정한 판단 끝에 내린 결론.
카단은 상급 마족을 이끌고 전쟁하러 온 최상급 마족을 이길 수 없었다.
“고마워. 루나. 어차피 이곳에 나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아무래도 이번 전쟁에서 카단의 역할은 서포트 정도일까?
그 역시도 상관없었다.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성벽을 지키는 것.
‘텔레포트 마법이 있으니,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카단은 우선 이 사실을 보고해야겠다는 생각에 재빨리 걸음을 옮기려 했다.
“어? 저, 저기! 마족 진영에서 누가 걸어 나오는데?”
그때 병사 중 하나가 성벽 너머를 가리키며 외쳤고, 사람들이 동시에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다그닥, 다그닥.
마족 진영에서 홀로 성벽을 향해 다가오는 마족은 말을 탄 기사처럼 보였다.
고요해진 전장 속 겁 없이 홀로 걸어 나오는 모습에서 말로 표현 못 할 압박감이 느껴졌다.
말을 타고 다가오던 기사는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멈춰 세웠고.
툭!
이내 말 등에 실었던 무언가를 성벽 쪽을 향해 집어 던졌다.
“저, 저건…. 막시무스 경?”
“별동대를 이끌고 마족 진형으로 가셨다고 들었는데?”
“막시무스 님은 7성의 기사야! 이, 이렇게 쉽게 돌아가실 리가 없어!”
말을 탄 기사가 던진 건 ‘막시무스’라는 기사의 시체였다.
성벽 앞에 외롭게 누워있는 막시무스의 시체를 본 병사들이 경악했고, 몇몇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말을 탄 기사가 성벽을 향해 말했다.
“풋내기 막시무스를 보낸 것으로 보아, 이 성벽은 콜린퍼스 기사단이 지키고 있나 보군.”
마나를 실은 목소리여서일까? 작게 내뱉는 말이었지만, 성벽 너머에 있는 이들 모두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지크 그림발트! 오랜만에 검을 맞대보는 건 어떠한가?”
그의 도발에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이 술렁거렸다.
툭!
그때 누군가가 성벽 아래에서부터 단숨에 성벽 위로 뛰어 올라왔다.
지크 그림발트.
성벽 위에 선 그가 분노 섞인 눈빛으로 말을 탄 기사를 내려다보며 검을 뽑아 들었다.
“왕국의 검이었던 녀석이 추악한 마족의 개가 되었구나. 설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