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0화
설리반.
그의 이름이 들리는 순간, 성벽 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 설리반이라면….”
“5대 기사단 중 하나인 크레이튼 기사단의 기사단장이잖아?”
홀로 말을 타고 와 성벽을 향해 도발하는 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왕국의 검이라 불렸던 5인 중 하나. 설리반 카시미르였다.
“크레이튼 기사단은 전부 마족이 되었다고 했었지?”
“설마 설리반과 그의 기사단이 마족이 되어 이곳에 올 줄이야.”
“이제 서쪽 방어선은 어떻게 되는 거지?”
설리반. 그의 이름만 들었을 뿐인데,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 모두가 겁에 질리고 말았다.
‘5대 기사단의 기사단장이라면 분명 강할 수밖에 없겠지. 게다가 지금은 마족의 힘까지 개화한 상태….’
분명 설리반은 기사단장 시절보다 훨씬 강해진 상태일 것이다.
‘말려야 한다. 도발에 넘어가선 안 돼.’
카단은 당장이라도 뛰어들 준비를 하며 성벽 위에 선 지크 그림발트를 바라봤다.
그는 분노에 찬 얼굴이었고, 검을 뽑아 든 그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지크. 자네도 마족의 힘을 받아들이는 게 어떠한가?”
찬 바람이 부는 고요 속, 설리반이 히쭉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힘을 받아들이는 순간, 평생 넘어설 수 없다고 여겼던 그 벽을 넘어설 수 있었다.”
“욕망에 사로잡힌 개가 되어 사느니, 왕국의 기사로서 영광스러운 죽음을 택하겠다.”
그러나 지크 그림발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제안마저도 자신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듯 지크의 표정은 불쾌함으로 가득했다.
“안타깝군. 이 힘을 받아들인다면 자네도 가디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텐데.”
설리반은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고, 다시 비릿한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려와라. 그 영광스러운 마지막을 내 손으로 완성해주지.”
설리반이 말에서 내려오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설마 명예를 들먹이는 기사가 겁에 질려 성벽 뒤로 숨는 건 아니겠지?”
이어진 도발에 병사들이 수군거렸고, 사람들의 시선은 지크 그림발트를 향했다.
“단장님! 안 됩니다!”
“더러운 도발에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함정입니다!”
“만약에라도 단장님이 당하신다면 방어선은 끝입니다!”
그러자 콜린퍼스 기사단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재빨리 지크에게 달려가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
“지원군은 아직인가?”
지크는 살짝 고개만 틀어 가장 가까이 보이는 기사에게 물었다.
“네. 아직 소식은 없습니다.”
“벨리드 쪽에도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하는 벨리드라면 재빨리 지원군을 데려올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지원군은 물론 서쪽 방어선 어디에도 포탈이 열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벨리드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원군을 보내올 것이다.’
지크 그림발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려 기사단을 바라봤다.
“지원군은 올 것이다. 그러니 내가 성벽 아래로 내려가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겠다. 그게 피해를 최소화하는 일이겠지.”
“단장님!”
“위험합니다!”
기사들은 절박한 목소리로 지크를 말렸다.
콜린퍼스 기사단의 기사들은 지크 그림발트의 강함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크의 등을 바라보며 늘 전장에 나섰던 기사들이 그의 강함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상대는 설리반.
지크와 같은 5대 기사단의 기사단장이었으며, 지금은 마족의 힘까지 흡수한 상태.
도저히 지크의 승리가 그려지지 않았다.
“나도 알고 있다. 3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이기는 것은 힘들겠지.”
지크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기사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해서 지켜야 할 것을 등지고 도망칠 수는 없지.”
고맙게도 설리반이 먼저 도발하며 대규모의 전쟁이 아닌 대장들의 전투로 이어가려 했다.
알아서 시간을 벌어주겠다는데, 거부할 수는 없었다.
“크리스.”
지크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이를 악물고 서 있는 크리스를 바라봤다.
“네. 단장님.”
“만약에라도 내가 죽는다면 이 전쟁의 지휘권은 네가 잡도록 해. 부단장이던 막시무스도 죽었으니, 제일 연장자인 네가 단장이 돼라.”
“하, 하지만!”
“만약. 만약이라고 했지, 죽는다고는 안 했다.”
지크가 자상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몸을 돌려 성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재밌게 놀다 오마.”
탁!
그 말을 끝으로 지크가 성벽 아래를 향해 뛰어내렸다.
* * *
도시 더글라스 근처 혁명단 베이스 캠프.
거대한 포털에서부터 벨리드와 쟌이 넘어왔다.
“다들 무사하십니까?”
벨리드는 포탈에서 빠져나오는 즉시 먼저 보냈던 도시 라다메스의 생존자들을 살폈다.
쟌은 재빨리 인원수를 확인했고, 이내 벨리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벨리드 님. 모두 넘어왔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할 일은 생존자들을 도시 더글라스로 데려다주고, 지원군을 요청하는 것.
“쟌. 곧바로 출발하죠.”
벨리드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뒤를 돌아 포탈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가 포탈을 닫기 위해 마나를 활성화하는 순간.
슉!
포탈 너머에서부터 날카로운 검이 내질러졌다.
‘뭐?’
갑작스러운 공격에 벨리드가 재빨리 뒤로 물러났고.
“이야….”
남자 하나가 천천히 포탈을 넘어오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늦을 뻔했어. 포탈이 닫히기 전에 넘어올 수 있어서 다행이야.”
남자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캠프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봤다.
“캬! 여긴 먹잇감이 잔뜩 있네? 이거 횡재했는데?”
남자는 입맛을 다시며 사람들을 바라봤고, 이내 즐겁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누구냐!”
쟌이 재빨리 화살을 꺼내 겨누며 묻자, 생존자 캠프를 지켰던 병사들도 재빨리 무기를 꺼내 들었다.
“누구긴.”
스릉!
“적이지.”
남자는 곧바로 검을 뽑았고, 그의 검에선 마족의 힘을 상징하는 검붉은 오러가 일렁였다.
“마, 마족이다!”
“마족이야!”
그를 본 생존자들이 겁에 질려 외쳐대자, 혁명단 베이스캠프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쟌! 병사들과 함께 생존자들을 지키는 데 집중하세요!”
벨리드는 재빨리 외치며 마나를 활성화했다.
‘제길. 안일했어. 마족이 도대체 어떻게 포탈을 넘어올 수 있었던 거지?’
벨리드가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자, 남자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봐, 너 불멸의 불꽃 맞지? 요즘 같은 때에 텔레포트 관련 마법을 자유롭게 쓰는 걸 보면 맞겠지.”
벨리드는 남자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생각을 이어갔다.
‘분명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만약 이 마족이 생존자 캠프에 숨어있거나, 근처에 있었다면 함께 있던 루나가 못 알아차릴 리 없었다. 분명히 마족의 냄새를 맡고 경계를 하거나, 그 냄새를 쫓아 마족을 찾아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마족이 갑자기 나타날 수 있었던 걸까?
“아? 내가 어떻게 온 건지 궁금한 거야?”
남자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마나 감지 능력도 좋고, 상상 이상으로 빠르거든.”
남자는 도시 라다메스 근처를 떠돌며 단순히 정찰을 돌고 있었고, 이내 먼 숲속에서부터 큰 마나의 파동을 느꼈다고 했다.
“그래서 냅다 달렸지. 먹잇감이 있겠구나 싶어서. 그랬더니 오잉? 포탈이 열려 있네?”
그가 생존자 캠프에 도착했을 땐, 인간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포탈이 닫히려는 듯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을 뿐.
“이걸 그냥 지나칠 수가 있나? 인간의 냄새가 진동하는데, 그래서 바로 넘어왔지.”
남자는 현란한 손짓과 함께 어떻게 포탈을 발견하고, 포탈을 넘어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설마 포탈을 넘어올 줄이야.’
벨리드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주변을 살폈다.
‘도시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아. 어떻게든 이 녀석을 여기서 막아야 해.’
더글라스는 저항군들의 기지.
마족 하나가 쳐들어온다고 해서 큰 피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발 빠른 마족.
만약 더글라스의 정보를 가지고 다시 마족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면 이곳의 정보를 자연스레 건네주는 셈이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이 마족과 마주치는 힘없는 인간들은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터.
‘여기서 죽여야 한다.’
벨리드는 생각을 끝내며 곧바로 허공에 화염구를 만들어 남자를 향해 날렸다.
“쟌! 사람들 데리고 피해요! 도시로 들어가서 지원 요청해!”
벨리드가 그렇게 외치며 사람들을 단체로 텔레포트 시키려 했다.
슉!
그러나 마법을 사용하기도 전에 벨리드의 눈앞으로 날카로운 검날이 보였다.
콰당!
순식간에 자신을 향해 검이 휘둘러지자, 벨리드는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빨라.’
속도에 특화된 마족이라니.
아무리 텔레포트에 능한 벨리드라도 까다로운 상대였다.
“아무도 못 가. 너희는 전부 내 먹잇감이다. 움직이기만 해봐. 살아 있는 게 맛있지만, 죽여놓고 먹어도 맛은 있으니까, 죽일 거야.”
남자는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사람들을 가리켰다.
“아! 나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놈들은 도망쳐. 대신 잡히면 죽는 거다?”
남자의 말에 생존자들은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임이 멈춰지고 말았다.
“불멸의 불꽃. 너는 혼자 도망칠 수 있잖아? 너는 보내줄게.”
남자가 들고 있던 검을 혀로 핥으며 도발하듯 말했다.
‘혼자서 이 사람들을 전부 지키긴 힘들어.’
마법을 사용하기도 전에 거리를 좁혀올 정도로 재빠른 마족이었다.
‘나한테 집중하게 해야 해.’
만약 남자가 벨리드가 아닌 생존자들을 노리게 된다면, 오로지 생존자를 지키는 것에만 집중해야 할 것이다.
화륵!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공격을 이어나가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
벨리드는 재빨리 불로 만든 화살들을 남자에게 날렸다.
“이런 게 통한다고 생각해?”
그러나 남자는 여유롭게 화살을 피하며 벨리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슉!
남자는 이번에도 역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고, 빠르게 검을 내질렀다.
파앗!
벨리드는 반사적으로 블링크 마법을 사용해 거리를 벌렸으며, 동시에 남자가 밟고 있는 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콰아앙!
남자가 밟고 있던 땅에서부터 불꽃이 폭발했지만, “어이쿠!”
남자는 이번에도 여유롭게 몸을 날리며 마법을 피해냈다.
‘쯧. 사람이 너무 많아.’
화력을 자랑하는 마법사의 단점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자니, 아군에게 피해가 갈 것이 뻔했다.
그렇기에 화력이 약한 마법만으로 상대해야 했는데, 상대는 마족.
어쭙잖은 공격으로 쓰러트릴 수 있는 적이 아니었다.
“이거 어쩌나?”
남자. 아니, 마족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상황을 즐기듯 푸핫! 하고 웃어댔다.
“어쩌려고? 마법도 제대로 못 쓰는데 나를 어떻게 쓰러트릴 생각이야? 모르겠지?”
마족의 도발에 벨리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마나를 활성화했다.
“또 마법 쓰려고? 소용없다니까? 내가 여기 서 있으면 어쩌려고?”
마족은 히쭉히쭉 웃으며 겁에 질린 생존자 옆에 달라붙었다.
“내가 피하면 이놈이 죽는데?”
“사, 살려주세요….”
마족 옆에 잔뜩 겁먹고 서 있는 생존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하자, 마족은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나한테 말할 게 아니라, 불멸의 불꽃에게 말해야지.”
“네?”
“마법이 날아오면 난 도망갈 거야. 넌 여기서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면 안 돼. 움직이면 알지?”
마족이 검을 들어 생존자의 목을 겨누자, 벨리드가 공격 의사가 없다는 듯 양손을 들었다.
“항복이다. 그 사람은 놔줘.”
“항복? 마족한테 항복해서 뭐 하려고? 살려달라고?”
“내 목을 가져가면 네가 친애하는 마족들이 포상을 내리겠지. 내 목을 줄 테니, 사람들은 살려줘.”
벨리드가 이를 악물며 말하자, 마족은 키득키득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럼 자결해.”
“뭐?”
찰그랑!
마족은 허리춤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 벨리드 앞으로 던졌다.
“내가 다가갔다가 자폭 마법이라도 쓰면 어떻게 해? 네가 알아서 죽어. 그럼 이 중 절반 정도는 살려줄게.”
벨리드가 떨리는 손으로 단검을 집어 들자, 마족이 배를 붙잡고 미친 듯이 웃어댔다.
“영웅 짓 하기 힘들지? 사람들 죽을까 적이 눈앞에 있는데도 마법 한 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약속은 지켜라.”
벨리드는 마족의 비아냥을 무시한 채 단검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이내 그녀가 결심한 듯 단검을 양손에 쥐고 자신의 배를 향해 휘둘렀다.
그때!
쩌저적!
생존자들과 마족 사이에 거대한 얼음벽이 생겨났다.
“뭐야?”
마족은 당황한 듯 주변을 둘러보며 다시 오러를 활성화했다.
“뭐긴, 뭐야. 알비스, 네가 처리해.”
이내 얼음벽 너머에서 차가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응!”
누군가의 대답 소리가 들리더니.
콰릉!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