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폭 네크로맨서-161화 (161/186)

제161화

“늦어서 죄송해요. 교관님.”

푸른 머리칼의 여성이 벨리드의 옆으로 다가오며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하마터면 진짜 찌를 뻔했네. 고마워요. 블랑쉬.”

벨리드는 피식 웃으며 들고 있던 단검을 집어던졌다.

“고맙긴요. 저렇게 숲을 불태우셨는데, 어떻게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푸른 머리칼의 여성. 블랑쉬가 난감하단 표정으로 활활 타오르는 숲을 가리켰다.

따악.

그러자 벨리드가 손가락을 튕기며 숲을 불태우던 불을 순식간에 사그라들게 했다.

“이제 정말 숙녀가 되었네요? 뭘 먹었기에 그렇게 성숙해졌어요?”

“원래 성숙했습니다.”

블랑쉬는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혔고 괜히 차갑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저, 저 녀석 왜 이렇게 빨라?”

그때 어디선가 알비스가 달려오더니, 얼음벽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알비스. 잘 지냈어요?”

“어? 교, 교관님! 안녕하세요!”

“알비스도 꽤 듬직해졌네요?”

“아, 아닙니다! 아직 부족해요.”

알비스가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 이럴 때가 아닙니다. 저 마족 녀석 도대체 뭐죠? 마법으로 맞추기가 너무 힘들어요.”

알비스가 몇 번이나 벼락을 뿌려댔지만, 처음 기습 공격 외에는 맞추지 못했다고 했다.

벼락을 피해 다닐 정도라면 도대체 얼마나 빠르다는 걸까?

“제가 처리할게요. 와줘서 고마워요. 알비스는 생존자들을 챙겨주시고. 블랑쉬?”

“네.”

“저 마족 녀석 좀 가둬주시겠어요?”

“어렵지 않죠.”

블랑쉬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었고.

쩌저저적!

동시에 마족과 생존자들을 갈라놨던 얼음벽들이 크기를 키우며 변형하더니 이내 거대한 상자 형태를 이루었다.

“뭐야! 이깟 얼음으로 날 가둬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

얼음벽 너머로 분노한 마족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블랑쉬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벨리드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어요. 얼음벽도 쉽게 부서지지 않을 겁니다.”

얼음벽을 이용해 마족을 가둬놓았으니, 이제 사냥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

“고마워요. 역시 얼음 계열의 마법사는 귀하네요.”

“텔레포트 마법을 자유롭게 구사하시는 교관님이 더 대단하시다는 건 아시죠? 문 따로 만들어 드릴까요?”

“괜찮아요. 얼음벽 유지만 잘 부탁드릴게요.”

“마법 실컷 쓰셔도 부서질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블랑쉬의 대답을 들은 벨리드가 피식 웃으며 곧바로 블링크를 이용해 얼음벽 너머로 사라졌다.

“알비스.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생존자들 챙겨.”

벨리드가 사라지자, 블랑쉬는 차가운 표정으로 알비스에게 말했고.

“어? 어! 알았어!”

블랑쉬에 말에 알비스가 화뜰짝 놀라며 재빨리 생존자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홀로 남은 블랑쉬는 팔짱을 끼며 여유롭게 거대한 얼음벽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교관님. 많이 화나셨네.”

* * *

“이렇게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는 것도 5년 만이로군.”

설리반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으며 천천히 힘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달라졌다. 내가 알던 녀석이 아니야.’

그런 설리반과 마주 보고 선 지크 그림발트가 속으로 혀를 차며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적어도 가디언급인가?’

마주 선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 결투의 승패를.

만약에라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설리반이 힘을 개방한 순간 목을 조르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고,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이 나이에 이런 긴장감이라니. 오랜만이군.’

두려움이 증폭되며 손발이 떨려왔지만, 그의 얼굴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걸렸다.

“명예로운 기사들의 결투라고 생각하지 마라. 이건 추악한 마족을 사냥하는 기사의 전투다.”

화악!

지크 그림발트가 오러를 활성화하자, 그의 주변으로 강한 바람이 불었다.

“이길 수 없다는 건 잘 알 텐데 꽤 호기롭군.”

“지킬 것이 있다면 패배가 확실하더라도 검을 드는 것이 기사다.”

“자네의 죽음은 이 전쟁의 끝을 의미하게 될 텐데? 지킬 수 있는 것조차 지키지 못하게 될 걸 알고 있겠지?”

“쉽게 당하진 않을 거다.”

어차피 서쪽 방어선을 지키는 이들 중 설리반을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검을 맞댈 수 있는 자는 지크가 유일했으며, 다른 이들의 힘을 합친다고 한들 승리를 그릴 수는 없었다.

파앗!

지크와 설리반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쩌어어어엉!

검과 검이 부딪히는 순간, 거대한 빙산이 갈라지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충격파 때문인지 두 기사가 밟고 있는 땅이 파였고, 성벽까지 강풍이 불어왔다.

‘8성을 넘어선 자들의 전투….’

강풍을 막기 위해 두 팔로 얼굴을 가린 카단이 혀를 둘렀다.

검끼리 맞닿았을 뿐인데, 온몸의 뼈가 짜릿함을 느낄 정도의 충격파가 만들어지다니.

꽈앙! 꽈아아앙!

이 소리가 과연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맞을까?

쇠와 쇠를 부딪치는 것만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굉음들이 이어졌다.

“도, 도대체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거야?”

“지, 지크 님이 이기고 계신 건가?”

“모르겠어.”

일반 병사들의 눈으로는 두 기사의 전투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아마 그들의 눈엔 거대한 오러 소드가 빠르게 휘둘러지는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역시 지크 님이 밀리신다.”

“마족의 힘을 받아들인 설리반이라니. 저 괴물을 어떻게 쓰러트리지?”

그러나 특정 영역에 도달한 이들은 두 기사의 전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1초에 수십 번씩 바뀌는 판단.

그에 따라 달라지는 변칙적인 움직임.

그리고 조금씩 밀려나는 지크의 모습까지도.

“단장님이 위험한 상황에 부닥치면 곧바로 달려든다. 다들 준비해.”

인상을 쓴 채 전투를 지켜보던 크리스가 근처 기사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기사의 명예고 뭐고 없다. 상대는 마족이야. 어떻게든 단장님을 구해낸다.”

“예!”

목숨보다 귀한 게 기사들의 명예라지만, 이제 와 명예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차피 상대는 마족.

그들을 죽이고 왕국을 지켜내는 것이 기사의 명예를 더욱더 드높이는 행동이 될 것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기사들은 그 누구도 반박하지 않고 고요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만약 단장님이 돌아가신다면 그땐 아무도 나서지 마라.”

이어진 크리스의 말에 기사단은 그 누구도 답할 수 없었다.

모두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지닌 채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았다.

카단 역시 언제든 네크로맨시를 쓸 수 있도록 마나를 활성화해두었다.

만약에라도 지크가 패배한다면 곧바로 전쟁이 시작될 테니.

“루나 만약….”

“카단. 넌 나서지 마.”

카단이 무언가 말을 하려 하자, 옆에 있던 루나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너도 보면 알겠지?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나도 매한가지고.”

카단이 강해지며 루나 역시 본래의 힘을 더 많이 끌어올 수 있었다.

그녀 역시 3년간 놀기만 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루나 역시도 설리반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릴 순 없었다.

“이곳에 있는 인간들이 힘을 합쳐도 저건 못 죽여. 3년 전에 봤던 가디언들이라도 나타나면 모를까.”

“죽자고 달려들 생각은 없어.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지.”

쩌엉! 쩌엉!

카단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지크와 설리반의 전투는 이어지고 있었다.

“역시 자네와 검을 섞는 건 즐거워. 여전히 내 작은 버릇 하나까지도 기억하고 있다니.”

점차 인상이 찌그러지는 지크와 다르게 설리반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이 상황이 즐겁다는 듯 그의 검에는 망설임이라곤 담기지 않았다.

쩌어어엉!

공격의 주도권은 처음부터 설리반이 쥐고 있었으며, 지크는 이를 악물고 공격을 받아내기만 할 뿐이었다.

다행히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기만 할 뿐, 아직 승패가 갈릴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지금이라도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어떠한가? 오랜 친우를 잃고 싶진 않은데.”

설리반은 공격을 멈추더니, 천천히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여유로운 설리반과 다르게 지크는 어렵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와 함께 마족이 다스리는 리베라 왕국의 가디언이 되자. 나중엔 왕국을 넘어서 세계를 지배하는 거야. 멋지지 않나?”

설리반이 느긋하게 검을 움직여 지크를 겨눴다.

“난 콜린퍼스 기사단의 기사단장으로서 죽음을 택하겠다.”

“명예로운 죽음? 죽고 난 뒤에 명성이 무슨 소용이지?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게 사람이라지만, 결국엔 잊히기 마련이야.”

설리반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누군가 날 기억해주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 기사이기에 기사의 도리를 다할 뿐이지.”

지크는 남은 힘을 쥐어짜듯, 오러를 활성화하더니, 온몸에 오러를 둘렀다.

쩌적.

근육이 부풀어나자 몸을 덮고 있는 판금 갑옷에 조금씩 실금이 생겨났다.

“마지막에 말하는 게 고작 왕국 기사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기사도였나? 불쌍한 놈. 그 기사도가 죽음의 이유가 될 것이다.”

지크를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설리반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그와 동시에 지크가 땅을 박차며 설리반을 향해 달려들었다.

오러를 이용해 신체 능력을 강화했기 때문일까?

전투를 지켜보던 기사들도 순간 지크의 움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쉐에에에엑!

지크의 검은 허공을 찢는 소리를 내며 설리반의 목을 향해 휘둘러졌다.

푸른 오러와 검붉은 오러가 충돌했고.

서걱!

그와 동시에 무언가 베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묵이 내려앉은 전장.

이를 지켜보던 기사들과 병사들은 마른침도 삼키지 못한 채 상황을 살폈다.

솨아아아.

충돌로 인한 흙먼지가 점차 흩어지고, 검을 든 채 서 있는 두 기사의 인영이 보였다.

“어, 어떻게 된 거지?”

기사 중 하나가 속삭이듯 질문을 던졌지만, 그 누구도 그의 질문에 답해주지 않았다.

아니, 답할 수가 없었다.

툭….

입을 열려는 순간, 지크의 몸과 머리가 분리되었고.

“이 개자식이!”

그 죽음에 분노한 기사 몇몇이 성벽 아래로 뛰어 내려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승리를 자축하는 설리반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식한 콜린퍼스의 기사들이여. 단장의 죽음에 분노할 것이 아니라 그 희생을 되새기며 성벽 아래로 내려오진 말았어야지.”

패배는 너희가 자초한 것이다.

설리반은 그렇게 말하며 가장 앞서 달려오던 기사의 팔을 베어버렸다.

서걱!

순식간에 벌어진 일.

상상할 수 없는 실력의 차이에 분노에 눈이 멀었던 기사들도 멈칫하게 되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서걱! 서걱! 석!

설리반은 유유자적하게 전장을 돌아다니며 검을 휘둘렀다.

“끄아아아악!”

“커헉!”

그와 동시에 분노에 눈이 멀어 달려든 기사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죽음을 맞이했다.

“뭐, 이대로 끝나면 재미없지 않나? 너흰 나와 검을 섞기엔 너무 약한 존재들이다.”

성벽 아래로 내려온 기사들을 전부 처리한 설리반은 혀를 차며 천천히 말 위로 몸을 실었다.

설리반은 굳이 자기가 나설 필요가 없다며 등을 보이며 천천히 마족 진형을 향해 말을 타고 돌아갔으며.

성벽 위에 있던 이들은 설리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도 그 누구도 공격할 수가 없었다.

“저런 멍청이들.”

크리스는 허무하게 죽어간 기사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혀를 찼고, 이어서 저 멀리 보이는 마족 진형을 바라봤다.

“전투 준비! 마족이 몰려온다!”

크리스의 외침에 성벽 위에 있던 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활을 들어라! 사거리에 들어오면 모두 죽여버려!”

“마법사들은 가장 강한 마법을 준비해! 한 번의 공격으로 최대한 많이 죽여야 한다!”

“투석기를 준비해! 멍하니 있지 말고! 정신 차려! 전쟁은 이제 시작이야!”

기사단장의 허무한 죽음에 애도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이곳은 전장.

애석하게도 죽음이 자연스러운 곳.

방어선을 지키던 이들 모두가 눈물을 참아내며 전쟁을 준비했다.

‘아무리 마족의 힘을 얻었다고 해도 5대 기사단을 이끌던 기사단장이 이렇게 쉽게 당할 줄이야.’

카단은 이를 악물며 성벽 아래, 싸늘한 시체가 되어 버린 지크 그림발트의 시체를 바라봤다.

‘어?’

그때 카단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네크로맨서! 샬로트의 후계자여!

시체 앞에 선 검은 그림자가 애타게 카단을 부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