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네크로맨서가 이렇게 든든한 존재였나?’
서쪽 방어선의 총사령관이 된 크리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전장을 바라봤다.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불길한 기운을 내뿜으며 달려드는 마족 군단 앞을 막아선 언데드 군단.
“뭐야? 별것도 아닌 해골들은?”
“무시하고 돌격해!”
“자, 잠깐! 데스나이트 수가 왜 이렇게 많아!”
죽음을 거역하고 언데드로 되살아난 이들이 마족 군단의 전진을 멈추었다.
‘대충 봐도 대부분 상급 마족이다. 그런데 어떻게 막을 수 있는 거지?’
해골 병사들이 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당연하게도 상급 마족을 막아낼 수 없었다.
대신 마족 군단을 멈춰 세운 것은 다름 아닌 카단이 소환한 데스나이트 군단이었다.
게다가 그 데스나이트들을 이끄는 건 콜린퍼스 기사단의 전 기사단장이자 이제는 듀라한이 되어 되살아난 ‘지크 그림발트’.
처음엔 데스나이트로 마족들을 막아내긴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크리스와 콜린퍼스 기사단은 성벽을 내려가 전장에서 전투를 치를 작정이었다.
‘내려오지 않아도 된다더니, 도대체 얼마나 강해진 것이냐. 카단.’
아직도 3년 전 홀로 체력 훈련을 견뎌내며 연병장에 우뚝 서 있던 어린 카단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런데 이제는 홀로 전장에 우뚝 서 마족 군단을 막아내고 있다니.
‘도무지 믿어지질 않는군.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기에….’
카단의 잠재된 재능을 알고 있었고, 그가 샬로트의 아들이자 유일한 제자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폭발적인 성장은 역사 어디에도 기록된 적이 없을 터.’
죽음의 힘을 사용하는 자에게서 이상하게도 희망의 빛이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카단만 있다면 서쪽 방어선을 지키는 것은 물론 마족과의 지긋지긋한 전쟁도 끝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바보 같은 생각이군. 제자에게 미래를 맡기려 하다니.’
크리스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텐가! 궁수와 마법사들은 공격을 이어나가라!”
이윽고 크리스가 멍하니 전장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하, 하지만 네크로맨서의 언데드들이 전부 공격 범위에 들어와 있습니다.”
“궁수들은 물론 마법사들의 공격 역시 아군의 등을 치고 말 것입니다!”
마법사와 궁수들을 지휘하는 자들이 급히 다가와 물었고, 크리스는 고개를 돌려 전장 최후방에 서 있는 카단을 바라봤다.
그러자 카단이 그 시선을 느끼기라도 했다는 듯 성벽 쪽으로 몸을 돌려 큰 소리로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불사의 군단에게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거든요.”
마음 편히 공격해도 좋다. 카단은 방긋 웃으며 외쳤다.
그 말에 크리스가 늠름한 웃음을 지으며 지휘관들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공격해도 좋습니다! 공격하십시오.”
“예!”
“넵!”
크리스에게 다가왔던 지휘관들이 다시 재빨리 걸음을 옮겨 각자 위치로 되돌아갔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쏴라!”
“언데드들은 생각하지 마! 가장 강한 마법을 날려!”
수많은 고위 마법과 화살들이 전장을 향해 쏘아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마법과 화살들이 전장에 쏟아지며 곳곳에서 폭발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달그락! 달그락!
공격에 맞아 전투 불능 상태가 됐던 언데드들은 카단의 부름에 다시 몸을 일으켰고, 마족들은 경악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카단을 바라봤다.
“이 멍청이들아! 언데드 상대하지 말고 네크로맨서부터 죽이면 편하잖아!”
“말이 쉽지! 네가 해보던가!”
“데스나이트들의 연계 때문에 더 나아가질 못하겠어!”
인간의 모습을 한 마족들이 불평불만을 내뱉어댔다.
그도 그럴 것이 듀라한이 이끄는 데스나이트 군단의 위력이 대단했다.
얄밉게 치고 빠지는 것은 기본이었으며, 기회가 오면 연계를 통해 마족들을 죽여나갔다.
그뿐이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언데드이기 때문인지, 물인지 불인지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게다가 성벽 위에서부터 마법과 화살까지 피아 구분 없이 날아오니 마족들의 짜증 수치가 상승곡선을 그려댔다.
“비켜라!”
한참 마족군이 밀리고 있을 때, 뒤쪽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마치 바다가 갈리듯, 마족들이 양옆으로 비켜났으며, 그들이 만들어 낸 길 위로 말을 탄 기사들이 빠르게 달려왔다.
그들의 정체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듀라한 ‘지크 그림발트’였다.
“크레이튼 기사단….”
기사들의 정체는 설리반을 따라 마족의 힘을 받아들인 크레이튼 기사단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지크 단장님!”
가장 앞서 달려온 마족의 기사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기사의 예, 단장을 향한 예의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오만한 태도를 보아하니, 오드릭이로군.”
“아까 저희 단장님한테 추악한 마족의 개가 되었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지크 님께서는 고작 네크로맨서의 개가 되신 겁니까?”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투였지만, 지크는 큰 타격을 입은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변명하진 않겠다. 그러나 우린 적어도 기사가 되며 지키고자 했던 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 알량한 기사도 따위를 죽어서 말씀하셔봤자, 그 누구도 공감해주지 않을 텐데요?”
“공감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정의로운 기사였던 네 녀석이 그런 말을 내뱉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군.”
오히려 지크의 말에 마족 기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머리 잘린 몬스터가 되셨으니, 제가 시원하게 사냥해드리지요.”
마족 기사는 곧바로 무기를 뽑아 들더니 말에서 뛰어내리며 지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솨아아아악!
검붉은 오러를 품은 검은 매섭게 허공을 갈랐다.
제법 묵직하며 빠르게 휘둘러진 공격이었지만.
채애애앵!
마족 기사의 공격은 지크에 의해 허무하게 막히고 말았다.
“내가 비록 듀라한이 되었다지만, 너 같은 애송이한테 당할 정도로 약하진 않지.”
가볍게 검을 들어 공격을 막아냈던 지크는 한 손으로 머리를 꾹 누르며 마족 기사를 향해 발을 내질렀다.
퍼억!
갑작스러운 반격을 대비하지 못한 마족 기사는 발길질에 맞아 곧바로 뒤로 밀려났고.
서걱!
이어서 빠른 속도로 날아온 지크의 오러에 의해 팔이 잘려 나가고 말았다.
“크악!”
마족 기사는 믿을 수 없었다.
지크가 왕국의 검이라 불리며 최고의 검술 실력을 자랑하는 이들 중 하나라지만, 지금은 언데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듀라한이라지만 결국엔 언데드따위에 불과해! 그런데 어째서?’
마치 공략 불가능한 던전에서 던전의 주인과 마주한 듯한 공포를 느꼈다.
공포에 정신이 오염되었는 지, 팔이 잘려 나간 통증조차 점점 옅어졌다.
“듀, 듀라한이 이렇게 강할 리가 없어….”
현실을 부정하던 내면의 생각이 입 밖으로 내뱉어졌다.
그러자 지크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누가 듀라한이 되었느냐가 중요한 거 아니겠는가?”
그 말이 마족 기사가 들은 지크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서걱.
지크에게 달려들었던 마족 기사가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지자, 그와 함께 왔던 기사단 전부가 지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딜!”
그러자 뒤에서 지켜보던 데스나이트들이 빠르게 다가와 지크의 옆을 지켰고.
“마족이 된 크레이튼 기사단과 언데드가 된 콜린퍼스 기사단이라. 재밌군.”
지크는 자기 머리를 높게 들며 말을 이어갔다.
“마족의 개가 된 녀석들을 전부 처단하라!”
한편.
최후방에서 끝없이 언데드 군단을 되살리고 있는 카단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분명 상황은 좋게 흘러가고 있었다.
언데드 군단이 마족 군단을 몰아붙이고 있었으며, 언데드를 되살릴 때 사용할 마나 역시 충분했다.
어쩌면 이번 전쟁의 승리를 생각해도 좋을 정도의 상황.
그러나 카단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피라미들뿐이야.”
그때 옆에 서서 전장을 바라보고 있던 루나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런 것 같아. 상급 마족이라지만 이렇게 쉬울 리 없거든.”
일이 쉽게 풀린다면 긴장감을 풀지 말고 오히려 더 주의 깊게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
“웅. 진짜 강한 놈들은 아직 나서지도 않았어. 저 뒤에서 웃으면서 구경하고 있겠지.”
“의도가 뭘까? 곧바로 달려들어도 우리가 쉽게 막아내지 못할 텐데.”
의문이 들었다. 왜 약한 녀석들을 앞세워 공격하는 것일까?
단순한 힘 빼기 전략을 쓰지 않아도 최상급 마족의 힘을 동원한다면 빠르게 전쟁을 끝낼 수 있을 텐데.
“무언가를 기다리는 거겠지.”
“기다린다고? 마족의 지원군이라도 온다는 소리야?”
“그럴 수도 있고. 정확한 건 몰라. 단순히 즐거움과 오만함 때문에 오랜 시간 전쟁을 이어간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할 거야.”
루나가 일단 지켜보자는 듯 말하며 카단의 손을 토닥였다.
‘어쩌면 저들이 노리는 건 내가 힘이 빠지는 순간일 수도 있겠군.’
카단은 마족들이 원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마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으나, 해밀턴부터 시작해 모든 마족이 카단을 노리고 있는 상황.
어쩌면 이 전쟁에서 노리는 것이 단순히 서쪽 방어선을 무너트리는 것뿐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단이 나타난 이후 마족들에게 새로운 목표가 추가되었을 수도 있다는 불안한 생각이.
‘한 번 실험해볼까?’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지칠 줄 모르는 마족들과 애초에 체력이라는 단어가 필요 없는 언데드 군단의 전투는 끝을 모른다는 듯 이어지고 있었다.
“야. 언데드들의 회복 속도가 좀 느려진 것 같지 않아?”
“아까 부쉈던 해골 병사는 아직도 되살아나지 못하고 있어.”
“데스나이트들의 위력도 점차 줄어드는 것 같은데?”
마족들은 언데드들의 회복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졌다는 걸 파악하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질긴 네크로맨서였다. 도대체 마나가 얼마나 많은 거야?”
“혼자서 언데드 군단을 반나절 이상 유지할 정도의 마나라니.”
“그런데 왜 저 녀석을 생포하라고 했던 거지?”
마족들은 달려드는 언데드들을 하나씩 물리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몰라. 위에서 시킨 거니 우린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그럼 내가 보고하고 온다!”
마족 하나가 급히 땅을 박차며 어딘가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을 만들어라!”
“길을 만들어라!”
마족 진형 최후방 쪽에서 마족들의 외침이 들려왔고, 그와 동시에 다시 한번 바다가 갈라지듯 마족들이 양옆으로 빠르게 물러섰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멀리서부터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최후방 쪽에서부터 말을 탄 설리반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고생했다.”
설리반은 여유롭게 마족들이 만들어낸 길을 달리며 말했고.
“히랴!”
이내 속도를 높여 전장 깊숙한 곳을 향해 달려갔다.
“위, 위험해!”
그를 발견한 지크가 설리반에게 달려가려 했으나.
“이 앞은 못 지나가십니다.”
설리반의 뒤를 따르던 마족의 기사들이 지크와 데스나이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기랄. 이 몸으로 이 녀석을 상대하긴 조금 힘들 것 같은데.’
앞서 죽였던 크레이튼 기사단의 기사들은 6성급에 머물던 신입 기사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앞을 막아선 기사들은 최소 7성급.
마족의 힘을 받아들였으니, 3년 전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니고 있을 게 분명했다.
즉 지크와 그가 이끄는 데스나이트 부대만으로는 그들을 쉽게 쓰러트릴 수 없다는 뜻.
지크가 인상을 쓰며 빠르게 어디론가 향하는 설리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설마….”
무언가 떠올랐는지, 지크가 인상을 찌푸리며 외쳤다.
“주군을 지켜라!”
그러나 그의 외침보다 설리반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
언데드 군단 최후방엔 데스나이트 급의 강한 언데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설리반의 질주는 멈출 줄 몰랐다.
달려드는 언데드는 무시하고 오로지 카단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야 지친 모양이구나. 네크로맨서.”
이내 카단 앞에서 질주를 멈춘 설리반이 비릿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그의 말대로 카단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짙게 내려온 눈그늘만 보더라도 지금 그가 얼마나 지쳐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역시 나를 노렸던 거네.”
“너에게 선택 권한 따위는 없지만, 내 넓은 아량을 베풀어주도록 하지.”
설리반은 말에서 내려오더니, 투구를 벗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따라오겠는가? 반쯤 죽은 상태로 따라오겠는가?”
제안받은 카단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상급보다 조금 더 강한 마족이 올 줄 알았는데, 하필 이 녀석이 직접 올 줄은 몰랐네.’
카단이 지쳤다는 사실을 알면 분명 마족 중 하나가 다가올 것 같다고 예상하였다.
그러나 마족 군단을 지휘하는 설리반이 직접 나타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뭐, 일단 어떻게든 버텨봐야 하나?’
카단은 그렇게 생각하며 옆에 떠 있는 검붉은 구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뭐지?”
순간, 카단을 바라보던 설리반이 미간을 찌푸렸고, 카단은 그런 설리반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정말 지쳤다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