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모두가 잠든 새벽.
스륵.
카단이 조심스레 막사를 빠져나왔다.
‘다들 잘 지내고 있었구나.’
전투가 끝난 후부터 블랑쉬, 알비스와 오랜 대화를 나눴다.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부터 시작해, 아카데미 동기, 선배들의 이야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3년간 쌓인 이야기를 하려니, 하루라는 시간은 부족하기만 했다.
새벽이 되어서야 피곤함을 이기지 못한 블랑쉬가 먼저 막사를 떠났고, 알비스도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카단은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성벽 옆을 걷기 시작했다.
‘대충 봐도 많이 성장한 것 같던데, 실전에서는 어떨지 궁금하네.’
알비스와 블랑쉬. 두 사람 모두 3년 전과 달랐다.
외형도 달라졌으며, 마나의 기운 역시 3년보다 더 맑고 진해진 느낌.
제대로 전투하는 모습을 보진 못했지만, 어느 정도인지 예상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카단?”
한참을 거닐던 도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버트 님?”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성벽 위였고, 그 목소리의 주인은 가디언 중 하나인 길버트였다.
“위대한 왕국의 수호자. 가디언 길버트 님을 뵙….”
“됐네. 굳이 그렇게까지 예를 차리지 않아도 괜찮아.”
카단이 예를 갖춰 인사하려 하자, 길버트가 손을 내저으며 그의 말을 잘라냈다.
“아, 네. 왜 안 주무시고 나와계십니까?”
“잠깐 생각 좀 하고 있었지. 괜찮으면 올라오겠나?”
길버트가 손짓하자, 카단은 곧바로 계단을 통해 성벽 위로 올라갔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카단이 묻자, 길버트가 잠깐 생각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적들에게 시간을 더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네.”
“강한 적들이 많아져서 그런 겁니까?”
그 질문에 길버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뱉었다.
“마족은 성장 속도가 빨라. 평범하던 인간도 마족이 되는 순간 일반 병사는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다네.”
“제가 알기로 평범한 인간이 마석으로 인해 마족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최소 3년입니다.”
“그걸 자네가 어떻게….”
“뱀파이어에게 들었습니다.”
“자네의 그 어린 사역마 말이로군. 모습과 다르게 나보다 나이가 많겠지만. 허허.”
길버트가 잠깐 헛웃음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올해부터 마족의 수가 급증한 느낌이 들더군.”
3년 전에는 왕국 곳곳에 숨어 있던 마족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전쟁이 시작됐다.
인간들의 많은 희생과 죽음이 있었던 만큼 3년간 전투 끝에 많은 마족을 죽여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수가 줄어든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을 치를 때마다 마족의 수가 몇 배는 더 많아진 것 같은 위화감이 들었었다.
“이대로 가다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왕국을 마족들에게 넘겨주게 되겠군.”
강한 마족은 점차 늘어나는 반면, 인간들은 마족을 막아낼 병력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영웅 아카데미 출신의 생도와 교관들이 성장하며 명성을 날리고야 있지만, 그것도 한계는 존재했다.
그들이 최상급 마족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다.
3년이 지났지만, 기껏해야 상급 마족을 상대하는 것이 전부.
“마족들의 힘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커지기 전에 이 전쟁을 끝내야 하는데….”
“최상급 마족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별로 없다는 게 문제라는 거겠죠.”
“그렇지. 왕국 5대 기사단의 기사단장들도 최상급 마족을 상대하는 데 한계가 있어.”
카단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콜린퍼스 기사단의 기사단장인 지크 그림발트도 최상급 마족이 된 설리반에게 손쉽게 패배하지 않았던가?
“최상급 마족을 상대하려면 최소 8성에 가까운 7성 이상이어야 하네. 이제 우리 왕국에 그런 자들이 얼마 남지 않았어.”
더 늦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 한다. 길버트는 그렇게 말하며 혀를 찼다.
“그렇군요.”
“그래서 말인데.”
길버트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카단을 빤히 바라봤다.
카단은 눈을 끔뻑이며 이어질 말을 기다릴 뿐, 그 어떤 질문도 던지지 않았다.
“자네. 나에게 훈련을 받아볼 생각 없나?”
“네?”
“벨리드에게 들었네. 벽에 막혀 있다고.”
“아, 맞습니다.”
“내가 조금은 도움이 될까 싶어 제안하는 거라네. 우린 한 명이라도 더 강한 사람이 필요하니, 도움을 주려는 것이고.”
길버트의 제안에 카단이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렇다고 내 정식 제자가 되라는 건 아닐세. 나 역시 네크로맨서를 키워본 적은 없어.”
다만 벽을 넘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을 뿐이다.
길버트는 그렇게 말하며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의 친구들 역시 내 도움을 받고 많이 성장했다네. 뭐, 그들은 마법사였으니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겠지.”
“어떤 걸 도와주신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카단이 조심스레 질문하자, 길버트의 미소가 조금은 비장해진 듯 했다.
“벽을 넘는 법이랄까?”
* * *
서쪽 방어선 전투가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도대체 뭘 하는 걸까?”
“그러게. 벌써 일주일째인데….”
성벽 너머를 바라보던 병사들은 혀를 내두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카단. 괜찮을까?”
“길버트 님이 저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건 처음 보는데?”
알비스와 블랑쉬 역시 걱정 어린 표정으로 성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고.
“저런 훈련법은 또 처음 봅니다.”
“그러게요. 이렇게 보니 마치 카단이 고문받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영웅 아카데미의 교관 출신인 크리스와 벨리드 또한 신기하다는 눈으로 성벽 너머의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앙!
성벽 너머에서는 크고 작은 폭발들이 일어났고, 카단은 연달아 이어지는 폭발을 피해 열심히 도망치고 있었다.
“단순히 공격을 막아내거나 피하기만 하면 되는 훈련인데, 그게 어려운가?”
크고 작은 폭발의 원인. 길버트는 여유롭게 팔짱을 낀 채로 카단에게 말을 걸었다.
“크윽!”
카단은 대답할 시간조차 없었다.
카단을 향해 날아가는 마법의 수만 해도 수십 개.
진심으로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카단은 대답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열심히 움직여야만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훈련일까?’, ‘무슨 도움이 될까?’ 이런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잠깐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곧바로 위협적인 마법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꽤 적응된 것 같으니, 속도를 높이겠네.”
따악!
길버트가 손가락을 튕기자, 성벽 너머 곳곳에 떠 있던 수정구에서부터 빠른 속도로 마법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거나 막아내길.”
콰앙! 콰앙! 콰아아앙!
마법이 빠르게 발사되자, 카단은 더욱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촤르르륵!
뼈 방패를 이용해 공격을 막아내거나, 몸을 날려 공격을 피했고.
“망자의 길.”
정말 위급한 상황엔 망자들의 세계에 몸을 숨겨 겨우겨우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후….”
망자들의 세계에 들어온 카단은 지쳤다는 듯 곧바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같은 훈련만 일주일째 반복이라니.”
벽을 넘게 해주겠다는 길버트의 제안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반가운 제안이었고, 기쁜 소식이었다.
그러나 제안을 받은 다음 날이 되어서부터 카단은 매일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가야만 했다.
길버트는 ‘자비’라는 단어를 잊은 듯 훈련을 이끌었고, 카단의 마나가 바닥나 네크로맨시를 사용할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훈련은 종료됐다.
다행이라면 전장이었던 성벽 너머에는 수를 셀 수 없이 많은 영혼의 구체가 존재했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카단은 지금쯤 막사에 드러누워 제대로 몸도 가눌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힘들어 죽겠네. 그래도 훈련 도중에는 사용하지 않기로 했으니….’
물론 체력과 마나가 바닥날 때마다 영혼의 구체를 흡수한 건 아니었다.
체력과 마나가 바닥나고 회복되는 것 역시 훈련의 일종이라 생각하며 최대한 영혼의 구체를 멀리하려 했다.
이틀. 혹은 삼 일에 한 번.
정말 죽겠다는 생각이 들 때만 영혼의 구체를 흡수하며 버티기로 결정했고, 그 결심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과의 약속.
3년간 8성의 벽 앞에서 무너졌기에 카단은 쉽게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다.
‘슬슬 돌아가야겠네. 여기 있으면 체력은 회복되어도 마나는 미친 듯이 빠져나가니까.’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된 카단은 망자들의 세계를 벗어나 서쪽 방어선으로 이동했다.
파앗!
망자의 세계에서 돌아온 순간, 사방에서 마법들이 쏟아져 왔다.
촤르르르륵!
카단은 급하게 마나를 활성화해 돔 형태의 뼈의 벽을 세웠고.
‘블링크.’
착용하고 있는 반지를 이용해 뒤쪽으로 순간 이동을 했다.
“첫날보다 많이 좋아졌네요. 체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순발력과 상황 판단력도 좋아졌고.”
길버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그러자 수정구에서부터 6성 이상의 마법들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요!”
5성 마법까지는 어떻게든 막거나 피해낼 수 있었다.
뼈의 벽이나 뼈 방패만으로도 막을 수 있던 마법들이었으니까.
그러나 6성 마법부터는 달랐다.
총알이 날아오던 전장에 대포가 날아오기 시작했달까?
겨우겨우 피해내고 막아내도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공격.
완벽한 방어나 회피가 아닌 이상 데미지가 쌓일 수밖에 없는 마법들이 난사되었다.
아무리 길버트가 대마법사이자 가디언이라지만, 어떻게 이런 위협적인 마법을 쉴새 없이 퍼부을 수 있는 것일까?
카단은 이를 악물며 마법들이 날아오는 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촤르르르륵!
방어 마법을 사용하며 곧바로 땅을 박차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어?”
화륵.
그의 발밑에서부터 갑자기 불꽃이 일어나더니.
콰아아아아아앙!
마치 지뢰라도 밟은 듯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다행히 발밑에 급히 뼈 방패를 만든 후 블링크를 이용해 몸을 피했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슈욱!
블링크로 이동한 위치를 예상하였다는 듯 거대한 얼음 창이 카단을 향해 쏘아졌다.
카단은 이를 악물며 다시 손을 내밀어 마법을 사용하려 했다.
“아, 망했네.”
분명 두꺼운 뼈의 벽이 생성되어야 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마나 하트가 텅 비어버렸다는 허망함만이 카단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따악!
그 순간 다시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와 동시에 카단을 향해 쏘아지던 마법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길버트가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카단을 향해 걸어왔다.
“오늘도 고생했네. 푹 쉬고 내일 뵙도록 하지.”
“저기 길버트 님.”
카단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길버트를 향해 물었다.
“훈련은 언제까지 하는 겁니까?”
설마 8성이 될 때까지 이 무식한 훈련을 이어가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건 아니겠지?
카단은 기대 반 걱정 반을 담은 시선으로 길버트의 답을 기다렸다.
“언제까지라….”
길버트가 잠깐 대답을 멈추며, 어딘가를 바라봤다.
스윽.
길버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더니, 이내 검지를 이용해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 멀리 도시 라다메스. 자네가 혼자서 저곳을 되찾아 올 수 있을 때까지 이 훈련은 이어질 거라네.”
“네?”
“당연히 8성은 넘어야겠지? 물론 라다메스를 혼자 되찾아오려면 8성이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