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도시 라다메스.
유령 도시를 떠올릴 정도로 살벌한 고요함이 맴돌고 있었다.
-주인! 마족의 위치를 찾았습니다.
-다른 마족들은 보이지 않아요!
정찰을 다녀온 레이스들이 보고했고, 카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성문 너머를 바라봤다.
‘불사? 왜 불사라고 불리는 거지?’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강한 마족이어도 언데드가 아닌 이상 되살아나는 건 힘들다.
“이상한 점은 없었어? 환영 마법이라든지? 라이프 베슬이라든지.”
혹시 최상급 언데드인 ‘리치’처럼 생명력을 따로 담아 놓는 라이프 베슬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네! 무섭게 생긴 마족 말고는 보이는 게 없었어요!
레이스들은 고개를 저으며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방어력이 좋아서 그런 걸까?’
모르겠군. 카단은 고개를 저으며 전날 밤 라다메스를 다녀온 암살자에게 들었던 얘기를 떠올렸다.
-분명 심장에 화살을 맞혔는데, 멀쩡했어요. 이어서 머리에도 화살을 명중시켰는데 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당황해서 바로 도망쳤죠.
대부분 생명체의 약점인 심장과 머리를 노려도 멀쩡했다고 한다.
“마족이 언데드일 리는 없는데.”
죽은 자를 되살리는 카단도 마족만큼은 되살릴 수 없었다.
마족은 죽은 뒤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지기 때문에 시체를 남기지 않기 때문.
그렇다면 이 라다메스를 장악하고 있는 마족의 정체는 무언란 말인가?
“언제 들어가?”
카단이 고민하고 있자, 옆에 있던 루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잘 모르겠어. 녀석의 정체를 조금 더 파악하고 가고 싶은데.”
“예전에 우리가 처음 만난 최상급 마족 같은 게 아닐까?”
“다크 엘프 숲에서 만났던 마족 말하는 거지?”
“응. 어떤 공격이어도 신체를 불로 바꿔서 피해댔잖아?”
루나의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카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마법에 뛰어난 녀석일 수도 있지.”
바네사 플로리안 공작 부인.
불 마법에 능통했던 그 마족처럼 이 도시 라다메스를 장악하고 있는 마족 역시 뛰어난 마법사일 수도 있었다.
“당장 이곳에서 추측할 수 있는 정보는 이 정도뿐인 것 같네.”
카단은 혼잣말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진 직접 부딪히며 알아보는 수밖에.’
이내 생각을 정리한 카단이 성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루나. 가자.”
“응.”
성문을 넘어서자, 고요한 도시의 분위기에 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사람 냄새라고는 전혀 나지 않는 곳.
곳곳에 죽음의 기운이 느껴지는 폐허가 된 도시.
수많은 죽음의 기운을 느끼며 카단은 미간을 찌푸렸다.
-주인! 이쪽이에요! 도시 중앙에서 마치 주인님을 기다리는 듯 앉아있어요!
-저희가 안내하겠습니다!
레이스들의 안내를 받아 카단과 루나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고, 이내 도시 중앙 광장에 도착했다.
‘저 녀석인가?’
마치 귀족을 떠올릴 정도로 우아한 모습의 남자가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있었다.
금색의 장발.
심지어 머릿결도 좋아 보였으며, 신체 비율은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예술이라는 단어가 떠올릴 정도로 멋진 분위기를 풍기는 마족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이야.”
의자에 앉아있던 마족이 카단을 발견하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일어나서 말하는 그 모습조차도 그 어느 귀족보다도 귀족처럼 느껴졌다.
“카단. 조심해.”
루나는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며 마나를 활성화했고, 카단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전투를 준비했다.
‘확실히 8성이 된 이후부터 마나를 다루는 게 더 편해졌어.’
7성까지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 마치 마나가 신체 일부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레 움직여졌다.
손톱만큼의 마나만으로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마나의 농도 역시 진해졌다.
“성급한 성격이시군요. 오래도록 혼자만 지내서 심심했는데, 대화라도 좀 나누는 게 어떨까요?”
“마족과 나눌 대화는 없다. 모르는 게 아닐 텐데?”
“그럼 간단한 자기소개라도 하도록 하죠. 전 글라샤 율리우스라고 합니다.”
글라샤라 소개한 마족은 귀족처럼 예를 갖추며 카단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족 따위에게 정중하게 인사할 가치가 없었기에 카단은 그의 인사를 거절하듯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와, 이렇게 보니까 우리가 나쁜 놈들 같은데?”
그러자 옆에 있던 루나가 카단의 손등을 콕콕 찌르며 말했다.
예를 갖춰 인사하는 마족과 그를 무시하는 인간. 멀리서 본다면 카단을 악당으로 보는 이도 있지 않을까?
“까칠한 건 이해합니다. 뭐, 그래도 전 그쪽이 마음에 드니, 오래 대화를 나누고 싶군요.”
글라샤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
검붉은 마나가 손가락 끝에 맺혔고,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검붉은 마나가 허공에 남아 무언가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화륵!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카단의 주변으로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 죽음을 떠올릴 때 불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이글거리는 화염은 마치 살아 있는 듯 일렁거리며 카단을 위협했다.
달그락!
카단은 곧바로 주변에 해골 병사들을 일으켰고, 글라샤를 바라보며 답했다.
“난 해골이 떠오르네.”
7성과 8성의 차이는 해골 병사만으로도 확연히 드러났다.
해골 병사 전부 녹색 안광을 내뿜고 있었으며, 해골 주제에 미세하게나마 마나를 지녔다.
일반 해골 병사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나를 지녔기 때문인지, 마법을 준비하고 있는 해골 마법사들 역시 간간이 볼 수 있었다.
“네크로맨서. 당신이 위에서 말하는 그분이시로군요. 샬로트의 유산을 지닌 자.”
화륵!
글라샤의 말이 끝나자, 사방에 번진 불들이 말을 탄 기사처럼 형태를 바꾸더니 카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주군을 위해!”
그 순간 카단의 앞으로 데스나이트 앤서니가 나와 달려드는 불의 기사를 베어냈다.
앤서니를 시작으로 데스나이트들이 하나둘씩 소환되기 시작했으며.
“다시 전투인가?”
마지막으로 잘린 머리를 목 위에 강제로 붙잡고 있는 듀라한.
지크 그림발트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지크 경. 이번 상대는 하나입니다. 정확한 능력은 모르나, 확실히 강한 상대에요.”
카단은 듀라한을 향해 말했다.
“알겠네. 기사들은 내가 이끌도록 하지.”
지크는 그렇게 말하며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고, 데스나이트들 역시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데스나이트와 듀라한을 이렇게 빨리 소환할 줄이야. 듣기로는 7성이라고 들었는데, 설마 성장하셨나요?”
카단의 성장이 두렵다기보다는 반갑다는 듯 글라샤가 웃어 보였다.
아름다움이 떠오를 정도의 얼굴로 해맑은 미소를 지으니, 어쩐지 위화감이 들었다.
“카단. 내가 앞장설게.”
루나가 땅을 박차더니, 글라샤를 향해 달려들었다.
글라샤에게 향하며 루나의 몸에는 피의 갑옷이 입혀졌으며, 이어서 그녀의 손에 핏빛 너클이 생겨났다.
“말로만 듣던 뱀파이어. 역시 아름답군요. 당신이 고통받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합니다.”
글라샤는 다시 손가락으로 허공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고.
“어?”
순간 루나의 앞으로 거대한 창날들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환 마법에도 능통했던 것일까?
마법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냈다기보다는 거대한 창날을 어디선가 소환한 듯한 마법이 빠르게 구현되었다.
쿵! 쿵! 쿵! 쿵!
글라샤에게 달려들던 루나는 재빨리 방향을 틀어내며 하늘에서부터 쏟아지는 거대한 창날을 피해냈다.
그렇게 공격을 잘 피하나 싶었으나.
“역시 뱀파이어는 강하군요.”
글라샤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허공에 또 무언가를 빠르게 그리기 시작했다.
슈슈슈슈슈슉!
그러자 이번엔 사방에서 화살이 쏘아져 루나를 향했다.
촤라라라락!
그러자 그녀의 주변의 뼈로 만들어진 벽이 생겨나며 모든 화살들을 막아냈다.
“고마워. 카단.”
“이 정도쯤이야.”
뼈의 벽을 세운 건 당연하게도 카단이었다.
‘저 손가락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건가?’
카단은 해맑게 웃고 있는 금발의 마족. 글라샤를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정확히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그려내는 것만으로 불을 일으키고, 허공에 무기들을 소환해내다니.
그 순간, 불로 만들어진 기사들을 전부 쓰러트린 데스나이트 부대가 글라샤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우리 차례다!”
듀라한의 외침에 100 가까이 되는 데스나이트들이 글라샤를 향해 달려들었다.
“당신들에겐 관심 없어요. 고통을 모르는 존재들이잖아?”
글라샤는 피식 웃으며 허공에 무언가를 그려냈고.
쿠우우웅!
순간 투명한 무언가에 밀려나듯 데스나이트들이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아무것도 없었는데!”
“도대체 뭐가 우릴 밀어낸 거지?”
데스나이트들은 당황하며 밀려나지 않기 위해 땅에 발을 꽂아넣었다.
“전 둘에게만 관심이 있어요.”
글라샤는 히쭉 웃으며 다시 카단과 루나를 바라봤고. 그 순간.
서걱!
듀라한이 날린 오러가 글라샤의 팔 하나를 잘라냈다.
지크는 방심한 틈을 이용해 검에 오러를 담아 휘둘렀고, 찰나의 공격이 먹혀든 것이다.
‘됐다.’
마법을 사용하던 팔이 잘리자, 카단은 승리를 확신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가 지워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8성 네크로맨서가 일으킨 기사들은 뛰어난 능력을 지녔네요. 설마 지저분한 존재들이 제 몸에 상처를 낼 줄이야.”
팔이 잘렸음에도 피 같은 건 흐르지 않았다.
그뿐이랴? 글라샤는 팔이 잘렸다는 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뭐지?’
카단은 이상함을 느끼며 뼈의 창을 만들어 글리샤에게 날려보았다.
푸슉!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지만, 글라샤는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뼈의 창은 그의 배를 뚫어내며 멈췄고, 글라샤는 멀뚱히 자신의 배에 박힌 뼈의 창을 바라봤다.
그리고 보란 듯이 카단을 바라보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불사….’
불사가 그저 강하기 때문에 붙은 말이 아니었던 걸까?
말 그대로 죽지 않는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명인 걸까?
당황스러웠다.
팔이 잘리고 창이 몸에 박혔음에도 글라샤는 조금도 충격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과연 당신이 절 죽일 수 있을까요?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가디언이 온다고 해도 절 죽일 수는 없을 테니까.”
자칫 거만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정말 그가 불사라면 가디언이 온다고 해도 그를 죽일 수는 없을 터.
사락-
순간 잘려나간 글라샤의 팔이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팔이 잘린 곳에 새로운 팔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잘린 팔이 자라는 것이 아닌, 시간을 역행하듯 잘렸던 팔이 나타났다.
“카단.”
그 모습을 보던 루나가 재빨리 뒤로 몸을 빼며 카단에게 말을 걸어왔다.
“루나. 네가 봐도 이상하지?”
“응. 저건 그 어떤 마법으로도 불가능해. 마왕이라면 모를까.”
“분명 무언가 있겠지?”
“응. 이유 없는 불사는 없어. 리치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
“라이프 베슬이 어딘가 숨겨져 있다는 거지?”
카단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루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살폈다.
“아마 이 도시 자체가 저 녀석의 영역일 거야. 다만 이 도시를 벗어나게 된다면 그 잘난 불사의 능력도 사용하지 못하겠지.”
“물론 저 녀석을 도시 밖으로 빼내는 건 불가능하겠지?”
“응. 리치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그럼 리치를 사냥할 때처럼 저 녀석을 상대해야 한다는 건가?”
카단이 루나를 바라보며 묻자, 루나가 심호흡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라이프 베슬 같은 무언가가 분명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거야. 내가 다녀올게.”
팔이 잘려도, 몸이 창에 뚫려도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는 마족을 상대로 굳이 전면전을 택할 필요는 없었다.
무언가 비밀이 있다면 그것을 풀어내는 것이 먼저.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볼 테니, 부탁할게. 루나.”
“응. 죽지 마.”
“걱정하지 마. 이제 나도 8성이잖아?”
“그건 그렇지.”
루나는 그 말을 끝으로 땅을 박찼다.
“어디 가십니까?”
글라샤는 곧바로 허공에 그림을 그려 루나의 발목을 붙잡으려 했지만, 스릉!
네크로맨서 주제에 바로 앞까지 다가와 단검을 휘두르는 카단 덕분에 공격을 이어갈 수 없었다.
“네 상대는 나야.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했지? 그래. 어디 한번 나눠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