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어떻게 해야 할까?’
상대는 불사. 죽지 않는 몸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뿐이랴? 손가락으로 허공을 휘젓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마법을 쏘아대는 괴상한 능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같은 불사라면 차라리 본 드래곤을 상대하는 것이 더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카단의 머리를 스쳤다.
‘그래도 본 드래곤은 심했나?’
카단은 피식 웃더니, 그대로 단검을 휘둘러 글라샤를 공격했다.
휙!
“근접전을 하면 제가 능력을 사용 못 한다고 생각하셨나요?”
글라샤는 우아하게 공격을 피하며,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면 말고.”
제법 재빠르게 움직이며 단검을 휘둘러봤지만, 글라샤의 얼굴에 그려진 여유로움을 지워낼 수 없었다.
슥-
잠깐 공격이 멈춰진 틈을 타 글라샤가 허공에 무언가를 그렸고.
촤르르륵!
그와 동시에 땅이 솟구치며 카단과 글라샤 사이를 갈라놨다.
“지크 경.”
카단은 곧바로 마나를 활성화하며 지크를 불렀다.
“알겠네!”
그러자 지크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데스나이트 부대를 이끌고 글라샤를 향해 돌격했다.
“8성 네크로맨서가 된 것 같아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대단하진 않군요?”
휙! 부우웅! 슉!
데스나이트들의 공격은 허무하게 허공만을 갈랐다.
스륵.
같은 기사단 출신의 데스나이트들의 숨 막히는 연계 속에도 글라샤는 발레리노라도 되듯 가볍고 우아하게 공격을 피해냈다.
‘가면은 쓰지 않았지만, 분명 최상급이다.’
글라샤가 상급 마족이었다면 듀라한과 데스나이트만으로도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카단이 8성이 되며 그의 언데드들 역시 한 단계씩 강해졌지만, 이처럼 손쉽게 밀려날 줄은 몰랐다.
‘어쩌면 설리반과 비슷한 정도려나?’
얼마 전 수만의 마족을 이끌고 서쪽 방어선을 공격했고 끝내 지크 그림발트를 죽였던 설리반.
카단은 그 설리반과 동급의 마족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시험해볼 만하지.’
카단이 미소를 짓자, 글라샤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상황이 웃기거나 즐거운 상황은 아닐 텐데요?”
“그러니까 너 죽지 않는다는 거잖아? 어떤 공격을 해도.”
“그런데요?”
“딱 좋네.”
글라샤는 카단이 내뱉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 순간 카단이 마나를 활성화했고, 그의 주변으로 핏빛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이어서 느닷없이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응?”
그러나 평범한 비와는 달랐다.
축축하면서 끈적이는 액체. 어쩐지 조금은 비린내 같은 것이 나는 듯한 기분.
“이건 피….”
하늘에서 잔잔히 내리는 비는 물이 아닌 피였다.
“피 마법에 능통한 네크로맨서라. 이건 또 귀하군요. 보통은 언데드와 뼈 마법 위주로 훈련하던데.”
쏴아아아아.
글라샤는 손을 내밀어 피의 비를 받아내며 말을 이었다.
“피의 비라니. 낭만적이군요. 아름다워요.”
피의 비가 내리는 상황을 오히려 즐기는 듯한 얼굴이었다.
“많은 예술가가 비를 사랑하죠. 영감을 줄 때가 많거든요.”
이내 그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고, 동시의 그의 손가락이 검붉은 기운을 머금었다.
슥- 스슥.
글라샤가 허공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고.
툭. 콰릉!
그가 손을 내려놓는 순간 카단을 향해 번개가 내리쳤다.
“참나.”
다행히 카단은 블링크 마법이 담긴 반지를 통해 뒤쪽으로 이동하며 번개를 피해낼 수 있었다.
치이익….
번개가 내리꽂은 땅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성가신 능력이란 말이지.’
스르르륵.
카단이 손을 뻗자, 그의 주변으로 핏방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누가 뱀파이어인지 모르겠습니다. 피 마법을 그 정도까지 사용할 줄이야.”
쿠르르릉!
핏방울들이 모여들어 점차 크기를 키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회오리가 생성되었다.
‘이 마법을 사용해도 무리가 없다니. 확실히 8성이 되니 다르군.’
카단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들고 있던 손을 천천히 이동해 글라샤를 가리켰다.
쿠오오오오오!
그러자 핏빛 광풍은 매섭게 글라샤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피의 폭풍이라. 당신은 저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존재로군요. 어떻습니까? 저와 영원히 함께하는 것이.”
“별로 좋지 않은 제안인데?”
카단이 거절하자, 글라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피의 폭풍을 피해내려 했다.
“음?”
그런데 이상했다.
조금 전과 다르게 몸이 무거웠다.
마치 무거운 추를 온몸에 매달고 있는 듯한 느낌.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기력해지고, 괜히 기분이 우울해졌다.
몸을 움직이려 하면 할수록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저주…로군요.”
“8성 네크로맨서의 저주는 쉽게 봐선 안 돼. 저주만으로도 적을 죽일 수가 있거든.”
“아쉽게도 전 죽지 않는 몸입니다.”
“다행히도 저주는 통하는 모양이야.”
글라샤가 여유를 부렸지만, 카단의 말처럼 불사의 몸도 저주는 피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광이 나던 피부도 칙칙하게 변했고, 하얀 얼굴에 짙은 눈그늘까지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족이라 부르기에 믿기 힘들 정도로 맑던 눈이 충혈되었고, 그의 코에서 피가 흐르기도 했다.
‘루나. 아직이야?’
카단은 저주에 걸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글라샤를 바라보다 곧바로 루나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이씨! 모르겠어! 라이프 베슬 같은 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
루나의 목소리는 곧바로 들려왔다.
-영주성 구석구석 다 찾아다니는 중인데 죄다 이상한 조각상에 그림밖에 없어.
이어진 루나의 목소리에 순간 카단이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번쩍 떴다.
‘루나. 조각상이나 그림 전부 부숴버려.’
-뭐? 왜 쓸데없이?
‘그중에 있을 거야. 이 녀석의 라이프 베슬이.’
-뭐, 잘 모르겠지만, 알겠어.
그 대답을 끝으로 루나의 목소리는 더 들려오지 않았고, 카단은 미소를 지으며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촤륵!
마나를 활성화하는 순간, 그의 뒤로 거대한 피의 사신이 소환되었다.
피의 사신 역시 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들고 있는 낫의 모양부터 입고 있는 로브의 모양까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변한 모습이었다.
“피의 사신. 데시메이션. 그걸 보는 건 처음이군요. 아…. 멋있습니다.”
피의 폭풍에 몸이 찢기면서도 글라샤는 황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쯧. 끈질긴 놈.”
안타깝게도 그의 몸은 찢기는 순간 곧바로 복구되었다.
8성 피 마법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알려진 피의 폭풍 역시 글라샤에겐 큰 피해를 줄 수 없었다.
“그럼 계속 보여주세요. 나에게 영감을!”
파아아아앗!
글라샤가 손가락으로 허공에 그림을 그리자, 매섭게 회전하던 폭풍이 단번에 사라졌다.
촤르르르륵!
이어서 얼음으로 만들어진 쇠사슬이 생겨나 카단을 향해 쏘아졌다.
“주군을 지켜라!”
챙! 채재챙!
지크의 외침에 데스나이트들이 달려들어 날아드는 얼음 쇠사슬을 쳐냈고.
후웅!
오러로 만들어진 거대한 검날이 다시 한번 글라샤를 향했다.
“소용없다는 거 아시면서.”
서걱!
글라샤는 날아오는 오러를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냈다.
다시 한번 그의 팔이 잘려 날아갔지만, 글라샤의 얼굴엔 미소가 걸렸다.
“팔이야 다시 만들어내면 그만….”
그런데 이상했다.
“뭐, 뭐야?”
금방 복구되어야 할 팔이 다시 생겨나지 않았다.
“크억!”
게다가 느끼지 못해야 할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크아아아악!”
극심한 통증에 글라샤가 무릎을 꿇었다.
“이, 이게 어찌 된!”
글라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발악하려는 순간, 카단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로 듣고 싶었던 말이 들려왔다.
-카단. 조각상은 죄다 부수고 그림은 죄다 찢어서 태워버렸어!
‘잘했어. 혹시 모르니까 도시 곳곳에 돌아다니면서 보이는 예술품들은 모조리 부숴버려.’
-응! 맡겨둬!
루나의 말을 들은 카단은 미소를 그리며 곧바로 피의 사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스륵.
그러자 피의 사신은 들고 있던 피의 낫을 카단에게 건네주었다.
피의 낫을 받아드는 순간 피의 사신이 그대로 카단에게 깃들엇고, 카단의 주변으로 핏빛 기운이 넘실거렸다.
“8성이 되니까, 이 기술도 강화되더라고.”
카단이 낫을 든 손을 옆으로 뻗자, 순간 피의 낫이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거대한 낫이 빠르게 크기를 줄였고, 이내 단검의 형태로 완전히 바뀌었다.
“이것도 그 영감인지 뭔지에 도움이 되려나?”
타앗!
피의 비를 뚫으며 카단이 달리기 시작했고, 이내 그의 단검이 글라샤의 어깨를 베어냈다.
서걱!
“끄아아악!”
팔은 잘려 나가지 않았지만, 단검에 베인 극심한 고통이 그의 입에서 절규를 내뱉게 했다.
“이, 이럴 수는!”
글라샤는 급하게 하나 남은 손을 움직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쩌저저저적!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땅이 얼어붙기 시작했고, 얼음으로 된 벽들이 솟아나 글라샤를 보호했다.
“이럴 수는 없다!”
촤라라라라라라락!
글라샤가 절규하자, 사방으로 검붉은 기운을 머금은 얼음 파편이 튀었다.
“냉기 마법을 다루는 녀석이랑 전투해본 적이 있어서, 그렇게 당황스럽진 않네.”
해골 병사들과 데스나이트들이 얼어붙고 말았지만, 카단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카단! 다 뒤져봤는데 이제 도시에 남은 예술품 따위는 없어! 다 처리했어!
이어진 루나의 목소리에 카단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너를 이 도시에 묶어두는 건 없으니, 이 마법도 통하겠지.”
타앗!
카단은 얼어붙은 땅을 박차며 빠르게 글라샤에게 다가갔고.
척.
곧바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망자의 길.”
촤아아아악.
카단을 중심으로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색채를 잃어갔다.
모든 것이 회색빛으로 물들었고, 카단을 감싸고 있는 핏빛 기운만이 색을 잃지 않았다.
“여, 여긴?”
“망자의 길. 회색 도시. 망자의 기억과 존재를 세상과 떨어뜨려 놓는 곳이지.”
오로지 카단만이 본인의 색을 지키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카단은 조금 전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글라샤의 멋진 금발과 백옥같은 피부는 색을 잃고 말았다.
척!
그뿐이 아니었다.
망자들의 세계는 산 자들의 출입을 원하지 않는 곳이자 살아있는 모든 것의 생명을 빼앗는 곳이었다.
척! 척!
사방에서 나타난 망자들의 손이 글라샤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왜? 왜 너는?”
카단은 색을 잃지도 않았으며, 망자들의 손이 달라붙지도 않았다.
망자의 손이 왜 글라샤만 붙잡는 것일까? 왜 카단은 회색빛으로 물들지 않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때? 이번에도 영감이 팍팍 떠올라?”
카단은 여유롭게 단검을 돌려가며 천천히 글라샤를 향해 다가왔다.
슥- 슥슥!
글라샤는 이를 악물며 손을 움직여 무언가를 그려내려 했다.
그러자 하늘에서부터 칼날이 비처럼 내렸고, 빠른 속도로 내리는 칼날은 그대로 카단을 향했다.
챙! 챙! 채앵!
카단은 피로 만들어진 단검을 가볍게 휘둘러 비처럼 쏟아지는 칼날을 쳐냈다.
챙! 채앵! 챙.
하늘에서 내리는 칼날의 비도 글라샤를 향해 걸어가는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저, 저리 가!”
색을 잃은 예술가는 절망 속에 죽어갔다.
글라샤에게서는 고귀해 보이던 모습도 우아한 모습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부터 예술가 행세만 하지 않았어도 허무하게 죽진 않았을 텐데.”
글라샤 앞에서 걸음을 멈춘 카단이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전했다.
“뭐?”
카단은 피로 만들어진 단검을 들어 올리며 답했다.
“너무나도 너 자신을 믿었고, 자만심을 부린 대가다.”
그 순간 글라샤는 생각했다.
‘저 색은 너무도 아름답구나. 내 죽음은 과연 아름다울까?’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그는 그 이상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