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폭 네크로맨서-172화 (172/186)

제172화

부서진 신전 안.

“글라샤가 죽었다.”

해밀턴이 미간을 좁힌 채 어둠 속을 향해 말했다.

“뭐?”

“글라샤는 라이프 베슬을 따로 두는 놈 아니었나?”

“가디언이라도 나선 거야?”

어둠 속에서는 무수한 질문들이 쏟아졌고, 해밀턴은 이를 악물며 답했다.

“그럴 확률도 있지. 길버트 녀석이 서쪽 방어선에서 한 달 이상 머물렀으니까. 확실한 건 아직 모른다.”

그러자 이번엔 어둠 속에서 조롱 섞인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러게. 글라샤 녀석만 너무 믿고 있었던 거 아니야? 오랜만에 도시 하나 날렸군.”

“진즉에 라다메스에 마족군을 배치해뒀으면 이럴 일 없었잖아?”

“라이프 베슬이 없으면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놈 아니야?”

“예술품에 마나와 생명력을 담아놓고 사용하는 놈이라 까다롭긴 하지만, 그뿐이잖아?”

쿵!

어둠 속에 들려온 목소리가 불쾌했는 지, 해밀턴이 발을 굴렀고 그 충격에 부서진 신전 곳곳에서 흙먼지가 흘러내렸다.

“글라샤는 내 부하였다. 내가 제일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을 텐데?”

“조금만 더 놀렸다간 우리한테 무기라도 휘두를 것 같군.”

“너 혼자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다들 진정하라고. 글라샤는 여우가 아끼던 녀석이었잖아?”

해밀턴이 불쾌감을 내비치자 어둠 속에서 들리던 목소리들이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그분께서 별다른 말씀은 없으신가?”

“우리도 이제 충분히 힘을 모은 것 같은데?”

“언제까지 숨어서 지내야 할지 모르겠군. 답답해 죽겠어.”

이번에 들려온 불만은 해밀턴을 향한 불만이 아니었다.

리베라 왕국의 절반을 점령하고 3년이 흘렀다.

분명 충분한 전력이 있고, 몰아붙이기만 한다면 인간들을 몰살시키고 왕국을 통째로 점령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런데 마족들은 전면전을 일으키지 않았다.

3년째 마족들을 양산하는 것만 반복할 뿐, 인간들과 전면전을 벌이지 않고 있는 상태.

“다들 답답한 건 잘 알고 있어.”

해밀턴은 본인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잘 알고 있잖아? 가디언이든 뭐든 모조리 죽일 수 있는 우리가 왜 인간들을 살려두는지.”

어둠 너머는 침묵만이 흘렀다.

그 침묵은 긍정의 침묵. 즉, 해밀턴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침묵이었다.

“그분의 최종 목표는 이곳에 마계를 소환하는 것. 정확히는 마계의 문을 여는 것이겠지.”

해밀턴은 침묵 속에서 여유롭게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어갔다.

“필요한 것은 샬로트의 유산을 가져간 네크로맨서 놈이 가지고 있는 열쇠. 그리고.”

“충분한 제물이겠지.”

어둠 속에서 다음 말이 들려왔고, 해밀턴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이곳 리베라 왕국은 시작점일 뿐이야. 이 조그만 나라 하나만 얻겠다고 시간을 투자하는 게 아니잖아?”

해밀턴은 부서진 여신상의 벽면을 만지작거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마계를 만드는 것. 그것이 그분과 우리들의 목적이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마.”

해밀턴의 말이 끝나자, 어둠 속에서 숙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질문이 던져졌다.

“여우야. 정확히 얼마나 많은 제물이 있어야 하는 거지?”

“인간들이라면 꽤 많이 붙잡고 있잖아?”

“그래. 이제 정확히 좀 말해줘. 그분께서도 그 정돈 알려주라고 하시겠지.”

질문을 들은 해밀턴이 무언가 고민하는 듯 턱 끝을 쓰다듬더니, 이내 결심한 얼굴로 어둠 너머를 바라봤다.

“5명의 가디언.”

이어진 해밀턴의 대답에 어둠 너머의 존재들이 경악했다.

“5명의 가디언을 산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건가?”

“그래서 가디언을 만나면 피하라고 했던 거군.”

“그런데 가디언을 생포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해밀턴은 조용히 좀 해보라는 듯 손짓하며 말했다.

“그러니 딱 왕국의 절반만 장악한 뒤 인간들을 야금야금 죽여왔던 거다.”

큰 전쟁이 일어난다면 가디언들이 힘을 합칠 것이 분명했고, 그 상황에선 마족들도 힘 조절하며 전투하긴 힘들 터.

“인간들의 힘을 분산시키고 하나씩 잡아 와야 해. 그래야 가디언을 생포할 수 있다.”

해밀턴은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이번 작전에서 더글라스까지 밀고 들어간 후 길버트 녀석을 생포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더글라스의 가주가 페코스의 공격을 잘 막아냈고, 길버트가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왔다.

게다가 서쪽 방어선 역시 카단에 의해 마족 군단을 상대로 꽤 오랜 시간을 버텨냈다.

서쪽 방어선이 무너지기 전에 길버트나 나타나 버리는 바람에 이번 마족들의 작전은 실패로 끝나버렸다.

“다음 작전까지 그분의 뜻을 기다려봐야지.”

“꼭 가디언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

이어진 질문에 해밀턴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가디언만큼의 마나 하트를 지닌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가디언만큼의 마나 하트를 지닌 인간이 흔한 건 아니잖아?”

“뭐, 디미타르 밑에 있는 마티아스라는 녀석도 제물 후보 중 하나고, 샬로트의 유산을 가져간 녀석도 가능성이 있지.”

해밀턴의 답을 들은 마족들은 무언가 깨달은 듯 신음을 내뱉었다.

“가디언을 잡는 게 힘들면 그 후보들을 데려다 쓰면 되겠군.”

“영웅 아카데미를 운영하도록 내버려 뒀던 이유가 이런 거로군. 많은 후보자를 만들기 위해.”

“단순히 마족으로 만들 강한 인간의 몸이 필요했던 게 아니었어.”

마족에게 가장 방해가 될 영웅 아카데미를 부수지 않고 오래도록 내버려 뒀던 이유.

그 이유는 가디언을 대체할 산 제물을 육성하기 위함이었다.

퍼즐이 맞춰진 듯한 개운함 때문일까? 어둠 너머로 웃음소리들이 새어 나왔다.

“재밌군. 그분의 의도를 이제 어느 정도 알 것 같아.”

“여우야. 그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지? 그분이 따로 말씀하신 건 없는 건가?”

다시 질문이 들리자, 해밀턴은 미간을 좁히며 대답하려 했다.

그때.

“방금 소식이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나 오며 말했다.

“소식이라면?”

어둠 속에서 걸어나 온 마족은 뿔 달린 사슴 가면을 쓰고 있었다.

“글라샤를 죽이고 도시 라다메스를 탈환한 인간은 하나.”

사슴 가면. 페코스의 말에 어둠 너머로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하나?”

해밀턴은 믿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고, 페코스는 피식 웃음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그래. 샬로트의 유산을 지닌 네크로맨서. 그 녀석이라고 하더군.”

이어진 페코스의 말에 해밀턴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어떻게 그 녀석이?”

해밀턴은 믿을 수 없었다.

글라샤는 8성 이상의 인간이 아니라면 상대하기 힘든 마족.

아무리 라이프 베슬이 부서졌다고 해도 7성 인간이 쉽게 죽일 수 있는 마족이 아니었다.

“분명 서쪽 방어선에서 봤을 때만 해도 7성에 불과했는데?”

그러자 페코스가 뿔 달린 사슴 가면을 벗으며 대답했다.

“제물의 후보가 요건을 충족한 모양이로군. 8성이 되었단 뜻이겠지.”

이곳에 모인 마족들은 모두 카단의 성장을 멀리서 지켜본 자들이었다.

“그 녀석 사실 마족 아니야?”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성장할 수 있는 거지?”

“믿을 수 없는 성장 속도로군.”

물론 자의로 지켜본 것은 아니었다.

카단이 샬로트의 유산을 갖고 있었으며, 마족에게 방해가 되었기에 주의할 인물로 여기고 있었다.

어둠 너머의 존재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해밀턴과 페코스만이 정색한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대로 네크로맨서를 내버려 둘 생각은 아니겠지?”

페코스의 질문에 해밀턴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저어댔다.

“그분이 네크로맨서를 살려두라고 하셨다.”

“샬로트의 유산 때문인가?”

“열쇠를 아공간에 넣어 놓은 채 녀석이 죽어버리면 열쇠는 영영 찾을 수 없을 테니까.”

“생포하면 되잖아. 이곳에 있는 놈들이라면 어려운 일은 아닐 텐데?”

“그래. 녀석이 8성이 된 이상 더는 부하 놈들에게 맡길 일이 아니야.”

해밀턴은 허공을 노려보며 혼잣말을 내뱉었고, 이내 어둠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쉽게도 그분의 명령 없이 우리 마음대로 남쪽으로 향할 수는 없다. 그러니 직접 네크로맨서를 잡으러 가는 건 무리지.”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건데?”

“여우야. 대충 다 알고 있으니까 본론만 말해.”

어둠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해밀턴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만약 너희들의 영역에 네크로맨서가 찾아오면 무조건 잡아라. 팔, 다리 정도는 잘라도 돼. 살려서만 데려와.”

* * *

도시 라다메스를 되찾았다.

도시 더글라스로 피난 갔던 생존자들이 되돌아오며 라다메스에는 작게 축제가 열렸다.

“구원의 영웅! 만세!”

“새로운 영웅이 탄생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웅의 탄생.

사람들은 홀로 마적을 쓰러트리고 도시 라다메스를 탈환한 카단을 향해 영웅이라 불렀다.

이 축제는 라다메스를 되찾았다는 기쁨에 열리기도 했지만, 그보다 카단에게 감사하는 마음에 열린 축제이기도 했다.

불안과 공포 속에 살던 사람들이 오랜만에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다만 축제의 주인공인 카단은 도시 어느 곳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설마 정말 혼자서 해낼 줄은 몰랐습니다.”

도시 라다메스의 영주성 발코니에서 와인을 마시던 벨리드가 헛웃음을 지으며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중앙 광장을 바라봤다.

“내가 지시한 일이라지만 아직도 믿기지 않는군.”

옆에 있던 가디언 길버트 역시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도대체 카단이 어떻게 8성이 된 겁니까? 옆에서 계속 지켜봤지만, 아직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스스로의 깨달음이 있었겠지. 그리고 그 깨달음은 한계에 부딪힐수록 뚜렷하게 보일걸세.”

“저도 가능할까요? 꽤 오래 7성에 머물고 있는데.”

“훈련받아보겠나? 벨리드, 자네라면 가르칠 맛이 날 것 같기도 한데.”

길버트가 웃으며 와인 잔을 내밀었고, 벨리드는 무언가 고민에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이대로 머물러 있기만 해선 안 될 것 같습니다. 잠시 전선에서 물러나더라도 8성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

“좋은 생각일세.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같이 더글라스로 가도록 하지.”

벨리드는 고개를 끄덕인 후 와인을 한 번에 들이켰고, 이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부탁 받은 일이 있어서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어딜 간다는 건가?”

“의뢰인에게요. 이 축제의 주인공이면서 민망하다고 어딘가 숨어 있거든요.”

“카단 말이로군. 알겠네. 잘 마무리하고 오시게.”

길버트가 자상하게 웃으며 손짓했고, 벨리드는 예를 갖춰 인사한 후 곧바로 텔레포트를 이용해 어딘가로 사라졌다.

파앗!

벨리드가 다시 모습을 나타낸 건 도시 라다메스의 성벽이었다.

“카단. 여기 있었어요?”

“아. 들켰네요.”

“여기 숨어있을 것 같았어요. 왜 가서 술이라도 마시지.”

“사람들이 자꾸 구원의 영웅이라고 불러서 차마 자리를 지킬 수가 없었어요.”

“이제야 우리 공감대가 생겼네요?”

카단이 질색한 얼굴을 하자 벨리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설마 절 데리러 오신 건 아니겠죠?”

“제가 짓궂긴 해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단지 의뢰 결과를 말씀드리러 온 건데?”

“의뢰라면?”

“찾았어요. 당신이 말했던 사람.”

벨리드가 품 안에서 돌돌 말린 양피지 하나를 꺼내 카단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잭 카터. 그 사람이 어디서 뭘 하는지. 상세히 적어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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