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리베라 왕국의 수도 ‘랑게시우스’.
3년 전 인간과 마족의 전쟁이 시작된 도시.
가장 부유하며 가장 안전한 도시였던 이곳은 이제 주인 없는 땅이 되고 말았다.
전쟁이 시작됨과 동시에 국왕이 살해당했고, 왕국을 이끌어야 할 왕족은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주인을 잃은 도시는 빠른 속도로 무너졌으며, 귀족들은 살기 위해 수도를 버렸다.
전쟁이 왕국 전역으로 퍼져나간 이후부터 마족들은 랑게시우스를 욕심내지 않았다.
가장 안전했던 도시 랑게시우스는 가장 위험한 도시가 되었고, 이제는 가치 없는 땅이 되어버렸다.
“배고픈데….”
그러나 버림받은 도시에도 생존자는 존재했다.
“사냥이라도 다녀오자. 새라도 잡아먹어야겠어.”
“오염되지 않은 호수를 찾았어! 나는 물 떠올게! 같이 갈 사람?”
이 도시의 생존자는 대부분 어린아이였다.
부모를 잃은 그들을 챙겨줄 사람들은 없었고, 아이들은 몸을 숨긴 채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마족들이 수도를 떠났음에도 아이들은 도시를 떠날 수가 없었다.
왕국은 여전히 마족과 전쟁 중이었고, 어린아이들만으로는 도시를 떠날 수가 없었다.
이곳에 남는 것이 아이들이 선택한 가장 안전한 선택지였다.
인간과 마족. 그 누구도 찾지 않는 도시. 아이들에게는 이 도시만큼 안전한 곳은 없었다.
“어? 자, 잠깐만! 애들아! 숨어!”
“왜?”
“저기 사람! 빨리 숨어!”
성벽 너머로 나서려던 아이들은 사람의 그림자를 보곤 급히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사람일까? 마족일까?”
“여긴 왜 온 거지?”
신성력을 지니지 않은 이상, 마족과 인간을 구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인간 역시 믿을 수가 없었다.
마족에게 아이들을 팔아넘기는 인간들이 있었기에, 가끔 사람들이 수도를 찾을 때면 아이들은 지금처럼 몸을 숨기곤 했다.
“수도에 사람이 찾아온 건 1년 만인가?”
“쉿. 들으면 어쩌려고? 마족들은 귀가 좋대. 다들 조용해. 입 막아 얼른.”
골목에 숨은 아이들은 각자 자기 입을 틀어막은 채 성문을 넘어 수도의 거리를 걷는 사람을 바라봤다.
검푸른 머리칼에 하얀 피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균형 잡힌 몸을 지닌 남성이었다.
“잘생겼는데?”
“그런데 마족 같아. 저 사람 표정이 없어.”
“어디를 가는 거지?”
남성은 천천히 거리를 거닐며 주변을 살펴봤다.
감정 하나 없는 표정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어쩐지 그리움이 담겨 있는 듯했다.
“사람인가?”
“쉿. 아무리 사람이라도 따라가지 말라고 하셨잖아.”
“맞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가장 안전한 곳은 수도라고 하셨어.”
“만약 저항군이나 혁명단이라면? 저항군 기지에만 가도 먹을 게 잔뜩 있다던데?”
거리를 거니는 남자를 보며 골목에 숨은 아이들은 절망을 그리고 희망을 꿈꿨다.
1년 만에 도시에 나타난 사람이 구원자일까? 아닐까?
“우리 말고는 아무도 믿지 마.”
“맞아. 소문에 의하면 저항군이라고 속이고 아이들을 데려다가 마족에게 넘기는 새끼들도 있대.”
“그러니 희망도 품지 마. 우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도시에 머무는 거야. 가디언이 직접 데리러 오는 게 아닌 이상 우린 이곳에 머문다.”
리더로 보이는 아이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옆에 있던 아이들이 입을 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 자, 잠깐만! 저 사람!”
그때 한 아이가 거리를 거니는 남자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우리 아지트로 가는 거 같은데?”
“어, 어쩌지? 아지트에 애들 많은데….”
그러자 아이들이 당황하며 리더로 보이는 아이를 바라봤고.
“공격은 최후의 수단이야. 우선 뒤를 따라가 보자. 들키지 않게. 다들 조용히 나 따라와.”
리더로 보이는 아이는 무언가 결심한 듯 바닥에 굴러다니는 뾰족한 나무 조각을 주워 골목을 빠져나왔다.
의문의 남자는 천천히 아이들이 말하는 ‘아지트’를 향해 걸어갔다.
마치 처음부터 이 도시를 찾아온 이유가 아지트였던 것처럼 남성의 걸음은 막힘이 없었다.
“어? 무, 문 여는데?”
“다들 잘 들어. 우리 목적은 저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야. 애들을 대피시키는 거다.”
“하, 하지만 우리가 죽으면?”
“죽어도 내가 죽어. 내가 앞장서서 상대할 테니까, 너희들은 애들 대피시키는 것에 집중해.”
리더로 보이는 아이는 손에 쥔 나무 조각을 바라보더니 이내 이를 악물며 문이 열린 아지트를 향해 달려갔다.
“이 나쁜 새끼야! 애들은 놔줘!”
아지트의 문을 지나 의문의 남성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아이들이 멍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췄다.
“뭐, 뭐야?”
아지트 안의 분위기는 걱정과 달리 평온했다.
아이들이 걱정했던 살벌한 상황이 조금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평온이었다.
“잭 카터 씨. 여기서 이러고 계셨습니까?”
의문의 남자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의 대장이자 보호자. 그리고 책임자인 잭 카터를 향해 악수를 청했다.
“카, 카단 님….”
“어? 대장. 울어?”
“대장 왜 울어! 이 아저씨가 울린 거야?”
잭 카터는 카단을 마주치는 순간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살아 계셨군요.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두 손으로 카단이 내밀고 있는 손을 붙잡자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환상 따위가 아니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잭 카터 씨. 소식이 들리지 않아 걱정 많이 했어요.”
카단 역시 눈가가 촉촉해졌지만,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밝은 웃음을 지으며 잭 카터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 환한 모습에 잭 카터는 다시 눈물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울음을 멈춘 잭 카터가 바 테이블 위로 오렌지 주스를 올리며 카단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찾으신 겁니까? 제가 여기에 있는 건 또 어떻게 알고….”
그러자 카단은 테이블 위로 돌돌 말린 양피지 한 장을 올렸다.
“이건?”
“아는 분에게 의뢰했었습니다. 잭 카터 씨를 찾아달라고.”
사락.
카단의 말에 잭 카터가 조심스레 돌돌 말린 양피지를 펼쳤다.
[잭 카터. 도둑 길드 간부. 현재 행방불명 상태. 3년 전 수도에서 목격된 것이 마지막. 어쩌면 피난하지 못하고 사망했을 수도 있음.]
양피지에 적힌 건 희망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글뿐이었다.
“이걸 보시고도 절 찾았단 겁니까?”
잭 카터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카단이 양피지 아래를 잘 살펴보라며 손가락으로 양피지를 가리켰다.
[최근 마족에게 인간 아이를 팔아넘기는 이들에게서 수도 근처에서 사람을 봤다는 진술을 들음. 인상착의가 잭 카터와 비슷했다.]
양피지 아래쪽에는 잭 카터를 찾을 수 있을 만한 단서가 적혀 있었다.
“수도 근방에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뭘 물어볼 수도 없고 처음엔 곤란했습니다.”
카단은 피식 웃으며 허공을 바라봤고, 벨리드에게 정보를 받았던 때를 떠올렸다.
며칠 전.
도시 라다메스의 성벽 위.
“어디서 뭘 하는지 상세히 적어놨다면서요? 이 정도로는 알기 힘들 것 같은데요?”
카단은 헛웃음을 지으며 벨리드에게 물었다.
“양피지에 마나를 한 번 주입해보겠어요?”
그러자 벨리드는 피식 웃으며 양피지를 가리켰고, 카단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의 말을 따랐다.
우웅.
양피지에 마나를 주입하는 순간, 양피지 위로 홀로그램 같은 글자가 떠올랐다.
“이건?”
[잭 카터. 수도의 생존자. 남겨진 아이들의 보호자.]
“저희도 이번에 의뢰를 수행하면서 깜짝 놀랐어요. 수도에 아직 생존자가 있을 줄이야.”
벨리드도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고, 카단은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벨리드를 바라봤다.
“혁명단이나 저항군이 수도의 생존자들은 구하지 않은 겁니까?”
카단 역시 수도가 어떤 상황인지는 알고 있었다.
마족과의 전쟁이 시작된 곳이자 가장 큰 피해를 본 곳.
가치를 잃은 도시이자 아군과 적군 모두가 찾지 않는 버려진 도시.
“당시에는 생존자를 구할 정신이 없었죠. 왕국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났거든요.”
벨리드는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답을 이어갔다.
“그래서 작년쯤? 전쟁이 잠잠해졌을 때 혁명단원 몇몇이 정찰하러 갔었는데 생존자는 찾을 수 없었어요.”
혁명단과 저항군 역시 수도의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몇 차례 정찰하였음에도 생존자는 한 명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혁명단과 저항군은 생존자는 없다고 단정 지었고, 그대로 수도를 방치해 두었다고 한다.
“카단. 어차피 그 사람을 찾으러 갈 생각이라면 부탁 좀 해도 될까요?”
“생존자들을 데려와달라는 말씀이죠?”
“네. 버려진 도시라지만 위험해요. 무엇보다 먹을 것도 거의 없을 텐데.”
벨리드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하자, 카단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꼭 데려올게요.”
* * *
3년 만의 만남.
카단과 잭 카터는 쉼 없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떤 일이 있었는 지, 또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각자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했다.
“그러니까 지금 카단 님께서 8성에 도달하셨다는 겁니까?”
“네. 아버지를 따라잡기까지 앞으로 1성 남았네요.”
“샬로트 님께서 살아계셨다면 분명 기뻐하셨을 겁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샬로트의 경지는 9성.
왕국 최고의 네크로맨서가 되기까지 앞으로 한 걸음 남은 상태였다.
물론 그 한 걸음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카단 역시 인지하고 있었다.
8성이 되기까지도 3년이 넘게 걸렸는데, 9성이 되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깨달음이 필요할까?
‘최상급 마족과 싸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해야지.’
9성이 되고 싶은 욕심이야 있지만, 지금은 경지를 끌어 올릴 상황이 아닌 마족과 전쟁을 해야 할 때.
“잭 카터 님은 쭉 이곳에 계셨던 겁니까? 왜요? 피난 가시지 않고….”
“저 아이들을 두고 떠날 수 없었습니다. 저 아이들은 모두 데리고 떠나는 것 역시 불가능했고요.”
잭 카터가 씁쓸한 얼굴로 물잔을 비우며 답했다.
“아무래도 그렇겠네요. 그래도 기회가 있다면 피난 갈 거죠? 아이들이랑 함께.”
“안전이 보장된다면야 당연히 가지 않겠습니까?”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카단은 오렌지 주스를 들이켰다.
“혹시나 수도를 고집하시면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어요.”
“뭐, 이까짓 주점이야 전쟁 끝나고 또 열면 그만입니다. 그저 저 아이들이 걱정이었죠.”
잭 카터의 눈이 창문 너머 골목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향했다.
“지키지 못한 아이들이 많습니다. 살아남았던 아이들 절반이 벌써 떠나거나 죽어버렸죠.”
수도는 생존자들이 자리 잡고 살아가기엔 열악한 환경이었다.
남은 것도 없기에 음식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수도의 생존자들은 과일이나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하루하루 버티며 이날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아이들이 안전하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흠. 혹시 챙겨야 할 짐이 많을까요?”
카단의 질문에 잭 카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 금방 챙길 수 있는데 왜 그러시죠?”
카단은 피식 웃더니 품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 곧바로 찢어버렸다.
찌이익!
“왜긴요. 피난 가는 거 도와드리려고 하죠. 편하고 또 빠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