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폭 네크로맨서-175화 (175/186)

제175화

“왕성을 이렇게 오게 될 줄이야.”

왕성에 들어선 카단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 어느 곳보다 웅장해야 했을 리베라 왕국의 왕성은 초라했고 고요했다.

활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성.

그 어떤 압박감도 줄 수 없는 거대한 성 앞에 카단은 괜히 한숨이 내쉬어졌다.

‘일단 가볼까?’

딱히 왕성에 위험 요소는 없어 보였다. 살기 위해 성을 버리고 도망친 왕족들이 함정 따위를 설치할 리는 없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왕성 안에 들어선 건 아니었다.

-함정으로 보이는 건 없어요!

-결계도 안 보여요!

-내가 이렇게라도 왕성 안으로 들어오다니! 영광입니…. 아, 이게 아니라 사람도 마족도 안 보입니다!

레이스들을 소환해 미리 정찰을 보내 뒀고, 아무런 위험이 없다는 보고를 듣고 나서야 카단도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 모르니까 주변을 계속 살펴줘.”

카단은 그렇게 명령을 내리며 반쪽만 열려 있는 왕성의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도 많이들 죽었군.’

왕성 곳곳에 씁쓸하게 죽어간 이들의 시체가 보였다

왕족들과 다르게 도망치지 못한 이들이 억울하고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 듯싶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망자의 기억을 들춰보고 싶기도 했지만, 고통만 가득했을 그들의 기억을 엿보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3년이나 지났는데 거의 부패하지 않았네?’

이상한 게 하나 있다면 시체들은 마치 죽은 지 얼마 안 된 것만 같았다.

악취도 풍기지 않았으며, 썩어가지도 않았다.

‘마법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데?’

시체 상태가 멀쩡하다고 해서 언데드가 되어 일어나는 건 아니었다.

그 어떤 위협도 주지 못하는 시체들은 그저 미동도 없이 죽은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씁쓸한 마음이 들었지만, 카단이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언데드로 일으켜야 할 만큼 언데드 군단의 수가 부족한 것도 아니었고, 강력한 언데드가 될 재료 역시 보이지 않았다.

촥.

카단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잭 카터에게 받은 지도를 펼쳐 보았다.

‘지하 감옥을 통해서 가야 하는 건가?’

이왕 왕성에 들어온 김에 왕이 지냈던 곳을 구경하거나, 샬로트와 관련된 정보들을 얻어볼 생각도 했었다.

또 왕의 창고에도 들어가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지도에 표시된 지하 감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왕족들의 창고에 있는 것들은 언젠가 왕국의 재건을 위해 쓰일 재산이다. 욕심 부릴 필요는 없지.’

언젠가 마족으로부터 왕국을 되찾았을 때, 왕국은 재건을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할 것이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카단은 왕의 창고를 찾아갈 생각을 곧바로 접어버렸다.

“흠.”

지하 감옥에 들어선 순간 카단은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어쩌면 이게 옳은 선택이었겠지.’

카단의 시선은 철창 너머를 향했고, 철창 너머에는 화살에 맞아 죽음을 맞이한 시체들이 보였다.

‘전쟁이 만들어 낸 혼란 속에 범죄자들을 굳이 풀어줄 필요는 없었을 거야. 또 만약을 위해 죽인 거겠지.’

아마도 그들을 죽인 건 마족이 아닐 것이다.

가뜩이나 전쟁 때문에 혼란스러운 상황에 범죄자들까지 풀어 사람들에게 위협을 줄 필요는 없었을 테니.

만약 감옥 관리병들이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그들은 굶어 죽었을 것이다.

3년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이 씁쓸한 곳에서 버티지 못하고 아사했을 것이다.

‘풀어줄 수도, 관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죽일 수밖에 없었던 거야.’

쓸쓸하게 죽어간 범죄자들을 보며 괜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범죄자들을 옹호하는 건 아니었다.

벌을 받아 마땅한 죄를 지었으니 이곳에 갇혔을 테니.

물론 억울하게 갇힌 이들도 있었겠지만, 지금 와서 그걸 어떻게 판단한단 말인가?

지금 씁쓸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범죄자들을 모조리 죽일 수밖에 없던 그 상황이 안타까워서였다.

감옥을 둘러보던 카단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기쯤이라고 나와 있는데.’

고대 네크로맨서의 무덤으로 가는 길은 숨겨져 있었다.

결계 따위에 막혀 있는 것이 아닌 평범한 벽면에 어떤 마법 장치를 이용해 숨겨져 있었다.

‘응?’

다시 지도를 살피던 카단이 작게 적힌 글자를 발견했다.

[자하 감옥 복도 끝에 보이는 벽면. 아래쪽 벽면에 잉그마르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벽돌을 밀어 넣어야 합니다.]

아무래도 카단이 곤란한 상황에 부닥칠 것을 생각한 잭 카터의 배려였다.

‘잉그마르 가문?’

잉그마르 가문의 문양이라면 카단이 모를 리가 없었다.

샬로트 잉그마르가 죽기 17년간 꾸준히 봤던 문양이었으며, 지난 3년간 지겹도록 봤던 문양이었다.

환생 후 가장 많이 봤던 문양.

‘이 고대 네크로맨서의 무덤도 아버지가 관리하셨던 건가?’

카단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빠르게 벽면 아래쪽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여기 있다.’

벽돌에 희미하게 새겨진 용맹한 늑대의 문양.

그 문양은 자세히 보지 않았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연하게 새겨져 있었다.

덜컥.

지도에 적힌 대로 벽돌을 살짝 밀어내자,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벽돌이 안쪽으로 밀려났다.

스스스스스스!

순간 벽돌들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먼지를 풍기며, 복도의 끝을 막고 있는 벽면이 천천히 옆쪽으로 움직였다.

흙먼지가 잠잠해지기도 전에 지하 감옥 복도 끝에 새로운 길이 열렸다.

‘고대 네크로맨서의 무덤이라기에 스산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로군.’

고대 네크로맨서의 무덤으로 향하는 길엔 몬스터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오싹하기보단 평온한 마음이 들었다.

공기도 차갑고 습한 게 아닌 마치 숲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상쾌함을 전해주었다.

‘희한한 곳이군.’

용맹한 늑대의 문양. 잉그마르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을 관리한 건 샬로트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3년 이상은 방치된 곳일 텐데 그 어느 장소에 견주어도 손색없을 정도로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닌데.’

샬로트가 관리했다고 하니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난 3년간 샬로트의 흔적을 찾아다닐 때처럼 무언가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왕국 곳곳에 많은 흔적을 남기고 가셨네.’

카단은 짧게 웃음을 흘린 뒤, 다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문 앞에서 그의 걸음이 멈춰졌다.

‘확실히 결계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다.’

-함정 같은 건 없습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엔!

-반대편에서 확인해보고 왔는데 문은 열려 있네요?

-문 너머에도 적은 없습니다! 주인!

레이스들이 꼼꼼하게 문 너머와 근처를 탐색해준 덕분에 카단은 큰 고민 없이 오래도록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끼이이이익.

문이 열리자, 무덤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창고가 떠올려지는 공간이 보였다.

‘너무 대단한 걸 기대했었나? 평범해 보이니 오히려 아쉬운데?’

카단은 헛웃음을 삼키며 문 너머를 향했고, 이내 고대 네크로맨서의 무덤이라 알려진 공간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벽면에는 알 수 없는 언어들이 잔뜩 적혀 있었으며, 방 한가운데에는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관이 보였다.

‘아버지와 왕족들은 왜 이곳을 굳이숨겨놓고 관리했던 걸까?’

카단은 잘 모르겠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몇 번을 둘러봐도 딱히 특별해 보이는 걸 찾을 수는 없었다.

‘열어볼 생각은 없었는데.’

아무리 네크로맨서라고 해도 관을 아무렇지 않게 열고 다니는 건 아니었다.

도굴꾼이 아니고서야 시체가 든 관을 아무렇게나 열 수는 없었다.

시체를 되살려 전투한다지만, 죽음을 존중하는 마음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물론 네크로맨서의 성향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아버지가 관리했다기에 뭐라도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카단은 속으로 혀를 차며 거대한 관을 바라봤고, 이내 천천히 걸음을 옮겨 관 앞에서 멈춰 섰다.

척.

돌로 만들어진 관 뚜껑 위로 손을 올리고 약간의 힘을 줘 봤지만, 뚜껑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대신.

우웅!

석상에서부터 마법 장치가 발동되기라도 한 것처럼 요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푸른빛이 돌로 만들어진 관을 뒤덮었다.

‘함정?’

아니. 함정이라기엔 어떤 위협도 느껴지지 않았다.

푸른빛이 점차 강렬해지더니, 이내 관 위로 반투명한 존재가 나타났다.

그 순간 카단은 모든 사고가 정지되기라도 한 듯 굳어버리고 말았다.

-많이 컸구나. 카단.”

반투명한 존재의 정체는 다름 아닌 샬로트 잉그마르였다.

“아버지?”

어째서 이곳에 샬로트 잉그마르의 영혼이 있단 말인가?

“서, 설마 이곳에 영혼이 묶이기라도 하신 겁니까?”

카단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며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에 샬로트는 자상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내 영혼이라기보다 내 의지를 담은 마나일 뿐이다. 죽음을 예상하여 미리 이곳에 내 의지를 담아 뒀을 뿐이란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갑작스러운 아버지와의 만남.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도무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카단이 머뭇거리자, 샬로트는 반갑게 웃으며 카단을 살펴봤다.

-네가 여기까지 왔다는 건 아무래도 내 예상대로 마족들이 활동을 시작한 모양이구나.

“아버지. 도대체 어쩌다가….”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른다. 죽기 전에 찾아와 이 장치를 해 놓은 것이니.

아직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눈물이 나지 않았다.

감정이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충격 받은 사람처럼 멍하니 반투명한 샬로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죽음의 이유는 내가 마족들의 계획을 눈치채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숨겼기 때문이겠지.

카단이 멍하니 샬로트의 말만 듣고 있자, 샬로트는 말하던 것을 멈추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카단. 용케도 여기까지 찾아와 주었구나. 역시 내 아들이군.

그러자 샬로트가 목소리를 바꿔 자상하게 말을 건넸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니, 본론을 얘기하기 전에 잠시 얘기라도 나누는 것도 좋겠군.

이곳에 남겨진 샬로트의 의지는 4년 전, 그러니까 과거에 시간이 멈춰진 상태다.

샬로트의 입장에선 단 몇 달만의 아들이 훌쩍 커버린 것이니 눈앞의 카단이 조금은 낯설기도 했다.

-잉그마르의 후손답게 용맹하게 자라주었구나. 정말 자랑스럽다.

그 말에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카단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카단의 말에 샬로트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래. 지금은 어디까지 성취를 이뤄냈지? 내 아들이라면 성인이 되기 전에 6성은….

“8성입니다.”

카단이 조심스레 답하자, 샬로트가 놀랍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떠며 멈춰졌다.

-뭐?

“8성….”

-6성이 아니라 8성?

“네. 아버지.”

확답까지 듣고 나서야 샬로트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아무리 내가 가르치고 길렀다지만 8성이라고? 그 나이에? 재능이 뛰어나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나를 넘어설 정도는 아니었는데?

근엄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릴 때 봤던 장난기 가득한 샬로트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조차 반가웠는지 카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아이작을 만났느냐?

“네.”

-그 녀석이 널 개조한 건 아니겠지? 워낙 희한한 네크로맨시를 사용하는 놈이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이작 교수님에게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카단은 샬로트가 죽게 된 이후부터의 일들을 간략하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샬로트가 관에 남겨놓은 마나가 사라지면 샬로트의 의지도 사라졌기에 큼직한 사건들만 나열하듯 그에게 들려주었다.

-예상보다 상황이 심각하게 흘러갔구나. 아이작 녀석도 죽어버렸다니.

모든 이야기를 들은 샬로트가 낙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어댔다.

-너에게 물어볼 것도 많지만, 우선 이 이야기부터 해야겠구나.

눈앞의 샬로트는 마나로 남겨진 의지일 뿐. 실제 샬로트의 영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샬로트도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궁금한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중요한 건 전해야 할 말들을 모두 전해야 한다는 것.

-우선 내가 알아낸 마족들의 계획과 그들에게서 훔쳐온 열쇠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