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폭 네크로맨서-177화 (177/186)

제177화

벨리드가 용병왕의 소식을 가져올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용병왕께서는 지금 도시 트라팔가에 머물고 계신다고 하네요.”

변방의 도시 트라팔가.

카단에게는 익숙한 도시였다.

영웅 아카데미 시절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다녀오기도 했으며, 마족에 의해 죽은 앤서니를 데스나이트로 일으켰던 곳.

‘용병왕을 처음 만난 곳도 트라팔가였지?’

무엇보다 용병왕을 처음 만난 곳 역시 도시 트라팔가였다.

“알고 있죠? 트라팔가는 지금 저항군 기지라는 것.”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용병왕께서 원래 트라팔가에 머무셨습니까?”

“그건 아니에요.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트라팔가에 계신다고 하네요.”

바로 출발하시겠어요? 벨리드는 가볍게 웃으며 질문했다.

‘생각보다 오래 쉬었으니까.’

용병왕의 소식을 기다리며 도시 더글라스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했었다.

알비스와 블랑쉬와 만나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며, 더글라스 가문의 가주 오웬과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짧지만 가치 있던 시간을 보냈기에 조금은 아쉬움도 있었다.

이 평화를, 이 평온을 조금 더 느끼고 싶다는 욕구도 생겨났지만.

“네. 바로 출발하죠.”

평화와 평온보다 샬로트의 유언을 따르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카단은 큰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전에 친구들에게 말 좀 전하고 올게요. 말 안 하고 가면 서운해 할 것 같아서.”

“네. 그럼 준비하시고 광장으로 나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벨리드는 그렇게 하며 여관 문을 열고 밖으로 향했고, 카단도 곧바로 그녀를 따라 밖으로 향했다.

* * *

도시 더글라스에 새로 지어진 마탑 앞.

“벌써 간다고?”

알비스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카단에게 물었다.

“응. 용병왕께서는 워낙 자유롭게 돌아다니시니, 소식을 알았을 때 바로 출발해야지.”

카단은 피식 웃으며 알비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서 어디로 간다고?”

그러자 이번엔 팔짱을 끼고 있던 블랑쉬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도시 트라팔가. 용병왕께서 그쪽에 계신다고 하네.”

“제법 안전한 곳이네.”

365일 몬스터의 침공을 대비해야 하는 도시를 안전하다 표현하다니.

카단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3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왕국에서 세 번째로 안전한 곳이려나?”

저항군과 혁명군이 모여있는 곳. 게다가 지금은 용병왕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그만큼 안전한 도시는 또 없을 것이다.

“아무튼 다들 잘 지내고 있어. 또 기회가 되면 보겠지.”

카단 역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떨어지는 것이 아쉬웠지만, 해야 할 것이 있으므로 아쉬움을 뒤로 하려 했다.

“카단. 너도 조심해. 위험하면 언제든 도망치고.”

“오지랖 부리다가 어디서 죽지 마.”

알비스와 블랑쉬 역시 카단을 붙잡을 수 없었다.

목표가 확고하게 정해진 그를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

“그래. 둘 다 죽지 마라.”

짧게 인사를 끝낸 카단은 주저함이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카단이 향한 곳은 아직 자리 잡지 못한 피난민들이 머무는 여관 건물이었다.

“카단 님?”

카단이 여관 안으로 들어서자, 1층에서 커피를 마시던 잭 카터가 곧바로 알아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드리러 왔어요.”

카단이 방긋 웃으며 잭 카터에게 다가갔고, 잭 카터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아. 용병왕께서 계신 곳을 알아내신 겁니까?”

“네. 트라팔가에 계신다고 하네요.”

트라팔가로 향한다는 말에 안심이 되었는지, 잭 카터의 얼굴이 밝아졌다.

“왕국 북쪽으로 향하는 건 아닐지 걱정했는데, 다행이군요.”

“당분간 이 도시로 돌아올 일은 없을 것 같아서 인사드리러 왔어요.”

이어진 말에 잭 카터 역시 씁쓸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는 애써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스락.

잭 카터는 옆에 내려놓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카단에게 건넸다.

“이건 뭐죠?”

“제가 만든 고양이 사료입니다.”

느닷없이 고양이 사료를 왜 주는 거지? 카단이 눈을 끔뻑이며 잭 카터를 바라봤다.

“길고양이들이 보이면 이 사료를 하나씩 먹여주십시오.”

단순히 길고양이들의 배를 채워주라는 의미는 아닐 것 같았기에 카단은 이어질 잭 카터의 말을 기다렸다.

“길고양이들을 통해 카단 님이 계신 곳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카단이 위험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저항군이나 혁명군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함.

잭 카터의 의도를 알게 된 카단은 피식 웃으며 그가 건넨 고양이 사료를 아공간 속으로 집어넣었다.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은 이것 말고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죄송할 뿐이죠.”

“죄송하긴요. 덕분에 아버지도 만났잖아요.”

잭 카터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카단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네. 몸조심하십시오. 카단 님.”

두 사람은 짧게 악수했고, 카단은 곧바로 발걸음을 돌려 여관을 빠져나갔다

“부디 무사하시길.”

잭 카터는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카단이 나간 여관 문을 바라봤다.

* * *

도시 트라팔가의 서쪽 성문.

파앗!

번쩍이는 빛과 함께 카단과 벨리드가 성문 앞에 나타났다.

“누, 누구냐!”

두 사람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성문을 지키던 문지기들이 깜짝 놀라며 창을 겨눴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해요. 혁명군의 벨리드입니다.”

벨리드는 곧바로 품 안에서 혁명군의 표식이 그려진 서류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벨리드 님…?”

혁명군의 표식을 확인한 문지기들이 깜짝 놀라며 겨눴던 창을 거두며 고개 숙여 인사를 전했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아닙니다. 할 일을 하셨을 뿐이니. 아, 그리고 이 옆은 요즘 유명한 인물이에요. 구원의 영….”

“네크로맨서. 카단이라고 합니다.”

벨리드가 카단의 이명을 말하기 전, 카단이 재빨리 그녀의 말을 끊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네크로맨서 카단이라면….”

“구, 구원의 영웅!”

카단이 급히 벨리드의 말을 잘라냈지만, 이름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문지기들은 카단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챘다.

“혼자서 도시 라다메스를 구원하셨다는 그 영웅이시군요!”

“그 전에 도시 로베른의 사람들을 모두 구해내셨다고! 새로운 영웅이셔!”

문지기들은 유명인을 만났다는 듯 들뜬 목소리로 카단을 불러댔다.

카단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푹 숙였고.

“어머. 귀가 빨개지셨는데요?”

벨리드는 그런 카단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아, 그런데 어떤 용무 때문에 오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한참 기뻐하던 문지기들이 재빨리 정신을 차리며 질문을 던졌다.

“용병왕 님이 도시에 계신다고 들었어요. 혹시 다른 곳에 가셨나요?”

“아뇨! 아직 도시에 계실 겁니다! 들어가십시오!”

문지기들이 길을 내어주며 성문을 열었고, 카단과 벨리드는 곧바로 문 너머를 향해 걸어갔다.

‘전보다 분위기가 좋아졌군.’

도시 트라팔가로 들어서자 카단은 감회가 새롭다는 듯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많이 바뀌었죠?”

카단이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 벨리드가 그와 발걸음을 맞추며 질문을 던졌다.

“네. 분위기가 밝아졌네요.”

3년 전만 해도 이곳은 불안함과 우울함이 느껴지는 도시였다.

그러나 저항군과 혁명단이 도시에 머물게 되며 분위기가 180도 바뀌어버렸다.

절망보다는 희망이 더 많이 느껴진다고 할까?

더는 이 도시에서 우울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저항군과 혁명단이 머무는 덕분에 몬스터들의 위협에서 벗어났어요.”

하긴 저항군과 혁명단이 있다면 따로 지원군이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저항군과 혁명단이 기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몬스터들의 침공을 막아낼 테니.

“물론 그렇다고 몬스터 침공이 멈춘 건 아니에요. 여전히 동쪽 성벽에서는 몬스터들이 몰려온다고 알고 있어요.”

콰아아앙!

벨리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쪽 성벽 쪽에서부터 폭발음이 들려왔다.

아마도 누군가가 꽤 강력한 마법을 쓴 듯싶었다.

“들었죠? 여전히 전투가 가득한 도시랍니다.”

“도와주러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카단이 조심스레 묻자, 벨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위험한 상황이라면 주민들이 이렇게 돌아다닐 수가 없겠죠?”

벨리드가 평온하게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주민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위험한 상황이라면 이처럼 평온하게 걸어 다닐 수 없을 것이다.

위험을 알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질 것이고,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에 숨어 전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그렇군요.”

카단은 평화롭게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을 보며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가보죠. 용병왕이시라면 분명 저기 계실 겁니다.”

벨리드가 가리킨 곳은 도시 중앙에 웅장하게 지어진 영주성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영주성에 도착한 두 사람은 병사들의 안내를 받아 회의실에 도착하게 되었다.

“다들 이 안에 계십니다.”

병사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며 회의실을 가리켰다.

“미리 말씀은 드렸으니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병사의 말에 따라 벨리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두드렸고.

똑똑.

“들어오세요.”

기다렸다는 듯 회의실 문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도시의 주인 변경백 아론 트라팔가, 용병왕 그리고.

‘저 사람은 누구지?’

낯선 사람도 회의실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위대한 왕국의 가디언. 필립 님을 뵙습니다.”

그때 앞서 들어갔던 벨리드가 낯선 사람을 향해 무릎을 꿇고 인사를 전했다.

낯선 이의 정체는 7인의 가디언 중 하나였다.

카단이 봤던 가디언은 길버트, 디미타르, 아이작. 그리고 배신자 해밀턴뿐이었고, 필립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 사람이 필립….’’

그의 이름을 처음 듣는 건 아니었다. 뛰어난 궁술 실력으로 가디언이 된 자.

2차 마족 전쟁부터 그가 세운 위대한 전설과 업적은 어릴 적 책을 통해 이미 접했었다.

백발이 무성하지만, 강인해 보이는 외모와 굵직하며 유연해 보이는 육체를 지닌 중년의 남성.

‘확실히 가디언은 다르군.’

존재 자체만으로 공기를 뒤바꾸는 가디언을 보며 카단은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벨리드. 오랜만이군.”

필립은 가볍게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고.

“위대한 왕국의 가디언. 필립 님을 뵙습니다.”

이어서 카단도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자네가 샬로트의 아들이로군. 일어나게. 얼굴이나 제대로 봐보고 싶으니.”

필립의 말에 카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필립은 눈을 작게 뜨며 카단을 훑어봤다.

“아무리 봐도 샬로트 녀석과 닮은 구석이 없는데?”

카단은 샬로트의 양아들이었다.

마음으로 낳은 자식이었기에 당연하게도 외적인 부분으로 그와 닮은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모든 기억을 지니고 있는 카단은 자신이 양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를 더 닮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카단은 샬로트에게 들었던 하얀 거짓말을 그대로 필립에게 들려주었다.

“그런가? 아쉽군.”

필립은 씁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카단에게 다가왔다.

“카단 잉그마르. 아버지의 일은 진심으로 사과하마.”

그리곤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카단에게 사과를 전했다.

“괜찮습니다. 이미 길버트 님과 디미타르 님께 사과를 받았습니다.”

“나 역시도 죄책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네. 해밀턴의 혀 놀림에 넘어간 멍청한 나를 용서하게.”

“사과는 제가 아니라 먼 훗날 아버지를 만난다면 그때 아버지께 직접 해주세요.”

카단이 담담하게 대답했고 필립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카단!”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용병왕은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 찾아왔다고 했지? 무슨 일인가? 혹시 소원을 말하러 왔나?”

가볍게 던져진 그 말에 무거웠던 공기가 환기되었고, 카단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직접 찾아올 정도라니, 조금은 긴장되는군. 그래. 말해보게. 내가 뭘 해주길 바라는 거지?”

용병왕이 히쭉 웃으며 다가왔다.

“과거 아이작 님과 내기에서 승리 후 받아 가신 신발이 있지 않으십니까?”

“신발? 아, 있지.”

“그 신발을 받고 싶습니다.”

“그 낡아빠진 신발을? 아니, 애초에 그 신발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용병왕이 놀란 듯 묻자, 카단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지가 알려주셨어요. 실은 그 신발이 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던 신발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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