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느, 늦었다.’
한 여성이 하얀 머리칼을 휘날리며 트라팔가 동쪽 성문을 향해 급히 달려갔다.
웅장한 높이의 동쪽 성문이 보이자 그녀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와….”
이내 성문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성문 앞에 모인 자들은 리베라 왕국의 국민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유명인들이었다.
‘가디언이신 필립 님과 용병왕 제이드 님. 어라? 벨리드 교관님도 계시네?’
가디언 필립, 용병왕 제이드, 불멸의 불꽃으로 불리는 벨리드까지.
고작 셋뿐이었지만, 웬만한 요새는 함락시킬 수 있을 만한 전력이었다.
‘나에게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내가 저분들과 함께 작전에 나가는 날이 오다니.’
하얀 머리칼의 여성.
영웅 아카데미 출신의 네크로맨서 ‘에스더’는 상기된 얼굴을 하며 성문을 향해 달려갔다.
“안녕하십니까! 네크로맨서 에스더라고 합니… 어?”
성문 앞에 도착해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도중, 그녀의 눈에 익숙하고 그리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카단?”
용병왕의 거대한 몸집 때문에 가려졌던 카단.
그를 발견한 순간 에스더는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오랜만입니다. 선배님.”
카단은 멈춰버린 에스더를 향해 반갑게 웃으며 다가갔다.
그렇게 에스더 앞에 멈춰 선 순간.
퍼억!
에스더의 작은 주먹이 카단의 배에 꽂혔다.
“윽!”
물론 손쉽게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지만, 카단은 그녀의 주먹을 피하지도 막지도 않았다.
“어디서 맞아 죽은 건 아닌지 걱정했잖아!”
에스더는 눈물을 글썽거리면서도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외쳤다.
“3년. 너무 오래 연락을 못 드렸네요. 선배님은 잘 지내셨죠?”
카단이 자상하게 웃으며 말하며 에스더의 어깨를 두드렸다.
카단의 얼굴에서 스승인 아이작의 얼굴이 겹쳐 보였기 때문일까?
에스더가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니, 우리한테 먼저 인사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때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용병왕 제이드가 투덜거리듯 혼잣말을 내뱉었고.
푹.
옆에 있던 필립이 제이드의 옆구리를 찔렀다.
“놔둡시다. 오랜만에 만난 듯한데.”
“쯧. 생각해보니 저 녀석들 아이작의 마지막 제자들이었군요.”
제이드는 괜히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고, 필립도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마치 잠깐이라도 인사를 나눌 시간을 주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잠시 후.
에스더가 감정을 추스르고 나서야 절망의 평원 정찰대는 정식으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뭐, 각자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길게 얘기는 나눌 필요는 없겠죠?”
필립이 가볍게 웃으며 말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 필립입니다. 이번 정찰대의 대장을 맡았고, 우리의 임무는 절망의 평원을 정찰하는 것입니다.”
여태껏 그 누구도 절망의 평원 깊은 곳까지 들어간 사람이 없었다.
“아직 개척되지 않는 지역이고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최강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사람들이 모였지만,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필립은 그렇게 말하며 제이드를 바라봤다.
“특히. 드래곤 헌터가 되겠다며 개인적인 행동을 하다간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거, 왜 저를 보고 말씀하십니까? 인간이 드래곤을 무슨 수로 잡는다고.”
용병왕 제이드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의 대답에 필립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다시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드래곤이 없다면 곧바로 병력을 데려와 절망의 평원을 장악할 생각입니다.”
평생 도시 트라팔가를 괴롭혔던 몬스터들은 전부 절망의 평원에서부터 몰려왔었다.
만약 드래곤이 없다면 이번 기회에 그 근원을 뽑아내는 것 역시 정찰대의 목표 중 하나.
“만약 드래곤이 있다면, 위치를 기억해놓고. 마족들을 유인할 작전을 새로 짜야겠죠.”
“네. 알겠습니다.”
“절망의 평원까지 전투 없이 직행할 것입니다. 절망의 숲에서 몬스터의 공격에 일일이 대응하진 마십시오.”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이 오면 활로 쏴 죽여버리겠다. 필립은 그렇게 말을 끝내며 성문 너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시죠. 도시 트라팔가의 새로운 역사를 세우러.”
* * *
절망의 숲에 들어선 순간부터 몬스터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무시하고 전진하십시오.”
다행히 신경 쓰일 정도로 강한 몬스터는 등장하지 않았다.
달려드는 몬스터 대부분은 고블린이나 코볼트 따위의 하급 몬스터뿐.
지금의 정찰대에게 있어서는 개미와 비슷한 존재들이었다.
덕분에 정찰대는 무난하게 절망의 숲을 빠져나왔고.
“이제 절망의 평원이로군.”
절망의 평원 앞에서 전진을 멈추게 되었다.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땅.
보는 것만으로도 적막함이 느껴지는 지역이었다.
“시야가 트여있는 건 다행입니다. 이곳부터는 제가 선두에 설 테니, 다들 잘 따라오시죠.”
필립은 몇 번의 주의를 전한 뒤, 아공간을 열어 활을 꺼냈다.
이제부터는 가디언인 그 역시도 긴장하고 움직이겠다는 뜻.
그 모습을 보며 정찰대원들도 언제든 싸울 수 있도록 준비를 끝내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절망의 평원이라더니. 정말 아무것도 없군.”
용병왕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긴장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절망의 평원에는 위협이 될 만한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생명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 잠시만요.”
뒤따라오던 카단이 무언가 생각났는 지 손을 들며 걸음을 멈췄다.
일행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걸음을 멈춰 카단을 바라봤다.
번쩍!
카단은 재빨리 루나를 소화했고, 루나는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봤다.
“뭐야? 여긴 어디야?”
갑작스러운 소환에 당황한 듯싶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린 루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카단을 바라봤다.
루나가 등장하자 필립이 흥미롭다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될 무서운 꼬마로군.’
귀엽게 생긴 아이였지만, 어쩐지 이질적인 강함이 느껴졌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필립이 놀라는 사이, 카단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루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루나. 3년 전 네가 이질적이고 불쾌한 기분이 나서 가까이 가고 싶지 않다고 했던 곳이야.”
“어? 뭐?”
그 말에 루나가 깜짝 놀라더니 재빨리 주변을 둘러봤다.
보이는 건 생기를 잃어버린 땅뿐이었다.
“하….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야?”
“네가 느꼈던 그 불쾌한 기운의 원인을 찾는 중이야.”
카단은 루나에게 정찰대의 임무와 목적에 대해 알려주었고, 루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진 않지만, 뭐 어쩌겠어.”
“그 불쾌한 기운 여전히 느껴져?”
“응. 여전해. 이곳에 오니까 더 진하게 느껴져.”
루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어딘가를 바라봤고, 카단은 정찰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이 길을 안내해줄 겁니다.”
“그 아이는 누구지? 당연히 사람은 아닐 테고.”
필립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고, 카단은 미소를 지으며 루나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루나라는 이름을 지닌 뱀파이어입니다. 모습은 이래도 이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요.”
“뱀파이어?”
가디언인 필립조차도 뱀파이어를 가까이서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신기하다는 듯 루나를 바라봤고, 루나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필립을 바라보며 말했다.
“뭘 봐? 뱀파이어 처음 봐?”
“그래. 처음 본다. 굉장히 강해 보이는구나.”
필립이 자상하게 웃으며 말하자, 루나가 괜히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아무튼 그 기운이 느껴지는 곳까지 안내해주면 된다는 거지?”
루나가 다시 카단을 향해 묻자, 카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혹시 그 기운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아?”
“아니. 모르겠어. 나도 처음 느껴보는 기운이야.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서 따라와.”
루나는 그렇게 말하며 총총걸음으로 평원을 거닐기 시작했고, 정찰대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여기야.”
루나가 허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응? 아무것도 없는데?”
그녀가 가리킨 곳에 보이는 것은 여전히 넓게 펼쳐진 생기 없는 평원이었다.
그렇기에 정찰대원들이 고개를 갸웃하며 루나를 바라봤다.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왜 걸음을 멈춰 허공을 가리킨 것일까?
“혹시 결계?”
그때 벨리드가 무언가 떠올랐는 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고, 루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이건 그 수염이 긴 마법사가 와도 풀 수 없는 결계인데?”
루나가 말하는 수염이 긴 마법사라면 분명 가디언 길버트일 것이다.
‘길버트 님도 풀 수 없는 결계라고?’
결계 너머에 무엇이 있기에 가디언조차 풀 수 없는 결계 마법이 걸려 있는 것일까?
휙, 휙-
그 말에 용병왕 제이드가 창을 길게 잡고선 루나가 가리킨 곳에 창을 휘둘러보았다.
창은 그 어떤 걸림도 없이 허공을 휘저었고, 제이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봐, 꼬마.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결계는 다른 공간으로 연결을 막고 있어. 이 결계는 이렇게 왔다 갔다 해도 문제가 없어.”
루나는 결계 마법을 풀지 않는 한, 숨겨진 공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며 자기가 가리켰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숨겨진 공간이라 이거군.”
필립은 무언가 고민하듯 턱을 쓰다듬었다.
“뱀파이어야. 혹시 방법이 없는 것이냐?”
가디언조차 풀 수 없는 결계 마법이라지만, 그래도 숨겨진 공간으로 들어갈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필립은 작은 희망을 지닌 채 물었고, 루나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마도 숨겨진 통로가 있을 거야. 이 정도의 결계라면 따로 입구를 만들었겠지. 물론 이것도 확률은 낮아. 확실하진 않다고.”
루나의 말에 필립이 정찰대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곳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숨겨진 공간을 찾아보는 게 어떻습니까?”
필립의 제안에 대원들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까지 왔는데 아무런 수확도 없이 돌아갈 수는 없었다.
숨겨진 공간이 있다면 그 너머만큼은 꼭 확인해보고 싶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몬스터들이 몰려오는 근원지라도 찾아낼 생각이었다.
“팀을 나누도록 하죠. 한 명은 베이스 캠프를 지키고, 나머지는 2인 1조로 해서 한 팀은 몬스터의 근원지를. 한 팀은 숨겨진 공간의 통로를 찾읍시다.”
필립의 말에 대원들은 재빨리 움직였고, 금방 5개의 막사가 절망의 평원 위에 지어졌다.
“자, 그럼 잠시 회의를….”
다 지어진 막사를 바라보며 필립이 무언가 말을 이어가려 할 때.
쿠구구구구구구구!
멀리서부터 흙먼지가 크게 일어나더니,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흠. 이제야 우리를 반겨줄 녀석들이 나타난 것 같군요.”
척.
필립이 활을 꺼내며 말하자, 대원들은 자연스레 전투를 준비했다.
“켄타우로스입니다. 쉬운 녀석들이 아니니 다들 조심하십시오.”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몬스터들의 정체는 말의 목 부분에 사람의 상체가 붙어 있는 듯한 형태의 몬스터.
지능이 뛰어나고 강력한 몬스터였다.
“최상급 몬스터로 분류된 녀석들이 저렇게 단체로 달려오다니. 끔찍하군.”
용병왕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둘렀고.
“신고식 한번 화끈하군요.”
벨리드는 한숨을 내쉬며 재빨리 마나를 활성화했다.
그리고 두 명의 네크로맨서는 서로를 바라보며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카단, 켄타우로스를 언데드로 일으킨 적 있어?”
“아뇨. 쓸만한가요?”
“응. 아주 좋은 재료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