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3화
루나가 드래곤 레어에서 가져온 물건들은 그야말로 억 소리 나는 물건들뿐이었다.
고대부터 존재한 보석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고, 가치를 판단할 수 없는 뛰어난 마도구들이 바닥에 놓였다.
“드래곤들이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드래곤 레어에서 나온 보물들을 확인한 사람들은 모두 헛웃음을 삼키며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 이건 얼마를 불러야 하지?’
‘전쟁 시대에 돈은 가치가 없는데?’
카단과 루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가치가 비슷한 물건과 교환할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성유물이 아닌 이상 드래곤 레어에서 나온 마도구와 교환하긴 힘들 것 같았다.
그때.
“하나씩 골라.”
루나가 의기양양하게 보물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루나의 발언에 사람들은 얼어붙은 표정이 되었다.
“아니, 이런 걸 그냥 받을 수는 없어. 최소한 교환이라도 해야 해.”
필립은 고개를 저으며 재빨리 아공간을 열어 교환에 쓸 만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고.
“저, 정말이냐?”
제이드는 바닥에 나열된 창들을 살피며 군침을 흘렸다.
“너희들이 강해지면 카단이 덜 위험해지겠지! 그러니까 골라. 하나씩만! 그냥 받기 그러면, 나중에 카단이 뭐 부탁하면 잘 들어주고!”
루나가 자신 있게 말하자,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쁨과, 정말 그래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뒤섞인 얼굴들.
“마음 바뀌기 전에 고르는 게 좋을걸?”
이어진 루나의 말에 사람들은 눈독 들이고 있던 물건들을 하나씩 골라 들었다.
“살면서 본 활 중 가장 뛰어난 활이다. 이 아름다운 자태를 그 어떤 활이 따라올 수 있을까?”
“이 창이 제일 마음에 드는군.”
“루나. 난 이 스태프로 할게요.”
“저는 이 로브면 됩니다!”
각자 필요한 물건을 고르자, 루나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적어도 무기 때문에 마족에게 졌다는 변명은 할 수 없겠지?”
네 사람에게 하나씩 필요한 것을 건네줬음에도 아직 바닥에는 귀한 아티팩트들이 가득 널브러져 있었다.
“루나. 이 많은 것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카단이 갸웃하며 묻자, 루나는 카단을 가리켰다.
“너한테 줄 건데? 어차피 나한텐 쓸모도 없어. 뱀파이어의 무기는 피잖아?”
그 말에 정찰대 사람들이 전부 부럽다는 시선으로 카단을 바라봤다.
카단은 헛웃음을 삼키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루나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고맙다. 루나.”
이내 카단의 시야에 수많은 보물과 다양한 무기, 방어구가 들어왔다.
‘슬슬 녀석을 사용할 때가 됐구나.’
* * *
정찰대가 도시 트라팔가로 복귀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드래곤 하트가 절망의 평원에서 사라졌기 때문일까?
더는 절망의 평원에서부터 몬스터 군단이 밀려오지 않았다.
“이, 이렇게 평화로워도 되는 거야?”
“정말 몬스터들이 몰려오지 않네.”
“아니, 트라팔가의 평화가 일주일을 넘긴 적이 있었던가?”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자, 오히려 도시 사람들이 불안해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몬스터와 전쟁을 치러야 했었기에 긴 평화가 그들에겐 익숙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폭풍전야라며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고, 누군가는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를 즐기기도 했다.
“정말 제대로 해낸 모양이군요.”
트파팔가의 주인. 아론 트라팔가는 성벽 너머의 고요한 광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믿을 수 없다는 감정과 기쁨의 감정이 섞여 있었다.
트라팔가 가문의 평생의 숙원.
절망의 평원을 정복하고 도시 트라팔가의 평화를 가져오는 그 숙원이 이렇게 이루어질 줄이야.
“전부 카단 덕분입니다.”
그 옆에 있던 필립이 자상하게 웃으며 카단을 가리켰고.
“카단.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도시가 그대에게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론은 카단에게 다가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이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단은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그를 일으키려 했지만, 아론은 고개를 숙인 채 일어나지 않았다.
뚝….
눈물이 떨어져 성벽을 적셨고, 아론의 몸이 조금씩 들썩였다.
믿을 수 없는 평화가 찾아오고 숙원이 이뤄져지자, 그의 어깨를 짓누르던 모든 부담감이 덜어진 듯싶었다.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에 눈물을 흘렸고, 이제 더는 병사들의 죽음을 냉정히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그는 무릎을 꿇고 아이처럼 울어댔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카단은 눈물을 흘리는 아론의 어깨 위로 손을 올리며 말했다.
“마족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여전히 트라팔가의 도움이 필요하며 이곳의 주인은 아론 님이십니다.”
마음을 놓아선 안 된다. 카단은 그렇게 말하며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비록 따뜻한 위로는 아니었지만, 아론은 카단의 말에 공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트라팔가 가문의 숙원은 이뤄냈으나, 리베라 왕국의 국민으로서의 숙원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카단.”
이내 마음을 추스른 아론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벨리드가 천천히 카단에게 다가왔다.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인가요? 카단.”
이곳에서의 볼 일은 원래 용병왕에게 샬로트의 유품을 받는 일이었다.
원래의 목적은 이미 달성했으며, 추가적인 목적까지 달성했으니 더는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다음은 가디언 디미타르 님이 계신 에어록손으로 갈 생각입니다.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언제 출발할래요?”
인사를 해야 할 사람들이 전부 성벽 위에 모여 있었기에 따로 도시를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인사만 드리고 출발하기로 하죠.”
카단은 그렇게 말하며 가장 먼저 에스더에게 다가갔다.
“선배님. 이건 제가 따로 정리한 네크로맨시 책입니다. 7성 네크로맨서에게 필요한 마법들과 전투법들이 적혀 있으니 도움이 될 거예요.”
“어? 이,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
“괜찮아요. 한 명이라도 더 강해져야 빨리 왕국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에스더는 7성 네크로맨서가 되었다. 그녀 역시 8성의 벽을 넘지 못한 상태였다.
언제 8성이 될지 모르나, 그녀 역시 저항군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전력.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강해진다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고, 고마워. 나는 딱히 줄 게 없는데….”
“무리하지 마시고, 목숨부터 지켜요. 아이작 교수님의 가르침을 이어갈 네크로맨서는 이제 저희 둘 뿐이잖아요?”
“다른 선배들도 계실 텐데? 비록 2년 전 소식이 끊기긴 했지만….”
에스더의 말에 잠시 침묵이 찾아왔고, 카단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선배. 왕국이 평화를 되찾았을 때 영웅 아카데미 교수 자리는 선배한테 양보할게요. 그러니 끝까지 살아남으세요.”
카단은 그렇게 말하며 에스더의 어깨를 두드렸고, 에스더는 눈물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알겠어.”
에스더와 인사를 끝낸 카단은 이어서 용병왕을 찾아갔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이드 님. 이번에도 정말 감사했어요.”
“에어록손에 간다고 했지?”
“네.”
“마티아스 놈을 보겠구나. 3년 전 영웅 아카데미에서 헤어진 이후로 쭉 못 봤을 거 아냐?”
마티아스. 그리운 이름이 들리자 카단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랜만에 보고 싶기도 하네요. 소식도 궁금하고.”
“뭐, 스승을 바꾸고 승승장구하는 배은망덕한 놈이지.”
제이드는 툴툴대며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마티아스가 디미타르에게 배우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용병왕과 인연을 끊은 건 아니었다.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
그저 마티아스에겐 또다른 스승이 생긴 것이고, 용병왕은 제자가 강해지는 걸 보며 시기와 질투를 할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티아스의 성장을 그 누구보다 기뻐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제 소원권 없으니까 날 찾아올 일이 없겠구나?”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기하러 찾아뵙겠습니다.”
“내기?”
“내기에서만 이기면 소원권이 생기는데, 이만한 장사가 없잖아요?”
이어진 카단의 말에 용병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스승의 그 제자라더니. 역시 네크로맨서들이란. 쯧.”
순간 카단의 모습에서 아이작이 보였고, 용병왕은 갑자기 차오르는 눈물을 감추려 괜히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또 찾아올 때까지 건강하세요.”
카단은 그렇게 용병왕과 인사를 마무리하며 마지막으로 필립에게 걸어갔다.
“마치 어릴 적 샬로트가 살아 돌아온 느낌이군.”
필립은 그리운 시선으로 카단을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샬로트와 닮은 구석은 없지만 말이야.”
그 말에 카단은 가볍게 웃음을 지었고, 필립은 그런 카단에게 다시 말을 이어갔다.
“카단. 소문을 듣자 하니 마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어쩌면 큰 전쟁이 시작될 수도 있다.”
“필립 님. 녀석들이 노리는 건 필립 님을 포함한 가디언분들입니다.”
“당연하겠지. 적군의 가장 강한 자들을 쓰러트려야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할 테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 녀석들은 가디언들을 제물로 삼아 마계의 문을 열 계획이에요.”
카단은 며칠 전 샬로트에게 들었던 마족들의 목적을 필립에게 전해주었다.
“마, 마계의 문?”
“녀석들의 목적은 이 세계를 마계로 바꿔놓는 것입니다. 아마도 마계의 문을 여는 데 필요한 재물은 가디언급의 강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필립은 그 말에 씁쓸하다는 듯 혀를 차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죽어도 전장에서 죽어야겠군.”
“그러니 부디 몸조심하세요.”
“난 걱정하지 말게. 어차피 뒤에서 활이나 쓰는 늙은이니. 크게 위험하진 않을 거야.”
필립이 자상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작전을 조금은 변경해야겠지만, 어쨌든 고맙다. 놈들의 목적을 알게 된 건 정말 큰 이득이지.”
다른 가디언들에게도 전해주게. 필립은 그렇게 말하며 카단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필립과의 인사까지 끝낸 카단은 다시 벨리드 교관에게 돌아갔다.
“이제 출발해도 됩니다.”
“그런데 에어록손은 무슨 일 때문에 가시는 건가요? 그곳에도 샬로트 님이 남긴 무언가가 있는 건가요?”
“네. 정확히는 야만족들이 있는 곳에 가야 하지만, 겸사겸사 디미타르 님에게도 전할 말이 있어서 에어록손부터 들리려고요.”
“야만족이요?”
트라팔가가 평생 몬스터 군단에게 고통을 받던 도시라면, 에어록손의 골칫거리는 주기적으로 쳐들어오는 야만족이었다.
“야만족은 지능은 뛰어나지 않아도 꽤 강한 놈들이에요. 안심할 수 있는 상대들이 아닌데?”
“전쟁을 하러 가는 건 아닙니다. 최대한 전투가 일어나지 않도록 은밀하게 움직일 생각입니다.”
카단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벨리드는 헛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말릴 수도 없고, 경고한다고 해서 계획을 바꿀 사람도 아니다.
게다가 걱정하기가 무색하게도 카단은 늘 최고의 결과를 선보였으니.
“그럼 출발하죠.”
벨리드는 필립과 제이드, 에스더와 아론 트라팔가를 향해 가볍게 인사를 전한 후 카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에어록손이라. 오랜만이네.’
카단은 잠시 추억을 회상하더니, 곧바로 벨리드의 손을 붙잡았고.
파앗!
동시의 하얀 빛이 번쩍이며 두 사람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