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4화
에어록손 성벽.
왕국 최남단에 있는 저항군들의 첫 번째 기지.
‘3년 만인가? 다시 봐도 웅장하네.’
성유물 운반 임무 이후로 다시 찾아온 도시.
어쩐지 웅장한 성벽이 반갑기까지 했다.
‘전통이라면서 대뜸 대련하기도 했었는데.’
카단이 추억에 젖은 듯한 눈으로 성벽을 바라보자, 벨리드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걸었다.
“카단? 안 가요?”
“아, 네. 가야죠. 우선 디미타르 님부터 만나 뵙고 싶은데, 안에 계시겠죠?”
“웬만해선 여기를 벗어나지 않으세요. 3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은 더더욱 이곳을 지키는 데 온 힘을 다하시죠.”
왕국의 부름이 아닌 이상 디미타르는 웬만해선 에어록손 성벽을 지키며 살아왔다.
에어록손이 저항군의 기지가 되었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디미타르는 여전히 에어록손의 주인이었고, 야만족은 주기적으로 성벽을 넘기 위해 병력을 모아 쳐들어왔다.
물론 전과는 상황이 달랐다.
에어록손이 저항군의 기지가 되면서 자연적으로 병력이 충원되었으며 저항군의 전투력은 야만족을 막아내기에 충분했다.
어느덧 야만족은 저항군의 실전 연습 상대로 전락했고, 현재 에어록손 성벽은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확실히 전보다 평화로워졌군. 원래도 분위기가 이상하리만큼 좋았지만.’
카단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선 디미타르 님부터 만나 뵈러 갈까요?”
* * *
디미타르를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벨리드의 말대로 벨리드는 에어록손의 영주성에 머물고 있었고, 오늘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샬로트의 아들.”
영주의 의자에 앉아있던 디미타르는 반갑다는 듯 웃으며 카단과 벨리드를 반겨주었다.
“위대한 왕국의 가디언. 디미타르 님을 뵙습니다.”
카단과 벨리드는 예를 갖추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고, 디미타르는 얼른 고개를 들라며 손짓했다.
“됐어. 둘 다 인사는 그쯤 하고 고개를 들게.”
디미타르의 제안에 카단은 천천히 고개를 들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이런 시기에 잘 지내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자네는 어떻게 지냈나?”
디미타르도 지난 몇 달간 있었던 카단의 활약을 소문을 통해 들었었다.
마족과 전쟁이 시작되고 3년 만에 등장한 네크로맨서.
새로운 영웅의 등장. 그 새로운 영웅의 활약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빠르게 왕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저는 아버지의 흔적을 따라 다녔습니다.”
카단은 가볍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디미타르는 흥미롭다는 듯 카단의 이야기를 집중하며 들었다.
이내 일주일 전 드래곤 레어에 다녀온 이야기까지 끝내자, 디미타르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어댔다.
“범상치 않은 녀석인 줄은 짐작했지만, 설마 드레곤 레어까지 털어버릴 줄이야.”
3년 만에 나타난 카단의 행보는 어이없을 정도였다.
저항군과 혁명단도 어쩌지 못했던 도시에서 사람들을 구해냈고, 혼자서 도시를 탈환하기까지도 했다.
게다가 트라팔가의 영원한 숙원이었던 몬스터로부터의 평화까지 카단이 직접 이루어주었다.
이 행보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뭐, 인사나 하러 온 건 아닐 테고 여기엔 무슨 일로 왔지?”
카단이 목적 없이 움직일 리 없다고 생각한 디미타르는 곧바로 카단의 목적을 물었다.
“우선 마족들의 목적을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카단은 왕궁 지하 감옥 끝에 있는 ‘고대 네크로맨서의 무덤’에서 샬로트에게 들었던 마족과 관련된 이야기를 전부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녀석들의 목적이 나를 포함한 가디언들이라고?”
“네. 정확히는 가디언 급의 마나 하트를 지닌 인간들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마계의 문을 열 때 필요한 제물로서.”
“살면서 제물로 노려지는 건 또 처음이군. 그래서 녀석들이 전쟁에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던 건가?”
디미타르는 짐작 가는 상황이 있었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여댔다.
이상하긴 했다.
지금 마족이 전력을 다해 쳐들어온다면 가디언이라고 해도 살아남을 확률은 높지 않았다.
아마 마족이 더 적극적으로 전쟁을 치러댔다면 더 많은 도시를 차지했을 것이고, 어쩌면 왕국 전체가 그들의 손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네. 가장 중요한 제물인 가디언들이 죽지 않아야 했으며, 만일을 대비해 가디언급으로 성장할 인간을 기다리고 있던 거죠.”
카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인간들에게 찬양받는 영웅이 그들에게 필요했던 겁니다.”
“하긴. 전쟁을 치를 때마다 마족치곤 은근히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마족들은 일부러 약한 전력을 앞세워 전쟁을 치러준 덕분에 인간들 사이에서 수많은 영웅이 탄생했다.
“쯧. 이 사실을 알면 지금 영웅이라 불리는 녀석들 전부 기분이 별로 좋지 않겠구만.”
지금 왕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영웅들은 마족들이 연출한 무대 위에서 놀아난 인형에 불과했다.
영웅들의 등장과 그들의 성장 역시 마족들이 세운 계획의 일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감히 제가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다만, 디미타르 님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래. 고맙다.”
디미타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기분이 좋지 않은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쯧. 마족들에게 놀아나는 꼴이 되었는데,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군. 어찌 됐든 싸워야 하고 힘을 키워야 하니까.’
아무리 이 전쟁이 영웅들을 성장시키는 마족들의 연출이라고 할지라도 선택지는 그들을 막아내는 것 말고는 없었다.
전투를 피해 도망 다니려 해도 도망칠 곳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영웅이라 불리는 이들이 지켜야 할 이들을 무시하고 도망가는 선택지를 고를 리가 없었다.
“그래. 이 부분은 또 따로 고민해야 할 것 같고. 이곳까지 온 이유는 그게 끝인가?”
디미타르는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을 던졌고, 카단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개인적인 목적도 있기에 찾아왔습니다.”
“샬로트의 흔적이 이 근처에도 존재하나 보군. 그래, 내가 도울 건?”
“야만족들이 사는 곳에 가야 하는데, 허락을 구하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에어록손 성벽의 주적인 야만족들의 땅에 가는 일은 총 책임자에게 허락을 맡아야 할 것 같았다.
괜히 야만족들의 땅을 들쑤시고 다니며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간 곧바로 전쟁이 시작될 수도 있으니까.
“마음대로 해. 에어록손은 긴장감을 늦추는 일이 없으며 그 어떤 전쟁에도 대비되어 있다.”
야만족이 급습하더라도 막아낼 자신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디미타르는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 어떤 적의 침입도 허락한 적 없는 곳.
에어록손 성벽이 오랜 시간 견고할 수 있었던 건 늘 전쟁에 대비하고 있는 디미타르와 그의 병사들 덕분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대처할 자신이 있다는 그 모습에 카단은 조금 안심이 된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네. 감사합니다.”
“뭐, 바로 출발할 건가?”
“아뇨. 또 만나봐야 할 사람들이 있어서요.”
카단의 대답에 디미타르는 그 사람들이 누군지 알겠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벨리드. 자네는 오랜만에 나와 차 한 잔 어떤가?”
“좋습니다. 마침 혁명단 쪽에서도 전하라는 말이 있어서 디미타르님 과의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벨리드의 대답에 디미타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카단을 바라보며 어서 나가보라 손짓했다.
“녀석은 훈련장에 있을 걸세. 가본 적 있으니 어딘지는 알겠지?”
* * *
에어록손 디미타르 직속 기사들이 사용하는 훈련장.
3년 전 임무를 위해 에어록손에 왔을 때 디미타르의 직속 기사인 ‘라디아’가 안내해 주었던 그곳이었다.
‘그때 그 기사가 전통이라며 느닷없이 자기를 쓰러트리라고 했었는데.’
3년 전 기억을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흘린 카단이 추억의 젖은 눈으로 훈련장 건물 곳곳을 살펴봤다.
슉!
훈련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훈련장 정중앙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카단은 자연스레 시선을 옮겼고.
‘여전하군.’
익숙하고도 그리운 사람을 발견했다.
용병왕의 제자이자 영웅 아카데미에서 카단을 아껴주었던 선배인 ‘마티아스’가 눈을 가린 채 훈련을 이어가고 있었다.
반가움도 잠시. 인사를 건네려고 했지만, 훈련에 집중한 그를 방해할 수 없었기에 조용히 그의 훈련을 지켜보기로 했다.
‘음?’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 디미타르 밑에서 가르침을 받은 마티아스의 창술이 꽤 달라져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의 팔목에 둥그런 방패 하나가 묶여 있었고, 마티아스는 한 손만을 이용해 창을 휘둘러댔다.
‘공수의 균형을 잡으려는 건가?’
3년 전에는 저돌적이고 화려한 창술을 보여주던 마티아스였지만 지금은 꽤 정적인 움직임으로 창을 휘둘러댔다.
위협적인 느낌은 전보다 줄었다고 할 수 있지만, 확실히 방패 하나를 든 것만으로도 안전성이 생긴 듯한 느낌.
‘여전히 창끝은 날카롭네.’
변화가 있었다고 해도 재능은 사라지지 않았다.
방패와 창을 동시에 들었다지만, 마티아스는 여전히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더 위협적으로 발전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괜히 기대감이 부풀었다.
“휴.”
얼마나 지났을까?
열심히 창을 휘두르며 허공과 전투를 치르던 마티아스가 심호흡하며 차분히 몸을 정돈했다.
“왔냐?”
여전히 눈을 가린 상태였지만, 마티아스는 카단이 서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말을 걸어왔다.
다른 사람과 착각한 걸까?
카단은 괜히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에 입을 다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3년 만에 만났는데, 내 말도 막 무시하네?”
마티아스는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창을 들어 카단을 향해 겨눴다.
스윽.
그리곤 방패를 차고 있는 손으로 안대를 슬쩍 내리며 카단을 바라봤다.
“오랜만이다. 카단.”
“오랜만이에요. 선배.”
카단은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뭐해? 오랜만에 만났는데 대련 한 번 해야지?”
“다짜고짜 대련이요?”
“여기 와 봐서 알잖아? 다짜고짜 대련은 에어록손 전통이야.”
까딱까딱.
마티아스가 창끝을 까딱이며 말했고, 카단은 피식 웃으며 손목을 풀어댔다.
“후회하실 텐데…. 3년 전에 분명 제가 말했잖아요. 선배가 질 거라고.”
카단은 마티아스의 도발을 받아치며 말했고, 마티아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어댔다.
“우리 제대로 대련한 적이 없었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자신감 있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수 있는 거야.”
직접 붙어보면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마티아스는 그렇게 말하며 카단을 바라보며 오러를 활성화했고.
“좋습니다.”
카단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마나를 활성화했다.
“후배라고 봐주지 않을 거다.”
“선배라고 봐주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대련을 시작하려는 찰나.
“선배. 잠깐만요.”
카단이 무언가 발견하더니 곧바로 손을 들며 말했다.
“뭐야? 왜? 딱 집중하고 있었는데.”
“그 손에 든 방패. 어디서 많이 본 방패인데?”
어딘가 낯익은 방패였다.
“응. 맞아. 성유물. 우리가 운반했던 그 방패야.”
신성한 수호자의 방패.
디미타르의 대표적인 무기 중 하나인 성유물이 왜 마티아스의 손에 들려있는 걸까?
“디미타르 님이 선물로 주셨어. 이거 이제 내 방패야.”
“아니, 그건 좀 너무한 거 같은데? 후배랑 대련하는데 성유물까지 사용하실 겁니까?”
“뭐, 그럼 항복하든지.”
네크로맨서인 카단에게 신성력은 치명적인 약점.
그런데 신성력을 내뿜는 성유물을 들고 대련할 생각을 하다니.
“연습도 실전처럼 해야지. 그래야 실력이 느는 법이란다.”
마티아스는 어서 덤비라는 듯 손짓했고, 카단은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럼 저도 전력으로 갑니다?”
“그러던지.”
마티아스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하자, 카단은 피식 웃으며 작게 읊조렸다.
“죽음을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