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 - 0. 인생은 타이밍
그 왜, 흔한 말이지 않나. 인생은 타이밍이다. 주식 매수와 매도가 그렇고, 밀고 당기는 남녀관계가 그렇고, 9회 말 동점 2사 만루에 들어오는 실투가 그렇고, 미드에서 벌어지는 5대 5 한타가 그렇듯, 결국 순간이 인생을 좌지우지한다. 아무리 환영할 만한 일이라도, 그게 올바른 때에 벌어지지 않으면 그저 속으로 욕만 무더기로 나올 뿐이다.
그래서, 웬 장광설이냐고?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딱 그 짝이거든.
“당신, 미쳤어요?!”
오후의 평화롭고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봄날, 나는 누군가의 비명 같은 외침에 잠에서 깨어나 눈을 깜박였다. 어라? 나 책상 위에 앉아서 잠들었었나. 그런데 내 책상치고는 생긴 것이 굉장히 고급스러웠다. 마감도 훌륭하고, 책상의 윗면은 누가 열심히 왁스 칠하고 걸레질해놓은 듯 반들반들했다.
“아, 이제는 그냥 설명할 생각도 없다 이거예요?”
나는 멍하니 책상을 손으로 슥슥 문질러보았다. 파리가 날아와 앉으면 미끄러져 트리플 악셀을 뛸 것 같이 반질거린다.
쾅-!!
“당신-!!”
누군가가 책상을 내려치는 소리. 나는 고개를 번쩍 들고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여성. 나이는 20대 초반, 중반쯤 되었을까? 살면서 저렇게 예쁜 여성을 본 적이 있나, 싶었다. 풍성하고 탐스러운 금발을 허리께까지 기른, 벽안(碧眼)의 여성이었다.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벽안은 아름다우면서도 분노에 불타고 있어 무서웠다.
“좋아요, 그렇게 그냥 멍청하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있을 거라면, 저도 이 빌어먹을 파티에서 나가겠습니다. 당신보다는 아르옌을 찾아다니는 편이 훨씬 나을 테니까요.”
빌어먹을 파티? 아르옌?
그때, 내 의지와는 관계 없이 내 입이 벌어졌다.
“누구 마음대로 이 파티에서 나간다는 거지?”
뭐야 시발, 이 느끼한 목소리는.
내 입에서 나온 목소리였지만, 재빠르게 내 입을 틀어막고 싶을 만큼 자아도취적이고 멋을 잔뜩 부린, 낮은 목소리였다. 내가 한 말은 아니지만, 내 말을 들은 여성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하! 누구 마음대로긴, 제 마음대로죠. 당신은 나를 속박할 수 없어요. 그건 잘 알 텐데요.”
“잠깐-”
내가 내 주둥아리를 되찾고서 황급히 말한 순간이었다. 여성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의 금발이 고개에 따라 함께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됐어요. 더 듣고 싶지도 않네요. 성국(聖國)과도 마찰을 빚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이제는 절 붙잡지도, 쫓아오지도 마세요.”
휙.
그녀가 등을 돌리며 걸어갔다. 사무실로 보이는 이 방의 문이 열리고, 닫혔다. 금발의 여성은 문을 닫을 때까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복도를 따라 차츰 희미해져 갔다.
“…난리도 아니로군.”
다른 누군가의 씁쓸한 목소리. 남자의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웬 우락부락한 거인이 방의 한구석을 꿰차고서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옌을 쫓아낸 건 그렇다 치고, 아이시스까지 두 명이나 이탈하다니.”
아르옌, 아이시스. 주인공, 성녀. 그리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거한. 내 굳어있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한다. 어, 어?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빙의… 잠깐. 그런데, 누구를 쫓아내고, 누가 이탈했다고? 그리고 왜 저 소리를 나를 보면서 하는 거야?
내 얼어붙은 대가리를 향해, 거한이 마지막 일격을 내리꽂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용사님?”
아, 시발. 좆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