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 4. 다프네 에피폰 (2)
“앉으시죠.”
용사의 목소리는 겉보기와는 달리 낮았다. 그리고 다프네 그녀에 관한 소문을 들어본 적이 없는 듯했다. 다프네는 삐거덕거리는 머리를 흔들며 의자로 다가갔다. 아직도 자신이 도망가지 않고 이 면접장에 멀쩡히 걸어 들어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 멀쩡하게는 아닌가. 다프네는 어제의 취기가 아직 남아있는 듯 해롱해롱한 정신 상태로 의자에서 몸을 가누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죄송하다고 말하고 나가.
자신의 것이 아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프네는 움직이지 않았다. 저 건너편에 앉아있는 청록빛 눈이 나가지 말라며 말을 걸어오고 있는 것 같았다. 어째서 자신이 그렇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용사에게서 멀어질 수 없었다.
‘괜찮아. 이게 그냥 착각이라 해도, 아무런 반전 없이 떨어진다고 해도.’
다시 원래 살아가던 대로 살면 돼.
다프네는 그렇게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이미 저들이 자신을 거부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린 듯한 모양새. 용사 뒤편에서 팔짱을 끼고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는 거한과 눈을 마주친 다프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마 용사의 조력자, 게오르그라 했던가. 저 사람은 그냥 생긴 모습이 무서웠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용사의 말은 냉정함과 상냥함의 중간에서 줄다리기하는 듯했다. 무심함을 가장한 진심인지, 겉치레일 뿐인지. 어쩐지, 다프네는 그것이 참 용사다운 모습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끊임없이 흔들리던 다프네의 눈동자가 용사의 눈을 기준으로 고정되었다. 용사는 다프네가 침착함을 되찾자, 작게 미소를 지으며 손깍지를 끼었다.
“준비는 되셨나요?”
용사의 물음에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가 기다려준 건가? 나를? 다프네는 의아함에 눈썹을 찡그리려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는 황급히 눈을 부릅떴다.
“다프네 에피폰. 나이아 지방 출신. 4서클에, 마탑 졸업생. 모험가 경력은 2년차.”
용사는 중얼거리며 다프네의 이력을 읊었다. 타인의 목소리로 듣는 제 삶은 참 보잘것없었다. 저 서류에 적힌 두 줄짜리 경력. 다프네를 이 세상에 붙어있게 해주는 작은 단어들.
“왕도에 넘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군요. 마탑에 소속되기 전까지는 계속 나이아 지방에서 살고 계셨던 건가요?”
“네….”
용사는 흥미롭다는 듯 흠, 하며 숨을 내쉬다가 종이를 펼쳐 들었다. 용사의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거한, 게오르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용사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마치 용사의 행동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용사는 그 무시무시한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며 질문을 시작했다.
“우리 파티에 지원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아, 그… 그건….”
전형적인 질문이었다. 다프네는 더듬더듬 생각해보았던 대답을 풀어냈다.
“세상을 구해야, 아니,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청록색 눈은 다프네를 꿰뚫듯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이 그게 다냐고, 묻는 듯했다. 다프네의 보랏빛 눈이 흔들렸다. 말은 고를 필요가 없었다. 다프네는 머뭇거리면서도 하나씩, 말해내기 시작했다.
“…그 사명감도 있지만, 이번 기회에 저 자신을 바꿔보고 싶기도 해서.”
그렇지, 라고 용사의 눈이 말하는 것 같았다.
“요, 용기를 내서 지원해보았습니다.”
용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다프네는 용사가 어째서 자신의 대답에 미소를 짓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것이 비웃음이 아니기를 속으로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지원자분의 어떤 면모를 바꾸고 싶으셨던 거죠?”
“두려움을 극복하고 싶습니다.”
두려움이라.
용사는 그 단어를 입 안에서 음미하는 듯했다. 다프네는 이 두루뭉술한 대답에 관한 질문을 몇 가지나 더 받을 줄 알았지만, 용사는 한참을 가만히 다프네를 바라보다가, 이내 넘어갔다.
“좋습니다. 그럼, 다른 질문을 좀 해볼게요. 출신이 나이아. 마법에 입문하게 된 건 꽤 늦은 시기. 제대로 된 마법은- 마탑에 입학하면서부터 배우기 시작한 게 맞나요?”
마탑과 나이아. 다프네의 심장이 시큰거리는 말이었다. 다프네의 머릿속에 기억이 떠올랐다.
“…네, 그렇습니다.”
용사는 너털웃음을 내뱉었다. 마치 심장에 족쇄가 채워져 그 목줄을 용사가 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떤 의미인지도 모를 웃음 한 번에 다프네의 가슴이 철렁이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특기는 따로 있나요? 마력 성질이라던가.”
“아직 발현되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동시에 신기한 기분이었다. 평소처럼 두려움에 떠는 건 마찬가지였는데, 용사의 질문에는 어떻게든 대답을 다 들려줄 수 있었다. 면접은 그렇게 무난한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다프네가 계속 이어지는 긴장감에 얼굴이 창백해지고, 게오르그가 표정을 천천히 일그러뜨릴 때쯤, 용사는 책상 위로 종이를 턱, 내려놓았다.
“면접은 여기까지입니다.”
제법 길게 이어진 면접에 다프네는 지쳐있었다. 하지만 탈락과 합격이라는 두 말은 여전히 다프네의 머리와 심장을 동시에 짓누르고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용사는 서랍을 뒤지더니 하얀 종이를 꺼내었다. 뒤편에서 용사를 바라보고 있던 게오르그의 표정은 일그러지기 직전의 그것에서 완전히 굳어버렸다.
“이거, 저기 옆방으로 가서 작성해주세요.”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 가 아니었다. 다프네는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용사가 내미는 펜과 종이를 받았다. 펜은 다프네가 한 번도 만져본 적이 없는 고급품에다가, 종이도 굉장히 빳빳하고 질이 좋은 것이었다. 이게 뭐지. 계약서? 그녀는 바보가 되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그…저, 이건, 뭔가요?”
“계약서입니다. 한시가 바쁜 상황이라, 바로 결과를 통보하게 된 점은 양해해주시길.”
다프네는 멍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의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그런 다프네의 뒤로 그녀를 부르는 용사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다프네가 발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보자, 용사는 책장 뒤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쪽 문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다프네가 고개를 끄덕끄덕 끄덕이고는 삐걱, 비척. 고장 난 인형처럼 걸어 문으로 다가갔다. 끼이익. 경첩이 움직이며 소리를 냈고, 다프네는 사무실 옆의 휴게실과 같은 공간에 밀어 넣어졌다. 다시 경첩이 삐걱거리는 동안 다프네는 제 손에 들린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나 설마 합격한 거야?”
쿵.
다프네의 혼잣말에 대답하듯, 등 뒤로 휴게실의 문이 닫혔다. 다프네는 그러고도 한참을 계약서를 들여다보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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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뭐라고 하기도 지쳤다.”
나는 게오르그의 말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한 건 끝냈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층 여유로워진 상태였다. 나머지 면접자들은 대충 면접을 보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결과적으로, 계약서를 들고 휴게실에 들어가게 된 지원자는 다프네 한 명밖에 없었다. 모든 면접이 끝나고서, 나는 다프네와 계약서를 조율하며 내일 출근하라는 말까지 남겼다. 완벽하다.
…아니, 생각해보니, 그냥 수소문해서 찾아내면 될 걸 왜 이렇게 거창하게 일을 벌인 건지 모르겠다. 지금 저 근육 덩어리를 적당히 설득하기 위해 공개 면접을 열어놓은 건데, 게오르그는 전혀 설득된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네 머릿속에 뭐가 든 건지 모르겠다.”
“알려고 한 적은 있었고?”
나는 대강 대답하며 지원자들의 서류를 정리했다. 뭐, 고맙게도 게오르그는 면접 중간에 딱히 딴죽을 걸려 하지 않았다. 당황한 듯한 표정을 몇 번 지어 보이긴 했다만.
“그래, 이참에 한 번 알아보도록 하지. 대체 그 많은 지원자를 다 떨어트려 놓고는 고작 뽑는다는 게 모험가들 사이에서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도는 4서클 짜리 여자 마법사를 뽑는다고?”
“왕도 저잣거리의 소문에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줄은 몰랐는데.”
게오르그가 얼굴에 핏줄을 세웠다. 이제 이 녀석의 대응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 나였다. 내가 계속 뭣같이 굴어도, 가만히 자리를 지키는 걸 보면, 이제는 정말 누가 칼 들고 탈퇴하지 말라고 협박이라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 소문이, 4서클 마법사가 제 기량을 발휘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소문이라면 신경을 써야겠지. 그 외로 따라다니는 추문은 차치하고서 말이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을 마법의 ‘ㅁ’도 모른 채 변두리 시골 마을에서 살아가다가, 마법에 눈을 뜨게 된 후 4년 만에 4서클의 경지에 오른 사람을 안 뽑는 게 더 이상하다 보이는데. 적어도 난 그런 재능을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어.”
“이상하리만치 그녀에게 편의를 봐주었던 게 그런 이유였나. 우리 파티에 마법사가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나 보군. 비효율적이야.”
파티의 다른 마법사. 나는 토악질이라도 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애초에 쫓아낼 수만 있다면 그 녀석까지 쫓아내고 싶었지만, 지금 그녀는 왕국의 서쪽 해변에서 휴가를 만끽하고 있을 테지. 돌아오기만 해봐라, 그냥.
“다프네 정도 되는 재능을 안고 가지 않는 것도 비효율적이야, 게오르그.”
내 대답을 들은 게오르그가 지어 보이는 표정은 ‘그걸 아는 새끼가 파티 주요 멤버를 둘이나 추방해?’라고 묻는 것 같았다.
“그래, 재능이 정말 엄청나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그 마법사가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게 아니냐.”
이 녀석은 결정된 사항에 왜 이렇게 토를 다는 거야. 사춘기 애새끼도 아니고 그냥 내 말에 무조건 반박하고 싶은 건지. 일로이가 미덥지 못하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대로 간다면 게오르그가 내 생존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프네가 어째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지는 관심이 없나?”
“그걸 안다고 해서 고칠 방도는 있나?”
“시도도 하지 않은 녀석들이 다들 그런 말을 하더라고.”
게오르그가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반대로, 내 목소리는 지치며 낮아지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튼 난 반대다. 아무리 이론상 뛰어난 마법사라도, 실전에서 써먹지 못할 정도라면 함께 파티를 맺을 생각은 없어. 네가 강행하겠다면, 나는 모든 걸 무릅쓰고 상부에 보고하겠다.”
나는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이 자리, 은근히 안정감이 있었다. 덕분인지 저렇게 역정을 내듯 말하는 게오르그의 앞에서도 침착할 수 있었다.
“결국 너는 다프네의 불안정한 기량이 불만이라는 거잖아."
"그렇게 간단하게 치부할 문제는 아니라 생각한다만, 가장 큰 이유는 그렇지."
그러면 내가 순순히 알겠어, 영입은 생각해 보도록 하지. 라고 대답할 줄 알았냐.
"다시 원정에 다시 나서기 전에 다프네를 고쳐놓는다면? 1인분 이상은 하게 만든다면.”
게오르그는 코웃음을 치며 나를 흘겨보았다.
“그럼 다프네 에피폰을 파티에 포함하는 건 물론이고, 다시는 네 말에 토를 달지도 않고, 닥치고 따라다니도록 하지. 아르옌과 아이시스를 추방한 것에 대해서도 넘어가겠다.”
오호, 말 한번 잘했다, 게오르그.
이거, 잘하면 내 불안 요소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해결할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반질거리는 나무 책상 위로 비치는 용사의 미소는 꽤나 비열하고 사악해 보였다. 어이쿠, 이렇게 웃으면 안 되지. 나는 입가를 슬쩍 가려 미소를 덜 비열한 것으로 바꾸며 게오르그를 돌아보았다.
“그 말, 꼭 지켜야 한다.”
게오르그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당연하지. 너는 각오를 좀 하는 게 좋을 거다. 네가 달고 있는 그 직책의 무게를, 느낄 필요가 있어.”
각오라. 아마 네가 해야 할 거 같은데.
나는 그 말까지는 들려주지 않고, 다프네가 작성한 계약서를 다시금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