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 5. 다프네 에피폰 (3)
“…졸려.”
이 오 층짜리 건물의 꼭대기는 용사 파티의 본거지였고, 바로 아래, 사 층은 용사의 집이었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 얼추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바로 위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벌컥.
사무실은 아직은 싸늘한 봄날의 한기와 함께 식어있었다. 오늘 게오르그는 출근하지 않았다. 휴가 기간이기도 하니, 자신도 원래 소속되어 있던 기사단에 잠시 얼굴이나 비추러 가겠다고 말을 남긴 것이다. <다신 돌아가지 않겠다>의 세상에 떨어지고 난 뒤, 처음으로 오롯해진 아침이었다. 나는 눈 아래를 문지르며 사무실의 책상에 앉아 늘어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갈 길이 태산이었다.
일단, 주역 중 하나를 포섭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따지고 보면 절반의 성공에 가까웠다. 아직 다프네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일 테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일 거니까. 그런 그녀의 심리적 장벽을 무너뜨리고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 필요가 있었다.
“…서두르면 안 돼.”
가족에게 쫓겨난 뒤로 트라우마를 앓는 사람에게 네 심리적 문제는 이러하니, 고칠 수 있도록 해. 라고 말한다면 바로 고칠 수 있을까. 뭐, 원작에서는 위기에 빠진 주인공을 구하기 위해 각성하는 전개로 일주일 만에 트라우마를 떨쳐 내게 된다만, 그것만을 믿고 내 목숨을 내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용사 일로이지, 이 작품의 주인공이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누군가에게 거부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 그러니 남은 석 달 동안 나는 어떻게든 그녀가 우리와 함께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그러니, 오늘도 내가 출근해야 했지.”
불평할 틈은 없었다. 다프네를 일 인분 할 수 있도록 바꾸는 것 말고도 내겐 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있었으니까. 나는 지난 일주일간 차곡차곡 정리해보았던 <다신 돌아가지 않겠다>의 정보를 떠올리며, 책상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하얀 검자루의 끝이 보였다.
…이것도 확인해봐야 하니.
나는 성검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용사라면 자고로 쉴 새 없이 싸워야 하는 운명이겠지만, 난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된 전투라는 걸 경험해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혼자 방에서 칼을 뽑아 들고 몇 번인가 휙휙 휘둘러보기만 했을 뿐이다.
강해진다는 확연한 목표가 있는 와중에, 방 안에 들어앉아 머리만 굴리는 건 내가 용납할 수 없었다. 마침 적당히 함께할 상대도 있겠다, 오늘은 드디어 첫 실전을 치를 때가 되었다. 나는 세워놓은 계획을 되새기고는 손끝으로 두드리던 성검의 검자루를 꾹 잡아챘다. 사무실로 누군가의 기척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는 망설임이 깃들어 있었다. 처음으로 두드릴 때는 강하게. 두 번째로 두드릴 때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소심하게. 세 번째는 도망치듯 빠르게. 문은 그리고 조심스럽게 열렸다. 나는 열린 문틈 사이로 고개를 먼저 빼꼼 내미는 다프네를 보며 작게 웃었다.
“추…출근했습니다.”
“좋은 아침, 다프네.”
다프네는 뻣뻣하게 문을 닫으며 사무실에 들어왔다. 그녀의 눈이 검자루를 쥐고 있는 내 손으로 돌아가며 의아하다는 듯 바뀌었다. 나는 성검을 슬쩍 들어 보였다.
“첫 출근부터 미안하지만, 실전에서 다프네, 네가 어떨지 확인이나 해볼 겸, 근처 마물 사냥이나 한번 다녀오자.”
실전이라는 말에 다프네의 표정이 움찔거렸다. 생각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겠지. 싫어도 해야 하는 게 사회생활이야, 다프네. 나는 속으로 그런 말을 들려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잠시만, 용사님.”
아무런 생각 없이 외출하려던 내게 다프네가 식겁하며 자신이 쓰던 후드를 던져주었다. 방심하고 있던 내게 다프네의 후드가 날아들며 향이 확 끼쳐왔다. 향수처럼 화려한 향이 아니었고, 포근한 체향에 가까운 향이었다. 내가 그녀의 후드를 잡은 채 멀뚱멀뚱 다프네를 바라보자, 다프네는 뒤늦게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아무런 방비도 없이 나가신다면 너무 시선이 쏠릴 거예요…. 길드에서 힘들 수도….”
사실, 빙의되고서 나는 지금까지 실전은커녕 제대로 된 외출 한 번 나선 적 없었다. 구인 공고문을 붙일 때도 사람이 다니지 않는 새벽을 틈타, 직원에게 부탁해 붙인 것이니. 용사는 제법 얼굴이 잘 알려진 편이니, 조치 없이 외출을 나간다면, 온갖 사람들에게 둘러싸일 것이다. 연예인이라도 된 거 같다.
“깜박 잊을 뻔했네. 고마워.”
내가 후드를 뒤집어쓰며 말하자, 다프네는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원작의 일로이는 그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과 시선을 즐겼겠지. 나중에 비슷한 후드라도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문을 열고 나섰다. 아마, 원래 다프네 자신이 쓰려던 것이었겠지만, 나는 구태여 그 이유를 캐묻지 않기로 했다.
“저… 용사님,”
“일로이라고 불러.”
용사라는 말은 듣기 껄끄러웠다. 게임 속에 떨어진 것도 아니고. 난 용사가 아니야, 이 사람들아.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슬프기 그지없었다.
“일로이, 나머지 사람들은….”
“오늘 게오르그는 휴식. 그리고 알다시피 마법사도 하나 더 있는데… 그 친구는 지금 멀리서 휴가 중이야. 원정 나가기 전에 돌아오기는 할지.”
내뱉는 목소리가 씁쓸했다. 나를 따라 다프네까지 숙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니, 생각해보니 얘는 항상 숙연한 표정을 짓고 있잖아. 터벅터벅. 방금 회사에서 잘린 듯한 발걸음으로 나는 다프네와 함께 길드로 걸어 들어갔다.
“위험 구역 출입 허가만 빠르게 받아 나오자. 간단히 실전 합만 맞춰본다는 느낌이지, 특별히 임무를 수행할 건 아니니까.”
다프네는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에 들어서도 사람들이 딱히 신경 쓰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정체를 숨기겠답시고 후드를 쓰고 있는 사람이 지금 나 이외에도 다섯 명은 더 있으니까. 성검도 칼자루는 숨긴 채 검집을 바꿔 끼워 더 관심이 쏠릴 일도 없었다.
나는 벽에 기대어 서서 접수대에서 허가증을 발급받는 다프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긴 연분홍빛 머리가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출입 허가증 나왔습니다.”
접수대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다프네는 양손에 출입증을 한 장씩 꾹 쥔 뒤, 잰걸음으로 내게 돌아왔다. 어딘가 망설이는 듯한 눈이 조금씩 반짝였다. 그 모습이 꼭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아서, 헛웃음이 나왔다. 출입증을 건네받으며 고맙다고 말해주려던 찰나, 누군가의 째지는 목소리가 다프네의 등 뒤로부터 들려왔다.
“어머, 다프네 아니니?”
다프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나를 향하던 다프네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얼어붙었다. 나는 흘긋 시선을 올려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여자 하나와 남자 둘. 여자는 얼굴에 도마뱀 같은 미소를 띠고 있었고, 남자 둘은 그런 여자를 상전 떠받들 듯 모시고 있었다. 저들끼리 미묘하게 앞으로 먼저 나서겠다며 신경전을 하는 것을 보니, 파티 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히 보였다.
“보아하니 새로 어떻게 파티를 구했나 보네? 저번에 혼자 돌아다니더니.”
다프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조금씩 몸을 떨고 있을 뿐이다.
“뭐야, 이제 새로 파티 구했다고 아는 체도 안 하는 거야? 섭섭하게 시리.”
귀가 따갑다. 여자 모험가는 또각거리는 발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다프네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다프네는 모험가의 눈을 피했고, 모험가는 그녀를 위압하듯 고개를 위로 꺾었다. 그 눈에 엿보이는 건 명백한 적개심과 우월감. 모험가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새로 기생할 남자를 찾았나 보네. 추잡하기는.”
“나는….”
여자 모험가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인상적인 얼굴은 아니었다. 하루 이틀만 지나면 잊힐 얼굴. 악역이라 부르기에도 아까웠다.
“그쪽은 다른 도시에서 오셨나 봐요? 왕도 모험가라면 대체로 이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을 텐데 말이에요.”
여자 모험가는 눈웃음을 쳤다. 저런 웃음에 넘어간 놈들이 둘이나 있다니. 공 형태로 뭉친 한숨이 목구멍에 걸려 터져 나올락 말락 하고 있었다.
“내가 알려줄까요? 저 여자가 여태 거쳐 갔던 파티에서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안 궁금해.”
나는 후드 아래에서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내가 쫓아낸 아르옌이라면 이런 때에 더 똑똑하게 엿을 먹일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겠지만….
“에이, 그쪽 보니까, 속고 있는 거 같아 안타까워서 그래요. 돈은 안 받을 테니….”
“그리고, 똥 냄새나니까 입 좀 다물어.”
나는 그렇게 똑똑하지도 않고, 참을성이 강하지도 않다.
여자의 눈웃음이 쩌적, 소리를 내며 굳어버렸다. 나는 입꼬리를 뒤틀며 한 걸음,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여자의 뒤로 경호원처럼 서 있던 두 남자 모험가들이 여자 모험가를 가로막으려 앞으로 나섰다.
“당신- 방금.”
“냄새난다고. 말 못 들었어? 똥 냄새가 진동하는데 너만 못 맡나 보지?”
남자 모험가들이 나섰다. 껄렁하게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으며, 째진 눈알을 굴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이럴 때는, 용사라는 게 참 좋았다. 일로이의 눈은 저놈들의 허점을 전부 들여다보았고, 내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도 알려주었다.
“이 새끼가 입에 걸레를 물었나. 좋은 말로 하는데도-”
“걸레는 네 뒤에 있는 것 같은데. 입에 물어볼까?”
“뚫린 입이라고-.”
남자 모험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손이 올라온다. 아마 멱살을 잡으려는 손짓인 듯했다. 나는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모험가의 손을 잡아 누르며 후드를 벗었다.
“그만하지.”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길드 전체가 정적에 빠졌다.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내게 손을 잡힌 모험가를 뒤로 툭 밀어내고는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모험가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황급히 고개를 돌리거나, 딴청을 피웠다.
폭.
나는 다프네의 머리 위로 후드를 씌워주었다. 아직은 아니다. 다프네가 과거의 경험을 딛고 일어설 때까지는, 내가 곁에서 도와주어야 했다. 내가 씌워준 후드 아래에서 다프네의 보랏빛 눈이 초점을 되찾았다.
“다프네, 나가자.”
나는 다프네의 손목을 잡고 길드 건물을 걸어 나섰다. 다프네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면서도, 내 보폭에 맞춰 발걸음을 빨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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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셨던 거죠?”
왕도의 바깥, 마물이 서식하는 위험 지역으로 가는 길, 다프네는 자신의 옆에서 천천히 걷고 있는 일로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 네게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듣지 않았던 거?”
“정말 모르셨나요?”
“아니, 알고 있어.”
다프네가 고운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도….”
다프네는 제 어깨를 감싸고 있는 후드의 자락을 꾹 쥐었다. 무어라 다프네가 할 말을 찾으려 할 때, 일로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표정에 무언가 당혹감이 서리는 것으로 보아하니 아무래도 다프네의 기분을 읽어버린 듯하다. 일로이는 다프네로부터 두 걸음 앞에 멈춰 서서 다프네를 돌아보았다. 일로이의 잿빛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이따금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용사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힐끔힐끔 시선을 돌렸다.
“네가 우리 파티원이 되었으니까. 파티장으로서 그 책임은 져야지.”
“…난 내가 왜 뽑힌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일로이, 당신이 내게 어떤 소문이 붙어있는지 알고 있었다면 더더욱.”
말해버렸다.
다프네는 그 말을 내뱉고는 찾아오는 후회에 입술을 깨물었다. 길드에서 전 동료와 만난 것이, 다프네에게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상기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일로이를 따라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 거절당하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내가 면접을 시행할 때 본 건 네 이력뿐이야.”
그건 위로도, 질책도, 격려도 아니었다. 일로이의 말은 이상할 정도로 다프네의 마음에 들이박혀 자리를 잡았다. 저 용사의 눈은 전혀 흔들리고 있지 않았기에, 그 자신을 의심하지 않았기에, 다프네에게 곧은 신뢰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기에.
“남들이 떠드는 소문 속에 스스로 갇히지 마. 난 새로운 파티원으로 너를 골랐고, 너를 다시 나가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어.”
어떻게 저렇게 확신에 가득 차 있을까. 그의 신뢰는 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나는 사람을 믿지 못해요. 나 자신을 포함해서.”
다프네는 다시 한번 회피를 선택했다. 일로이는 쓴웃음을 내뱉었다.
“믿지 않아도 괜찮아.”
일로이는 다프네가 눌러 쓴 후드의 양 끝을 잡아 얼굴이 드러나도록 내렸다.
“내가 믿을게. 그리고, 네가 결국 너 자신을 믿을 때까지 기다릴 거다.”
보랏빛 시선과 청록색 시선이 교차했다. 일로이는 씨익,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너 자신을 바꾸고 싶다며?”
“그, 그건.”
“거짓말은 아닐 텐데.”
이상했다. 저 사람의 말은 다프네의 깊은 곳을 찌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다프네는 그리 말하고서 먼저 앞서 걷기 시작한 일로이를 바라보았다. 일로이는 몇 걸음인가 걸어보더니 다프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해, 안 와?”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혹시라도 다시 일로이가 먼저 걸어갈까, 가볍게 뛰어 그 옆으로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