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 6. 다프네 에피폰 (4)
왕도는 큰 강줄기 두 개를 낀 분지에 자리한다. 그 전경을 굳이 설명하자면, 마치 상하수도 기술이 완벽히 발달한 18세기쯤의 서유럽이라고 할까. 왕도의 모습은 세상의 좋은 단면만 잘라다가 붙인 한 장의 콜라주 같았다. 이 모든 기적 같은 기술의 발전을 마법 공학의 발달이라는 말로 대충 짚고 넘어가다니.
“네, 확인되었습니다. 22시 이후로는 출입이 불가하오니, 항상 시각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시길 바랍니다. 용사님께 무운이 있기를.”
하지만, 도심의 외곽으로 벗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은 그 낯빛을 바꾸어버린다. 위병의 검문을 통과해 수림이 우거진 외곽 지역으로 들어서면, 사람이 내는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다. 분지에 수도를 자리 잡은 건 좋지만, 이 세계의 산은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곳이었다. 풀벌레와 산새들마저 숨을 죽인 채 울음을 울었다. 뭐, 지금 이 산 속의 벌레와 새 울음소리를 소거해버린 건, 마물 같은 게 아니었다.
쾅-!!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쳤다. 나는 강렬한 빛을 쬔 눈을 비비며 표정을 찌푸렸다.
“…혼자서 쓰는 마법은 정말 멀쩡한데 말이야.”
나무는 벼락에 맞아 수십 갈래로 부서져 내렸다. 그 모습이 마치 나무로 만든 문어를 거꾸로 뒤집어놓은 것 같았다. 라이트닝 볼트. 3서클의 공격 마법. 다프네의 손끝에서 발현한 마나의 벼락 줄기는 흠잡을 데 없이 강력했다. 새까맣게 타버린 나무 둥치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솔솔 피어오르고 있었다.
“좋아, 다른 파괴계열 마법은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겠네.”
다프네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내게로 등을 돌렸다. 머리 위에 귀가 달려있었다면, 지금쯤 기가 죽은 채 축 처져 있지 않을까.
“실전에서 절대 이렇게까지 쓰지는 못할 거예요.”
“그걸 아니까 오늘 여기 온 거지.”
나는 앉아있던 바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다프네가 겪어왔던 일을 지울 수는 없고, 잊게 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잊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햇살이 나뭇잎을 비집고 들어오며 다프네의 얼굴에 그물 무늬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마침 오고 있네.”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가 관심을 끌었던 것일까, 나와 다프네에게로 다가오는 기척이 하나둘 생기고 있었다. 마물 대다수는 지성이 없다. 눈앞에 있는 상대가 자신보다 강한지, 약한지를 판별하지도 못하고 끊임없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그저 부나방처럼 달려들 뿐이다.
나는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이제 접근해오는 기척을 느끼기 시작했는지 표정 위로 불안한 기색이 차츰 퍼져가고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풀숲 너머로 마물의 번득이는 눈빛이 보였다. 호른호그라는 이름의 육식 멧돼지일 거다. 원작에서는 잔챙이 1 정도로 지나가는 마물이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호른호그….”
“나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을 거야. 혼자 쓰러트릴 수 있겠어?”
나는 그리 말하며 호른호그에게로 턱짓했다. 멧돼지 놈은 까뒤집어진 듯 허연 눈으로 우리를 응시하며 콧김을 내뿜었다. 그녀에게 혼자 마물을 쓰러트리라는 말은 가혹할 수도 있겠지만, 다프네는 전투에 우선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다프네는 심호흡하며 마나를 갈무리했다.
“…해볼게요.”
다프네의 발끝에서부터 푸른 전류가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방금과 같은 라이트닝 볼트. 다프네의 호흡이 가빠오고 있었다. 한데 응집되어야 할 마력은 다프네의 손끝에서 방전되며 허공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흩어지는 마력을 한데 그러모으려 애를 쓰고 있을 때, 호른호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돌진했다.
파지지직-!
완성된 마법은 터무니없이 약했다. 멧돼지는커녕 기어 다니는 슬라임이나 한 마리 겨우 처치할 수준. 호른호그의 돌진속도는 늦춰지지 않았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다프네를 그 경로에서 끌어낸 후 성검을 뽑아 달려오는 멧돼지의 목을 베어버렸다.
“….”
다프네는 팔을 늘어뜨렸다. 마법이 되다 만 마력의 잔재가 그녀의 오른팔에 남아 감돌고 있었다. 나는 성검을 다시 칼집에 집어넣었다.
“죄송해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초에 아예 내가 개심시키는 데 실패하는 것까지 염두에 둔 상황에서, 멧돼지 한 마리 못 잡았다고 실망하기야 할까. 정말 걱정되는 건, 다프네가 혼자 꽁하게 앓고 있다가 홀연히 잠적이라도 하는 상황이었다.
“실패해도 괜찮아. 포기하지만 마.”
이거, 참. 감독 역할은 자신 없는데. 다프네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는 짧은 너털웃음과 함께 무릎을 굽혔다. 야, 우냐? 라고 놀리는 거 같은 기분이 들어, 마음 한구석이 찔리기는 했다만. 눈을 땅에 고정하고 깜박이던 다프네는, 시선에 내 얼굴이 들어오자 놀라며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계속 가보자.”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어느 정도 마음을 먹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못 하겠다는 말이라도 나왔으면 정말 곤란했을 거다.
다프네가 내 뒤에서 애를 쓰는 동안, 나는 차츰 전투에 몸을 길들이기 시작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아직 남아있어서일까, 움직임은 점점 과감해졌다. 그러고 보니, 원작 소설에서는 용사 놈의 악행만을 강조했지, 실제로 일로이가 얼마나 강한지, 어떻게 전투를 수행하는지는 제대로 서술한 적이 없었다.
‘…실제로 꽤 강한 편인 건가.’
아니면 잔챙이 마물만 상대하면서 너무 우쭐해진 건가.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아래를 보았다. 집채만한 멧돼지 세 마리가 나란히 하늘을 보며 누워있었다. 싸울 때는 신기한 기분이었다. 오늘 아침에 길드에서 그 남자 모험가를 붙들었을 때도 그렇고,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어디로 칼을 휘둘러야 할지가 너무도 생생히 떠올랐다.
‘하긴, 용사가 이 정도도 못 하면 안 되겠지.’
다프네의 마법은 그대로였다. 그녀는 끊임없이 마법을 쥐어 짜내려고 노력했지만, 정작 제대로 발현된 마법은 하나도 없었다. 일반적인 4서클 마법사가 이렇게 마법을 남발했다면 이미 마나가 고갈되고도 남았을 테지만, 다프네의 마나 통은 바닥을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지쳐가는 건 다프네의 몸이 아닌, 마음이었다.
“잠깐 쉬었다 갈까. 마침 저기 앉기 좋아 보이는 바위도 있고.”
다프네는 처음 숲에 들어왔을 때와 비교해서 훨씬 풀이 죽어있었다. 그럼에도 내 말에 따라 마법을 쓰기를 포기하지 않는 건 다행이었다.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네.”
“…그러네요.”
해가 서서히 넘어가고 있었다. 방향이 바뀐 바람은 빗살처럼 서늘하게 머리 사이를 비집었다. 앉아서 멍하니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던 다프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저, 어렸을 때 마을에서 추방당했었어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내가 묻기 전에 그녀가 먼저 옛날이야기를 꺼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추방당했다고?”
“네. 음… 정확히는, 상경을 빙자한 추방이었어요. 마을에 살 때 마법으로 마수를 격퇴한 적이 있거든요. 마법을 배우기도 전에.”
알고 있다. 그러니 그녀의 재능이 특별한 것이지. 마나의 총애를 받는 아이, 다프네.
“네가 그런 재능을 지녔으면 마을에서는 오히려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다프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려워했어요. 그 사람들은. 내 손짓 한 번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 양 떼 사이에 숨어든 이리 같다고 생각한 것일지도 몰라요.”
다프네가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어떤 표정의 전조도 찾을 수 없었다. 이런 과거를 밝힐 때면 으레 짓는 쓴웃음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난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었을 뿐인데.”
다프네는 숨을 내쉬듯 그리 말했다. 마치 자신은 평범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했다는 듯. 섞일 수 없다. 나는 그 사실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구도 특별하지 않은 마을에 갑자기 나타난 대마법사의 재능. 재능을 담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그릇.
“분에 넘치는 소리 같나요?”
하긴, 용사의 몸에 덜컥 들어와 버린 내가 다프네에게 뭐라 할 처지는 아니긴 하지.
“아니. 누구나 하는 고민이지. 갖고 싶은 걸 전부 가질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갖고 싶다는 그 생각까지 저버리라는 건 좀 무책임한 말이잖아.”
나는 성검의 끝으로 땅을 푹푹 찔렀다.
“나도 가끔은 내가 도대체 지금 뭘 하는 건지 모를 때도 있으니까.”
“…그런가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올리자, 다프네는 어느덧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산등성이에 걸친 해가 진한 빛을 드리우고, 다프네의 보랏빛 눈에는 빛이 층계를 이루며 빛나고 있었다. 다프네는 그렇게 한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무안했던 내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 전, 다프네의 입술이 먼저 달싹이며 말을 만들어내었다.
“저, 포기하지 않을게요.”
나는 눈썹을 치켜올린 채로 다프네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다가, 그 저의를 떠올리고는 나도 모르게 씨익,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거면 된 거야.”
.
.
해가 완전히 졌다. 희미한 붉은 빛만이 능선에서 어른거리는 가운데, 군청의 장막이 찾아왔다. 밤 10시까지 출입을 제한한다고 했으니, 여유롭게 돌아가려면 지금쯤 출발해야 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나는 엉덩이를 툭툭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전은 없었지만, 헛고생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다프네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건, 그녀의 발전에 있어 아주 긍정적인 신호였다. 내가 어느 정도로 싸울 수 있는지도 어느 정도 감이 잡혔고.
“내일도 같은 시간에 출근할 수 있을까?”
“…네.”
무엇보다, 다프네가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해준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 마치 아주 든든한 보험이 하나 생긴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밤의 산은 낮의 산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낮에는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던 것들이, 밤이 되니 살아나 저마다 존재감을 드러내는 와중에, 산의 그림자가 일렁거리며 시야를 현혹했다. 다프네가 펼치는 광원 마법이 아니었다면, 길을 찾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일로이.”
…그리고, 마침 방해꾼들도 나타났다. 낮에는 수풀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마물들이 밤이 되니 거리낌 없이 무리를 지어 몰려온다. 시뻘건 안광이 수십 쌍씩 번득이고 있었다. 나는 머릿수를 열 마리까지 세다가 관두었다.
할 수 있을까.
나는 성검의 검자루 위로 손을 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 와중에도 마물의 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친구들을 불러오기라도 하는 걸까. 나는 버글버글하게 늘어난 마물들을 바라보며 숨을 내뱉었다. 그때, 내 등 뒤에서 미약한 다프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동.”
나는 내 주위를 둘러싸는 마나의 막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호 마법?”
나는 놀라울 정도로 견고한 마나의 갑옷을 느끼며 손을 쥐었다 폈다. 뒤로 돌아보니, 다프네가 내게로 손을 뻗은 채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다프네의 심장부에서 조금씩 샘솟아 나오는 푸른 마나의 줄기를 보았다. 마나는 형태를 이루지 않고 다프네의 오른팔 부근에서 맴돌다가, 내게로 천천히 옮겨왔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프네는 말을 하는 것마저 힘겨워 보였다. 실제로 다프네의 마나는 조금씩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충분했다. 나는 성검을 뽑아 들었다. 달빛이 서늘하게 검날을 흠뻑 적시며 빛을 내었다.
“고마워.”
다프네의 트라우마를 극복할 방법이니, 원작의 미래를 대비할 방법이니, 지금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냥 저렇게 창백한 얼굴이 되어가면서까지, 나를 엄호해주겠다는 모습이 조금 기특할 뿐이었다.
자세를 낮추었다. 마물들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리에 힘을 완전히 그러모았던 나는, 마물들이 먼저 달려들기 전에 응축한 힘을 폭발시키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