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7화 (8/158)

Chapter 7 - 7. 주인공과 성녀 (1)

“그래, 당신이 바로 그 전설적인 용병인가?”

“오냐, 내가 바로 그 전설적인 용병이다.”

처음부터 아르옌은 용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 자신을 동료로 맞이하던 용사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다. 두 사람은 서로 그 사실을 알았다. 용사는 안하무인이었고, 아르옌은 그런 용사의 독단성을 버틸 수 없었다. 터질 듯 말 듯 한 선에서 머물러있던 그들의 갈등이 완전히 드러나게 된 건, ‘세 번째 재앙’을 무찌르고, 의기양양하게 왕도로 돌아온 후였다.

“아르옌, 파티에서 나가라.”

“뭐?”

“지난 원정 동안 생각해봤다. 네가 나가는 게 옳아. 네가 없어도 이 파티는 충분히 잘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나가는 게 옳다. 옳다고? 오만한 목소리였다. 아니, 완벽하게 오만하기만 했다면 차라리 화가 나지도 않았을 거다. 아르옌을 노려보며 말하는 용사의 목소리는 일말의 불안이 깃들어 있었다. 그 칙칙한 청록색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느 때와 같이 용사의 사무실은 불이 꺼져 어둑어둑했다. 아르옌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옳다라. 그래, 그 이유나 하나 들어보자.”

‘세 번째 재앙’을 물리치고서 정신을 놓아버린 건가? 자신이 직접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고 해서 혼자 그 괴물을 무찌르기라도 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짐승의 그것처럼 번들거리는 용사의 눈을 마주 노려보았다.

“너는 너무 제멋대로야. 너 혼자서 내 통제에 따르지 않으면 모를까, 너 때문에 우리 파티 전체가 분열되기 직전이라는 건 깨닫지 못하는 거냐?”

“정말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짜증스럽게 할 수가 있지.”

아르옌은 글자 하나하나에 분노를 담아 말했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는지, 용사라는 놈팽이는 안면근육을 있는 대로 전부 일그러뜨리며 이를 갈았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내 통제에 따르지 않는 거지?”

“네게 따를 자격이 있었다면 따랐겠지. 무능한 새끼야.”

“그 자격을 네까짓 게 판단하는 거였나?”

으직.

아르옌이 딛고 있던 바닥에 금이 갔다. 감당할 수 없는 기세로 피어오르는 마나의 격류에, 용사 또한 자신의 마나를 끌어올려 맞서려 했다. 둘의 기세는 처음 대등한 듯 보였으나, 어느 순간 아르옌의 기세가 용사의 그것을 잡아먹을 듯 강대해졌다.

“눈이 달려있는데도 앞을 보려 하지 않으니, 장님이 따로 없네.”

“그럼 귀가 달려있는데도 들으려 하지 않는 너는 귀머거리겠군.”

긴장감은 방을 터뜨리려는 듯 팽배해졌다. 아르옌은 핏대를 세우며 더 따지고 들려다, 자신이 이리 매달릴 이유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사명감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이 세상에 품은 애정이라고는 많지 않았으니. 거기에, 내내 이 개 같은 자식과 부대끼며 세상을 돌아다녀야 한다는 건 더욱 싫었다.

“그래, 한번 잘해봐라.”

아르옌은 ‘잘’에서 말끝을 길게 늘어뜨리며 돌아섰다. 이 이상으로 말을 섞는 건 시간 낭비 같았다. 자신을 쫓아낸 건 용사고, 그 모든 책임은 홀로 자신을 불러낸 저 녀석이 지게 된다. 아르옌에게는 어떤 잘못도 없다. 아르옌은 문고리를 잡고서 용사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없어지고 나면, 거만한 눈동자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네 잘난 용사질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르옌은 문을 열고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렇게 모든 걸 다 던지고 나서기에는, 아직 걸리는 점이 하나 남아있었다. 아이시스. 저 현실이라고는 전혀 알지 못하는, 대가리에 꽃만 들어찬 용사 놈에게 함께 반기를 들었던 성녀. 그리고, 그 이상의 고생을 함께했던 전우.

아이시스.

아르옌은 아이시스의 눈빛과 미소를 떠올리며 다시금 이를 꾹 깨물었다. 그녀를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그녀를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하지 않으려면 자신이 아무 말 없이 떠나버리는 게 더 나을 거다.

“적어도, 남은 파티원에게 폐를 끼치지는 마라.”

쾅.

아르옌은 그 길로 쪽지 한 장만을 남긴 후, 모든 짐을 싸 들고서 밤마차를 잡아탔다. 뭐가 어떻게 되었든, 우선 왕도를 벗어나고 싶었다. 자유로운 용병 생활을 보내던 자신을 억지로 잡아다가 저 쥐색 머리칼 용사의 뒷바라지나 하게 한 이 나라를 떠나고 싶었다.

“당분간 용병 노릇은 다시 하긴 글렀고.”

덜컹거리는 짐마차 안에서, 아르옌이 눈동자를 굴렸다. 별이 쏟아지는 것 같은 밤하늘의 끝자락에, 왕도의 불빛이 희미하게 어른거리고 있었다. 아르옌은 도시를 향해 증오 어린 시선을 보내다가 눈을 감아버렸다.

“잠시 모험가나 좀 해볼까.”

마음 한구석에 떠오르는 아이시스의 얼굴은 잠시 접어두었다. 그래도 쪽지를 남겨두었으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있으리라.

==

아이시스는 용사 파티의 첫 멤버였다. 일로이가 성검에게 선택받아, 용사라는 직함을 달기도 전에 아이시스는 이미 성녀로서 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파괴계열 마법도, 검도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가 성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치유의 속성이 깃든 마나 하나뿐이었다.

“아…, 성녀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평생 외팔이로 살아야 할 줄만 알았는데… 감사합니다….”

뼈가 부러지든, 배에 구멍이 뚫려 내장을 쏟아내든, 팔다리가 잘리든, 눈알이 뽑히든. 아이시스의 마력은 목이 잘리지 않은 이상 다 치료해냈다. 성국은 아이시스의 재능을 알아내자마자 그녀를 교회의 얼굴로 만들었고, 성녀라는 낯 뜨거운 별명까지 붙여주었다. 별명은 낯 뜨거웠지만, 아이시스는 기본적으로 제 의무를 아주 자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재앙을 쓰러트릴 거라고요?”

언제나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는 실눈의 주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카이로스 왕국과 성국의 회담에서 결정된 사항이란다. 보구(寶具)에게 선택받은 사람이 나타났다지 뭐니. 왕국의 사람들은 이미 그를 용사라 부른다고 하더구나.”

용사, 라는 말에 아이시스가 그 파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아이시스의 반응을 보고는 주교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촛불의 어슴푸레한 빛이 주교의 미소를 흐릿하게 비추었다. 주교는 제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벽면의 부조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성국에서도… 정확히는 우리 청교회에서도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어. 여기에 성검을 보유한 카이로스 왕국이 먼저 제안을 보낸 건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 그리고, 이번 일에 성국은 용사를 보조하기 위해 아이시스, 너를 추천할 거란다. 그리고 기왕이면 네가 자원하여 파티에가장 먼저 들어가는 게 좋을 거 같다.”

언제나 의무를 위해 살아왔으니, 특별하지 않은 일이었다. 아이시스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명감과 정의감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설령 그것이 성검에게 선택받은 용사라고 해도 말이다.

“그럼, 그 용사와 둘이서 가게 되는 건가요?”

“그건 무리지. 카이로스 왕국에서 모든 역량을 동원해 이번 원정을 지원하게 될 거란다. 이런 대의가 뒷받침된다면, 다른 국가에서도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 도와주겠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하는 주교였지만, 아이시스는 내심 다른 국가들의 지원이라는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이번 원정의 의미를 이해하고 제대로 지원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막상 파티가 꾸려지고 나니 그 용사가 가장 문제일 줄은 누가 알았을까.

“여기서는 내가 먼저 간다.”

“아니, 너는 뒤로 빠져라. 내가 앞으로 나서도록 하지.”

용사는 독선적이고, 제멋대로였다. 파티원들의 의견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고, 일이 생기면 항상 제 자랑인 성검을 뽑아 들고 나서려 했다. 성미는 어찌나 급한지, 함부로 마물에게 덤비다가 파티를 위험에 처하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끼어들지 마라.”

용사는 약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정 도중에 합류한 용병보다는 약했다. 최악인 건, 용사가 그 용병을 보며 자격지심과 열등감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 용사 파티의 첫 여정, ‘세 번째 재앙’을 쓰러트리는 길은 용사와 용병의 자존심 싸움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둘 사이에 차이점이 있었다면 용사는 제 자존심만을 내세웠고, 용병은 자존심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는 것 정도.

성녀가 용사보다도 용병에게 의지하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왜 저런 모자란 사람이 용사가 되었을까. 차라리 용사가 없었더라면 여정이 더욱 수월하지 않았을까.- 와 같이, 용사를 향한 원망도 함께 커졌다. 이런 와중에 용사는 눈치라고는 없이, 대놓고 아이시스를 좋아하는 티를 팍팍 내었다. 사실, 이게 가장 버티기 힘든 것 중 하나였다.

참자. 그래도 아르옌이 있다면, 버틸 만할 거야.

그리고 그들이 ‘세 번째 재앙’을 격퇴한 지 불과 며칠 후, 아이시스는 게오르그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내쫓았다고? 아르옌을?”

생각하고 말고도 없었다. 아이시스는 다급하게 자신을 쫓아오는 게오르그와 함께 용사의 아지트로 향했다. 문을 열고, 용사를 향해 불만을 쏟아내었다. 아니, 불만이 아니라 이 용사 파티의 현실이었다. 담담한 척 아이시스의 말을 듣던 용사의 얼굴은 어느 새인가부터 멍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좋아요, 그렇게 그냥 멍청하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있을 거라면, 저도 이 빌어먹을 파티에서 나가겠습니다. 당신보다는 아르옌을 찾아다니는 편이 훨씬 나을 테니까요.”

아이시스는 아르옌을 찾으러 떠나기로 결심했다. 성검은 그저 부차적인 요소였다. 세상을 구하는 여정을 계속할 것이라면, 이 망할 용사 옆에 붙어있는 것보다는 아르옌을 설득하여 함께 다니는 편이 훨씬 나을 거다.

“누구 마음대로 이 파티에서 나간다는 거지?”

용사는 이 순간에도 자신이 상황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착각하는 것 같았다. 아이시스는 그런 용사의 멍청한 면전에 말을 쏟아내었다.

“하! 누구 마음대로긴, 제 마음대로죠. 당신은 나를 속박할 수 없어요. 그건 잘 알 텐데요.”

“잠깐-”

“됐어요. 더 듣고 싶지도 않네요. 성국과도 마찰을 빚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이제는 절 붙잡지도, 쫓아오지도 마세요.”

성국은 어디까지나 성녀의 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이시스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르옌을 추방한 용사 파티가 어떤 길을 걸어갈 것인지도 빤히 보였다. 카이로스 왕국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었으면 들어주었지, 결코 용사의 편이 되지는 않을 거다. 왕국의 주요 인사들도 용사를 딱히 좋아하거나 반기는 눈치는 아니었으니까.

아이시스는 그리 생각하며 왕도를 나섰다.

.

.

이 주일이 지났다.

지금의 아이시스는 성녀라기보다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여성 모험가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 망토를 뒤집어쓴 아이시스는 변두리 마을의 한 술집에 앉아 파란 눈을 빛냈다.

“…기다려요. 곧 찾아갈 테니까.”

아이시스의 손에는 아르옌이 남기고 간 쪽지가 들려 있었다. 아르옌은 쪽지에 용사와 어떤 불화가 있었고, 왜 파티를 탈퇴하게 되었는지, 어디로 갈 계획인지까지 간단하게 기술해놓았다. 아이시스는 쪽지를 고이 접어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 그래서 손님은 왕도에서 오셨다고?”

그때, 아이시스의 귓가에 술집의 주인과 한 손님이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왕도’라는 말에 아이시스는 귀를 쫑긋 세운 채 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려 했다.

“그래. 모험가는 아니고, 잠깐 파견 임무 때문에 오늘 여기 도착했지.”

“요새 왕도에는 재미있는 소식 없나? 용사 파티는 또 잘하고 있고?”

용사 파티.

아이시스의 파란 눈이 착 가라앉았다. 구태여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알아둬야 할 정보였다.

손님은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한층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 용사 파티의 구성원이 크게 바뀌었다는 모양이더라고. 성녀랑 용병이 나갔다던데.”

“정말인가? 그 사람들이 도대체 왜….”

손님은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시늉을 하며 주인장의 입을 막았다.

“쉿. 이건 주인장만 알고 있어. 이런 거 알려주면, 알지? 나도 이건 왕궁 쪽에서 근무해서 아는 정보라고. 아무한테나 떠벌려도 되는 게 아니란 말이야.”

“알지, 이 사람아. 마시고 싶은 거로 다 골라봐. 이야기는 일단 들려주고.”

이어지는 손님의 말에, 아이시스는 실소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들 외에도, 용사 파티가 이번에 여러모로 걸리는 문제가 많은 거 같아. 그래서 이번에 왕궁에서 청문회를 연다고 하더라.”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