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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8화 (9/158)

Chapter 8 - 8. 불편한 식사 (1)

크워어어-!

마물의 포효가 망치처럼 귀청을 때렸다. 깊은 상처를 냈지만, 살의는 꺾이지 않았다. 놈들은 겨우 다리 한 짝, 팔 한 짝 잘렸다고 낑낑거리며 도망가지 않았다. 그 몸뚱이에 상처가 늘어날 때마다 입에 거품을 물며 발악했다. 마물은 그렇기에 생물이라기보다는 살물(殺勿)이라 하겠다. 살기보다는 죽이기를 원했으니까. 이놈들은 특히, 사람만 보면 정신을 놓고 달려들었다.

픽-

앞발을 흘려보냈다. 간발의 차이로 맞지 않았다. 불과 한 보 떨어진 땅에 작은 크레이터가 생겼다. 내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마물, 잿빛곰은 굉장히 덩치가 컸다. 빙의하기 전에 사진으로 보던 곰은 그저 털이 북슬북슬한 짐볼에 불과했는데, 짐볼은 얼어 죽을. 저 덩치에서 나오는 위압감을 설명할 방도가 없다. 그냥 작은 언덕 하나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곰돌이 새끼가.”

잿빛곰은 덩치만 큰 게 아니라, 빠르기까지 했다. 저놈이 휘두르는 팔은 공성추처럼 주위를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사진에서 보던 곰과도 다르다. 내가 아는 곰은 저런 비정상적으로 긴 앞다리나, 백두산 같은 대흉근 따위 지니지 않았다. 잿빛곰은 잠시 나를 노려보며 숨을 고르다가, 나무를 쓰러트리며 내게로 돌진해 왔다.

크워어어엉-!!

옆으로 구르면 저 앞다리에 얻어걸릴 것 같고, 뒤로 피하는 건 아예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위로 뛰어서 피하자니, 곰이 잡아챌 것 같았고, 두더지처럼 땅을 파고 사라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남은 선택지는 안으로 파고드는 것. 내가 슬쩍 왼쪽으로 움직이려 하자, 잿빛곰의 오른쪽 앞다리가 크게 벌어지며 놈의 몸통 사이로 파고들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조, 조심해요…!”

오늘도 어김없이 다프네와 함께였다. 지난 며칠간 다프네는 크게 성장했다. 이젠 다프네가 전장에서 패닉에 빠지는 일은 웬만해선 일어나지 않았다. 마물에게 마법을 사용하려 하면 실패하는 건 여전했지만, 내게 걸어주는 방호마법은 이제 제법 안정감을 찾았다. 나는 내 몸을 감싸는 마력의 막이 제법 든든하다고 느꼈다. 아마 실수로 저 빌어먹을 곰탱이에게 한 대 정도는 맞아도 괜찮을 거다.

나는 그 방호마법을 믿으며, 돌진하는 곰에게로 마주 돌진했다. 벌어진 팔과 몸 사이,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던졌다. 웬만한 통나무보다도 두꺼운 놈의 앞다리와 함께. 지독한 들짐승의 냄새가 스쳐 지나갔다. 앞으로 나아가는 놈의 팔은 무지막지한 관성 때문에 회수되지 못했다. 그저 울부짖기만 하던 곰이, 이번에는 당황한 듯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급제동을 걸었다.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냐고.”

용사로 빙의한 것치고 참 비참한 신세였다. 몸을 내던진 기세 그대로 한 바퀴를 구른 나는 왼발을 쭉 뻗으며 몸을 단단히 고정했다. 발이 쐐기처럼 땅을 파고들며 내 얼굴로 마구 자갈과 흙먼지를 튀겼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래를 뱉어낼 사치 따위는 없었다. 나는 어금니 사이로 들어온 흙 알갱이를 씹으며 활짝 열린 곰의 몸통을 노려보았다.

“스읍-.”

성검의 끝을 올리고, 몸이 시키는 대로 틀어쥐었다. 왼팔로는 검의 무게중심을 잡고, 오른팔은 화살처럼 검끝을 쏘아 보낼 준비를 한다. 헐떡이듯 박동하는 심장에서 피 이외의 무언가가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마나였다. 마나는 특별한 호흡법으로 끌어내고, 성장시킬 수 있었다. 용사의 몸은 제법 많은 마나를 쌓아두고 있었고, 그건 내게 더없는 행운이었다.

뿌드득.

근육과 뼈가 수축하며 힘을 그러모았다. 잿빛곰이 무너진 자세를 되찾아 다시 나를 공격하기 전에, 나는 마력을 격발시키며 전력으로 성검을 쏘아 보냈다. 해방된 힘은 공기를 갈갈이 찢어버리며 잿빛곰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갔다. 마지막을 직감한 것인지 곰은 그 어느 때보다 드세게 포효했고, 내 성검은 강철보다도 질기고 강한 놈의 살거죽을 뚫어내며 그 충격을 고스란히 놈의 심장부에 전달했다. 나는 그 몸을 꿰뚫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대로 성검을 올려 그으며 잿빛곰의 몸을 몇 번이고 깊게 베어냈다.

우우우우….

잿빛곰은 그대로 우는 소리와 함께 뒤로 넘어가,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나는 긴장감에 미뤄놓았던 거친 숨을 토해내었고, 동시에 입에 들어간 흙모래를 뱉어냈다. 마침내 숨을 거둔 곰의 몸뚱이에서 피가 작은 천을 이루며 흘러내렸다. 옷과 얼굴은 흙먼지에 잿빛곰의 피로 엉망이었다.

“진짜, 더럽게 세네.”

잿빛곰은 여태 상대해왔던 마물과는 궤를 달리했다. 멧돼지나, 들개 따위는 몇 마리가 달려들어도 괜찮았는데, 1급 위험 마물은 역시 달랐다. 만일 ‘일곱 재앙’이 도사리는 전장에 나가게 되면 이런 놈들이 수십, 수백 단위로 쏟아져 내릴 건데, ‘세 번째 재앙’은 도대체 어떻게 잡은 건지 이쯤 되면 미스터리로 여겨야 할 지경이다.

“…일로이.”

바스락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뒤에서 다프네가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이 한가득하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괜찮다는 듯 손을 휙휙 내저었지만, 다프네는 여전히 걱정된다는 듯 내 얼굴에 조심스레 손을 올리더니 옆으로 조금씩 돌려보았다.

“괜찮아, 괜찮아. 네 방호마법 덕분에 다친 곳은 하나도 없어.”

다프네는 내 얼굴에서 손을 내리지 않은 채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녀의 보랏빛 눈은 참, 이렇게 마주할 때마다 조금씩 놀라게 된다.

“진짜죠?”

“그래. 진짜. 멀쩡하다니까.”

내가 너털웃음을 내뱉으며 몇 번이고 괜찮음을 확인해주자, 다프네는 그때야 얼굴을 살짝 빨갛게 물들이며 내게서 물러났다.

“…일로이는 강하네요.”

내 뒤편, 잿빛곰의 시체 쪽으로 시선을 돌린 다프네가 중얼거렸다. 나도 그녀의 눈을 따라 쓰러진 잿빛 곰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강하기는. 겨우 저 곰 한 마리를 잡는 데도 쩔쩔매고 있는데.”

“상처는 하나도 없잖아요. 한 대도 맞지 않고 혼자 저 잿빛곰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왕도 전체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을 거예요.”

다프네는 서툴게 나를 위로해주려 했다. 나는 저 위로 자체보다는, 누군가를 전투 중에 위로해줄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는 사실이 좋았다. 나는 성검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이리저리 꺾었다.

“‘세 번째 재앙’을 쓰러트렸을 때는 운이 좋았어. 다음에도 그러리라는 보장 따위는 없으니까, 지금 어떻게든 발버둥치는 거지.”

그래, 원작에서 ‘세 번째 재앙’을 쓰러트렸을 때는 파티의 모두가 부족한 상태였다. 아르옌도 약했고, 게오르그도, 아이시스도, 지금 휴가를 나간 그 마법사도 약했다. 일로이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덕분에 재앙을 쓰러트릴 때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었지. ‘세 번째 재앙’을 언급하자, 다프네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재앙은 왜 재앙일까요.”

세상을 멸망시킬 재앙. 신화의 시대에서부터 존재해온 일곱 개의 위협들. 그들을 쓰러트리는 건 인류 전체의 숙원이자 과제였다. 첫 번째 재앙과 두 번째 재앙은 과거, 왕과 영웅들이 어마어마한 희생을 내며 쓰러트렸다. 세 번째 재앙은 같은 수의 희생과 함께 어설픈 용사가 그 숨통을 끊었지.

“그러게나 말이다.”

나는 씁쓸하게 맞장구쳤다. 원작에서 서술된 나머지 재앙의 위용을 생각하니, 지금 이러고 앉아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이 더욱 와닿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겨우 며칠 사이 해는 더 길어졌다. 조금은 더 여유가 있으려나. 나는 잿빛곰이 쓰러트려 놓은 나무둥치에 다가가 걸터앉았다. 내 옆으로 다프네가 다가와 함께 앉았다.

“세 번째 재앙은 어땠나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던 다프네가 물었다.

“…크라켄. 알아? 엄청나게 큰 문어였지. 범선 따위가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로. 아마 뱃멀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가까이 가지도 못할 거야.”

대답은 해줬지만, 나는 세 번째 재앙과 싸운 적이 없으니, 이렇다 할 경험담은 들려줄 수 없었다. 나는 원작에서 뽑아낸 정보를 얼추 솎아내어 들려주되, 자세한 이야기를 피하며 얼버무렸다. 내가 그렇게 계속 이야기를 회피하다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다프네와 눈을 마주치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런, 너무 수상하게 굴었나….

“…괴로운 기억을 건드려서 미안해요.”

어라. 그게 아닌데.

다프네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내가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 것을, 그때의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말로 해석했나 보다. 내가 당황하여 뭐라 대답하지 않자, 다프네의 얼굴은 한층 울상이 되었다.

“그…조금 더 생각하고 말했어야 했는데.”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다프네에게는 미안하지만, 대충 그런 거로 알고 넘어가 줬으면 했다. 구태여 부연 설명을 덧붙이기도 뭣했고, 내가 겪은 적 없는 일을 계속 떠드는 것도 이상했으니까.

“괜찮아. 이제 그렇게 신경 안 써.”

내 대답에 다프네는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다프네가 그리 말이 없긴 해도, 함께 있을 때 어색하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는데, 괜히 방금 대화 때문에 나까지 이 침묵을 의식하게 되어버렸다. 나는 아무 말이나 생각해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네 마법, 이제 정말 많이 안정되었더라. 처음 받았을 때는 계속 떨고 있었는데.”

대화 주제가 바뀌자, 다프네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일로이 덕분이에요. 지금까지는 다른 누군가에게 보조 마법을 걸어보려 해도 자꾸 실패했는데, 일로이와 함께 싸울 때는 일로이에게만 집중할 수 있으니까….”

뭔가, 신나서 답지 않게 말을 쏟아내던 다프네가 갑자기 입을 닫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이번에는 무슨 일 때문에 그런가, 해서 걱정스레 다가갔더니 다프네는 파바박, 빠른 속도로 내게서 멀어졌다. 커튼처럼 가려졌던 연분홍 머리칼 아래로 보인 얼굴은 머리칼과 같은 색으로 물들어있었다.

“그, 그나저나, 일로이는 왜 오러를 쓰지 않는 건가요?”

“오러?”

다프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로이 정도로 마나를 사용하는 다른 실력자들은 대부분 오러를 사용하는데, 일로이는 오늘 잿빛곰을 상대하는데도 오러를 쓰지 않는 것 같아서.”

“아…, 오러.”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내 허리춤을 내려다보았다. 검끝부터 자루 끝까지 새하얀 성검이 그곳에 매달려있었다. 오러라, 다른 검으로 형성하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마나의 양은 충분했고,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도 알 수 있었다. 뭐, 어차피 의미 없는 가정이긴 하지만.

“오러를 형성하지 않는 게 아니라, 형성하지 못하는 거야.”

“네…? 그건… 혹시 일로이의 건강에….”

“내가 문제라서 오러를 사용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이 녀석이 문제거든.”

나는 성검의 검자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성검에는 오러를 덧씌울 수 없어. 제 아무리 뛰어난 검사라도 말이야.”

주인을 고르는 검이다. 검에 자아가 있는 건 당연하고, 그만큼 오래되었고 강력한 힘을 지닌 검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팔에 오러를 씌울 수 없듯, 하나의 자아를 형성하고 있는 성검 위로 오러를 씌울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럼….”

다프네는 오러를 씌울 수 없는 검 따위를 왜 쓰는 건지 물어보는 듯한 눈이었다. 나는 성검을 쓱 뽑아 들고 무릎 위로 올려놓아 보았다. 새하얗게 빛나는 성검의 검신에 무엇이 사용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성검의 겉모습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검신이 좀 새하얄 뿐, 그 외의 모든 건 일반적인 검과 같은 생김새였다.

“그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되겠지.”

나는 그리 중얼거리며 성검의 검자루를 쓰다듬었다. 서늘한 질감이 느껴졌다.

성검은 강력하다. 그건 확실하다. 오러를 덧씌우지 않은 채로도 잿빛곰의 가죽을 우습게 뚫어버릴 수 있고, 사용자를 강화하는 마나를 흘려보내 주기도 한다. 하지만, 성검의 진짜 힘은 겨우 그런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언제쯤이면 깨어나려나.’

제발, 지금 내가 일부러 험하게 구르는 게 헛고생은 아니어야 할 텐데. 나는 성검을 다시 칼집에 넣으며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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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오늘도 어떻게 무사히 끝냈다. 다프네의 마법이 점차 안정되어가고, 내가 전투에 익숙해지다 보니 한 번 떠날 때마다 잡는 마물의 수도 늘어났다. 물론 아직 다프네가 완전히 정상궤도에 돌아온 것은 아니었고, 나도 불안 요소가 있었으니 낙관할 수만은 없다.

‘…더 열심히 해야겠군.’

“오늘도 수고 많았어.”

“일로이도, 수고했어요.”

나는 다프네와 함께 기진맥진한 인사를 나누었다. 저 얼굴에 어린 표정에, 뿌듯함의 지분이 더 많아지면 좋겠는데. 그리 소박한 바람을 품고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누군가가 나와 다프네를 향해 다가오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저건….”

기척의 정체를 잡아낸 내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검은 사제복을 입은 장년의 남자가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내 옆의 다프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반면, 나는 작게 침음했다.

“이야, 용사님. 여기 계셨군요.”

용사가 알 만한 성직자라면 둘밖에 없었다. 성국의 군주, 청교회의 교황일 리는 없으니, 나머지 하나임이 분명했다.

“꽤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안드레 주교. 아이시스를 용사 파티에 보낸 사람. 나는 주교의 가는 눈을 마주하며 떨떠름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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