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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9화 (10/158)

Chapter 9 - 9. 불편한 식사 (2)

“오랜만입니다, 안드레 주교.”

주교는 이름을 불리자 고개를 끄덕이며 더 진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는 주교의 눈은 완전히 실눈이 되어버렸다. 그의 목에 걸린 묵주가 거리의 불빛을 받아 은은하게 달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마 첫 번째 원정…, ‘세 번째 재앙’을 물리치러 가기 전에 뵌 이후로는 처음이죠? 그간 휴가는 잘 보내고 있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휴가라니, 지금 막 일하고 돌아온 거 안 보이냐고. 비꼬는 거냐. 그닥 근황 이야기를 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기에, 나는 곧바로 화제를 바꾸었다.

“주교께서 카이로스 왕국에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주교는 눈썹을 까닥였다. 꼭 그걸 정말 몰라서 묻냐고 묻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러는 당신은 내가 휴가를 잘 보내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런 질문을 한 거냐?

“용사께서 더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이런 길가에서 터놓고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습니다만….”

주교는 주위를 흘긋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 알고 있다. 이번에 아이시스가 갑작스레 용사 파티를 탈퇴하게 된 것과 연관이 있겠지. 다프네의 어리둥절한 표정, 내 미묘한 표정과 안드레 주교의 사람 좋은 미소가 한데 모여 희한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안드레 주교는 흘긋 다프네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를 건네었다.

“용사님의 새로운 동료분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안드레 자빈이라고 합니다.”

“다… 다프네 에피폰이라고 합니다.”

다프네는 주교의 인사를 머뭇거리며 받다가, 슬금슬금 내 뒤로 다가왔다. 저 온화하게 웃는 표정에는 묘한 위압감이 엿보였다. 나는 한숨과 함께 다프네를 슬쩍 가리며 앞으로 나섰다. 앙드레 주교는 다른 의미로 껄끄러운 인물이었다. 저 모습의 이면에 무엇이 도사리는지,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주교의 일렁이는 그림자를 흘긋 바라보며, 나는 경계 태세로 전환했다.

“성국에서 바쁜 일이 한두 개가 아닐 텐데, 굳이 직접 찾아오셨네요.”

“아무렴 용사님과 관련된 일인데, 저보다 낮은 사람을 보낼 수야 있겠습니까. 교황께서도 직접 가보라 명하셨으니, 제가 움직이는 게 맞지요.”

안드레 주교는 그리 말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성직자 복장만 아니라면, 평범하게 야근하는 직장인의 표정이라 해도 믿을 것 같다. 주교는 그 피곤한 표정을 얼굴에서 금방 지워내며 손뼉을 짝, 쳤다. 표정 관리 하나는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였다.

“그나저나, 식사는 하셨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잠깐 밥이나 한 끼 하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주교가 고개를 돌려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내 등 뒤에서 다프네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다프네씨는 어떻습니까? 용사 파티의 일원이시니, 함께 식사하고 싶으시다면, 얼마든지 제가 용사님과 함께 대접해드리겠습니다. 제법 괜찮은 식당을 수배해놓았답니다.”

다프네는 즉각 고개를 내저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아무리 봐도 합석해서 식사를 즐길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으니까. 다프네는 그리고서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내게 향했다.

“먼저 가봐, 다프네. 내일부터는 주말이니, 푹 쉬었다가 월요일에 나오고.”

다프네는 뒤로 물러나면서도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화장실 간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안심하라는 듯 내가 한 번 웃어주고 나서야, 다프네는 내게 인사하고는 천천히, 끝까지 이쪽을 돌아보면서 빛나는 길 너머로 사라졌다.

뒤통수가 따가웠다. 고개를 다시 돌리니, 안드레 주교가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성격이 조금 변한 것 같군요. 아니면 그녀가 특별한 것입니까?”

“성격 운운할 정도로 우리가 오래 본 사이는 아니었던 거로 기억합니다만.”

일부러 까칠하게 대답했지만, 안드레 주교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아마 원래 일로이의 성격에 가까운 대답이었겠지.

“뭐, 좋습니다. 그나저나, 시간은 괜찮으신 거지요? 정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내게 애초에 선택지가 있을까 보냐. 나는 척추를 타고 올라와 뇌수를 파고드는 한기를 느끼며 몸을 떨었다. 겉으로 드러내서 괜한 경계심을 사면 곤란했다. 나는 최대한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좋습니다. 잠깐 대화할 시간이 필요한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요.”

내 대답을 듣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던 안드레 주교는 긴말하지 않고 등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주교의 목에 걸린 묵주가 흔들리며 반짝였다.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안드레 주교의 뒤를 천천히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는 원작에서 안드레 주교가 어떤 사람으로 등장했는지를 되새겼다.

안드레 자빈.

<다신 돌아가지 않겠다> 속 주요 종교, 청교회의 주교 중 한 사람. 실눈에 흰머리가 섞인 짧고 단정한 금발, 온화한 인상이 특징이다. 키는 일로이와 비슷할 정도로 크고, 마른 체형. 여기까지만 보았을 때는 그냥 평범한 성직자 조연에 지나지 않지만-.

“날씨가 썩 괜찮군요.”

뒤로 돌아보며 저런 웃음을 짓는 모습의 이면에는, 십자가를 든 도살자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를 처형자라 불렀고, 어떤 이들은 그를 심판관이라 불렀다. 그가 속한 집단을 혐오하는 이들은 그들을 청교회의 개, 혹은 교황의 개라는 멸칭으로 불렀다만, 안드레 자빈과 그가 속한 집단을 공식적으로 지칭하는 말은 따로 있었다.

이단심문관.

청교회의 권위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불사하는 집단. 그들의 특기는 살인이고, 취미는 고문이요, 납치와 협박은 숨 쉬듯 자연스레 행해지는 것이었다. 물론, 이단심문관은 청교회의 가장 비밀스러운 집단이며, 활동에 나설 일도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 구성원을 알기는커녕 이단심문관의 존재를 아예 모르거나, 안다고 해도 도시전설 정도로 치부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뭐, 적어도 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지만. 그리고 지금 그 괴물들의 우두머리 되는 사람과 단둘이서 밥을 먹게 생겼다. 잘도 밥이 넘어가겠군.

“자, 여기가 제가 찾아낸 식당입니다. 겉보기도 썩 괜찮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왕도에 계속 살고 있었을 건데, 이런 보물같은 장소를 발견하지 못하다니.”

“…그닥 맛집을 찾아다닐 여유 같은 건 없어서 말이죠.”

“그건 안타깝군요.”

안드레는 ‘보름달’이라고 적힌 작은 식당의 입구에서 내게 손짓했다. 나는 장작을 지고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심정으로, 안드레가 열어놓은 식당의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몇 달 전쯤에 왕도에서 우연히 알게 된 곳인데, 솜씨가 기가 막히더군요. 제 취향에 맞게도 잘 해주시고. 여러모로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익숙한 듯 구석 자리에 앉은 안드레가 그리 말했다. 안드레 주교가 당장 용사를 죽이러 오진 않았을 거다. 그랬다면 나는 진작에 살해되었을 테니까. 원작에서도 일로이가 죽을 때는 아니었으니, 오늘은 정말 그저 나와 이야기를 나누러 왔을 가능성이 크다.

달칵, 달칵.

식탁 위로 포도주가 놓였다. 안드레는 기껍다는 듯 병을 곧장 받아 들고 마개를 땄다. 아마 그리 좋은 포도주는 아닐 것 같지만,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주르륵. 내 잔에 짙은 적포도주가 채워졌다. 따라주는 사람이 사람인지라, 나는 되도록 저 와인의 빛깔을 피와 연관 짓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아, 이 말을 하는 걸 제가 잊었네요. ‘세 번째 재앙’을 격퇴하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말이죠.”

안드레는 잔 가득 따라놓은 포도주를 들어 올렸다. 나는 마지못해 내 잔을 들어 건배했다.

“축하는 제게 하지 마시죠. 얼굴에 금칠하는 거 같아 부끄럽습니다.”

안드레 주교는 입술을 축이며 웃었다. 가는 눈매 사이로 슬쩍 보이는 회색 눈동자가 나를 포착하고 있었다. 저 속에 칼날이 도사리고 있지는 않아야 할 텐데.

“이거 참, 겸손하시기는. 아무리 그래도, 이번에 세 번째 재앙을 물리친 용사께서는 이제 과거 전설적인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지위에 오른 겁니다. 이 정도 칭찬에 낯부끄러워하시면 앞으로 힘들 텐데요.”

“서론이 길군요.”

나는 대번에 안드레 주교의 말을 끊어내었다. 괜한 객기도 아니었고, 일부러 자극하는 것도 아니었다. 저 인간 백정은 겨우 이런 대화에 자극받을 정도로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걸 증빙하듯, 안드레 주교는 와인잔을 내려놓고는 호기심이 깃든 눈을 내게 향했다.

“달리 묻고 싶은 것이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주교는 포도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내가 삐딱한 자세로 나올수록 안드레 주교가 이 대화에 갖는 흥미도 점점 올라가는 것 같았다. 변태 같은 자식. 관심이 늘어난다는 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용사께서 아이시스와 갈등이 있을 거라고는, 일찍이 용사님을 처음 보았을 때 알아차렸죠.”

“그건 아이시스도 아마 알고 있었을 겁니다.”

내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안드레 주교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용사님, 대외적으로 드러나는 용사님의 위신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원정대에 있어 상당한 권위를 용사님께 부여한 것이지요.”

주교는 포도주잔을 천천히 허공에서 휘저었다. 내가 술은 입에도 대지 않은 동안 주교는 이미 가득 찼던 잔을 3분의 1 정도나 비워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용사님은 단순히 세상의 위협을 쓰러트릴 모험가일 뿐만이 아니라, 해외를 순방하는 카이로스 왕국의 특사이기도 하고, 우리 청교회에 있어서는 선택받은 전사이자, 신화의 증명자, 신앙의 전파자이기도 합니다.”

주교가 입을 열 때마다 감투가 하나씩 더 덧씌워졌다. 나는 더 듣기 싫어 손을 내저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고작 그 용병 하나 때문에 성녀와 용사를 갈라놓을 수는 없습니다. 이해하고 계시겠지요?”

달칵.

나와 안드레 주교 사이에 접시가 놓이기 시작했다. 내 앞으로는 김이 피어오르는 고깃덩어리가, 주교의 앞으로는 콩 샐러드와 빵이 놓였다. 주교는 즐겁다는 듯 포크를 집어 들고는 채소를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채식주의자 이단심문관.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조합이었다. 주교는 예의 바르게 샐러드를 씹어 삼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용사께서 어떤 이유로 그 용병을 추방하셨건 간에, 아이시스는 그랬으면 안 됐습니다. 끝까지 용사님의 곁에 남아있었어야 했단 말입니다. 이번 사태를 보니, 아직 덜 여문 상태에서 용사 파티를 조금 성급하게 구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그래.

아이시스, 그녀 딴으로는 청교회가 자신을 결코 건드릴 수 없으리라 생각했겠지. 어느 정도는 맞는 사실이지만, 그녀는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아이시스 자신은 건드릴 수 없지만, 그냥 떠돌이 용병 신세가 되어버린 아르옌은 얼마든지 건드릴 수 있다는 것.

“걱정하지 않으셔도 성녀는 곧 파티로 돌아오게 될 겁니다. 아이시스를 꼬드긴 용병도 우리 쪽에서 처벌할 수 있을 것이고요.”

아르옌이 아이시스를 꼬드겨 함께 파티를 탈퇴한 것으로 하자. 다른 건 묵인하겠다. 주교는 넌지시 그리 제안하고 있었다.

주교의 미소는 온화했지만, 그렇기에 훨씬 섬뜩했다. 마치 사람이 아니라 언제든지 내 목을 찌를 수 있는 비수와 마주 보고 대화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보아하니, 그 용병을 대체할 인재도 찾은 것 같더군요. 그러니 용사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다음 원정에 나설 시기를 늦추고, 아이시스가 돌아온다면 파티를 재정비할 시간을 가질 수도 있겠지요.”

원작에서 이단심문관들과 아르옌이 싸우게 된 에피소드가 있었다. 아르옌과 간신히 재회한 아이시스를 납치하고, 눈이 돌아가 버린 아르옌은 더욱 성장해 이단심문관들을 썰어버렸지. 그 사건 덕분에 조용히 살아가려던 아르옌이 본격적으로 재앙 공략에 나서게 되며, 청교회의 위상은 실추되고 일로이 역시 나락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한다.

일단, 말려야 한다. 아무리 내가 유사시를 대비하고 있다고는 해도 위험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려도 좋지 않으니,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해결할 수 있도록….”

“아이시스는.”

나는 주교의 말을 도중에 잘랐다.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하나 있을 것 같았다.

“그 용병, 아르옌을 따라 파티에서 탈퇴한 것이 아닙니다.”

“…호오.”

안드레 주교의 회색 눈이 이채를 띠었다. 내 눈을 꿰뚫을 듯 따라오는 이단심문관의 시선은 마치 감옥의 쇠창살처럼 나를 옭아매며 가두어놓는 것 같았다.

“허면?”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포크를 접시 위로 내려놓으며 의자에 등을 기대며 안드레 주교를 마주 바라보았다. 본래의 일로이가 아마 그러하듯, 거만한 눈빛을 띠며.

“성녀는 내가 직접 추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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