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 10. 불편한 식사 (3)
“성녀는 내가 직접 추방했습니다.”
파삭.
안드레 주교가 샐러드를 포크로 집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린 건 기분 탓일까. 입으로 샐러드를 가져가는 주교의 표정은 달라지지는 않았다. 어차피 저들이 당장 용사를 직접 해할 수는 없다. 온 왕국 사람들이 용사를 나라고 알고 있는 판에, 게다가 그 용사가 휴가를 보내는 중에 갑자기 갈아치우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테니.
“그래요? 용사님께서 아이시스를 직접 추방했다니. 그건 또 처음 듣는 말이네요.”
안드레 주교는 다시 포도주를 마시더니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마치 사업을 제안하려는 사람처럼 양손을 슥슥 비비며 탁자 위로 가지런히 모았다.
“물론 거짓말인 건 다 알고 있습니다. 아이시스가 용사 파티에서 나간 이후, 한 번도 교회와 접선하려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도 연기는 꽤 잘하시더군요. 내가 아니었으면 다 속았을 겁니다.”
속이는 건 역시 무리였나. 뭐, 정말 속는다면 그거대로 문제가 생겼겠지만 말이다. 애초에 안드레 주교가 고작 지어낸 말 한마디에 속아 넘어갈 위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뭐, 아직 카이로스 왕국은 성녀가 파티에서 나갔다는 사실 정도만 알고 있겠지만 말입니다.”
이제 비어버린 포도주잔을 탁자 위로 올려놓으며 안드레 주교가 눈썹을 까닥였다.
“그래서, 갑자기 그런 거짓말을 내게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번 용사 파티 인선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기회를 드렸는데, 용사께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건 아닐 테고…. 내 귀에는 당신이 꼭 내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그 기회, 잘못 잡았다가는 주인공의 분노를 사는 것도 모자라 바로 청교회가 내 목에 목줄을 걸어버릴 텐데. 아이시스가 어쩌다가 파티에서 나가게 됐는지, 그 정보를 왕국과 공유하지 않는 것도, 내게 빚을 지워두기 위해… 아니, 족쇄를 하나 채우기 위함일 것이다.
“상황을 아주 잘 알고 계신 듯하니, 말을 바꾸겠습니다. 내가 아이시스와 아르옌을 모두 추방한 것으로 합시다.”
내 말에 불편한 기색을 조금이라도 보일 줄 알았는데, 전혀. 주교는 조금도 동요한 모습이 아니었다. 내 얼굴에서부터 시작해 발끝까지 훑어보는 시선은 서늘했다. 나 또한 여기서 괜히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그렇게 한다면 청교회 측도 오명을 쓸 일은 없을 겁니다. 왕국과 성국의 돈독한 관계가 불편해질 일도 없을 것이고요.”
“웃기네요. 정말 우스워요. 정말 그거 하나 때문에, 당신이 쌓아 올린 공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겁니까? 절 보고 그걸 믿으라고요?”
“믿어주시면 정말 좋겠습니다만.”
아주 조금이지만, 안드레 주교의 가면이 벗겨져 내렸다. 딱히 이 사람 재미있으라고 하는 건 아니었는데, 주교는 진심으로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적개심보다는 차라리 흥미를 드러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용병을 파티에서 추방한 건 당신이 위임받은 권리죠. 독선적이라는 비판 정도는 들을 수 있겠지만, 관련자가 아닌 일반인은 그러려니, 생각하고 넘길 겁니다.”
그 추방한 녀석이 전력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지. 그리고 나중에 세계관 최강자가 될 것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지.
“하지만 아이시스가 스스로 파티를 나가게 된 건 상황이 다르지요. 신의와 사명을 저버린 성녀. 과연 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성녀도, 성국도 정말 곤란해졌을 겁니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 주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물론 용사님의 편입니다. 제안 또한, 성국에 있어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기도 하고요.”
안드레 주교는 포크를 내려놓고서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저 행동은, 꼭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잡아 내리는 모습 같았다.
“하지만 굳이 용사께서 그러는 이유가, 저는 궁금하네요. 개인적인 호기심입니다. 대답을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주교의 물음은 마치 나를 시험하려는 듯했다. 괜히 여기서 더 대답을 회피했다가는 일이 꼬여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 반항은 여기까지 하고 주교의 질문에 적당한 대답을 생각해냈다.
“저는 용사입니다. 사람들이 제게 기대하는 건 일곱 재앙을 물리치는 것이고, 재앙을 물리친다면 제가 무슨 짓을 저지르든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용사는 지고 있는 책임의 무게가 다르니까. 세상을 위협으로부터 구원해야 하는 존재니까.
“하지만, 성녀는 다릅니다. 성녀의 행보 위에 새겨진 한 번의 흠결은 웬만해서는 회복할 수 없을 겁니다. 설령 재앙을 물리치는 데 일조한다고 해도, 그건 결코 성녀의 본질이라 부를 수 없어요. 사람들이 성녀에게 기대하는 건 자애입니다.”
축복과 사랑을 베풀고, 기적을 실현하고, 사람을 치료하는. 타인과의 어떤 갈등과도 엮이지 않고 성인(聖人)으로 오롯이 남아야만 하는 존재.
“아이시스가 원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녀가 당분간은 성녀로서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재앙은 죽어도 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그때, 칼만 쓸 줄 아는 용사보다는 자애로운 성녀가 더 필요하겠죠.”
그러니, 괜한 짓은 하지 말자고.
“그러기 위해서는, 흙탕물은 성녀가 아닌 용사가 뒤집어쓰는 게 모두에게 나을 겁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안드레 주교는 내 대답이 진심인지 아닌지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저 미소를 가면처럼 얼굴 위로 씌워내며 자신의 빈 잔에 술을 따를 뿐이었다. 그리고서 주교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술잔을 들었다.
“당신이 달라진 건지, 아니면 애초에 이런 면모를 숨기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읍.
주교가 다시 포도주로 목을 축였다. 술이 들어감과 함께, 주교의 말과 표정에서 조금씩 드러나던 본색의 편린은 금세 모습을 감추었다.
“저는 일단 납득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용사님이 앞으로 어떤 선택을 내릴지, 청교회 신자의 한 사람으로서 지켜보는 것도 제법 보람이 있을 것 같으니.”
안드레 주교의 말을 마지막으로, 정적이 흘렀다. 식욕이 그다지 돌지는 않았지만, 멀뚱히 앉아 주교가 샐러드를 씹어먹는 걸 바라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나는 다시 포크를 집어 들고는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괜히 열받게 고기가 맛있었다.
“맛이 괜찮지 않습니까? 괜히 제가 왕도의 숨겨진 보석이라 부르는 게 아닙니다.”
뻘쭘한 침묵을 깨고, 주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괜히 뒤늦게 먹는 걸 놀리는 것 같아, 나는 고깝게 고개를 끄덕였다. 짜증이 나기는 해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맛이었으니까. 내가 썰어놓은 고기를 찍어 입으로 가져가는 와중에도 주교는 계속 샐러드를 깨작거리고 있었다.
“고기를 드시지 않는 이유는 뭡니까?”
“불쌍하니까요.”
“…예?”
“종교적인 이유 같은 건 아니고, 측은지심입니다. 저는 생각보다 동물을 좋아하거든요.”
미친놈은 미친놈인가보다. 하긴, 저 사제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갈 수 있겠지. 하지만 안드레 주교의 정체를 잘 아는 나로서는 그저 미친놈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괜한 질문을 한 걸 후회하며 얌전히 고기를 씹었다. 내가 고기를 으적거리는 소리와 주교가 샐러드를 아삭거리며 씹는 소리가 기묘하게 겹쳤다.
“조만간 왕궁에서 용사님을 부를 겁니다.”
나는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런 시기에 용사를 갑자기 부른다는 건, 결코 좋은 일로 부르는 건 아니겠지. 온갖 암투와 개짓거리가 오갈 왕궁을 생각하니, 두통이 도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지난번에 들은 바로는 청문회를 계획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왕궁의 대신들은 오랜만에 목소리 한 번 낼 기회니, 적극적으로 추진했을 겁니다.”
주교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하며, 접시 위에 마지막으로 남은 병아리콩을 쿡 집었다.
“아직도 왕궁의 사람들은 나를 정치 도구로만 생각하는 모양이네요.”
“정치인이 된다면 보이는 모든 걸 자기 안위 챙기는 도구로 사용하게 된다고 합니다. 용사님 또한 그들에게는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주교는 자기 일이 아닌 양 말하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어쩐지, 왕도 외곽에서 처음으로 마주쳤을 때와는 약간 눈빛이 달라진 것 같았다.
“오늘처럼만 얼추 대답할 수 있다면, 그 사람들의 입도 다물게 할 수 있겠군요.”
“저한테 그걸 알려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주교가 빙그레 웃었다.
“오늘 잠깐 대화를 나누면서 용사님이 더 마음에 들었거든요. 정말인지, 제가 여태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습니다.”
내가 얼굴을 확 일그러뜨리자, 주교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뭐 저딴 소리를 하고 앉아있어. 나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인간과 사이좋게 2차 하러 가거나 어깨동무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먼저 가겠습니다. 밥은 사주시는 거겠죠?”
“예…뭐.”
“정보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그럼 이만.”
나는 남은 포도주를 한 번에 입안에 털어 넣고는 뒤로 돌아섰다. 기분처럼 입안이 떫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안드레 주교를 돌아보고는 도망치듯 식당을 나섰다. 그래도, 덕분에 우선 해야 할 일을 확실히 정할 수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골목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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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단 말이지.”
안드레 주교는 용사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가는 눈과 함께 마치 뱀 한 마리가 의자에 앉아 웃음을 짓는 듯한 모습이었다.
“저렇게까지 똘똘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인선 책임을 덜어주겠다는 명목에 용사의 발에 적당히 족쇄를 채워놓고, 성녀도 다시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 아이시스의 실수는 분명 청교회에 타격을 주겠지만, 용사에게 빚을 지워둘 수 있다는 건 확실한 이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용사는 책임을 뒤집어쓰는 대신 족쇄를 차지 않고, 성녀 또한 내버려 둔다는 선택지를 내놓았다.
“세 번째 재앙을 쓰러트린 게 그렇게 영향이 컸나.”
거기다가, 용사는 처음 주교를 만났을 때부터 자리를 떠날 때까지 단 한 번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 예전에 만났을 때는 이렇게까지 경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가 너무 느슨하게 굴었나? 주교는 포도주를 음미하며 즐겁게 탁자를 두드렸다.
“뭐…, 용사님 말대로 저는 당분간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겠습니다.”
교회에 해가 될 일은 없다. 지금은 용사가 통제 범위를 벗어나 행동해도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이유였다. 주교는 주머니에서 궐련을 꺼내 입에 물었다. 관절이 울퉁불퉁한 검지 끝에서 샛노란 빛이 피어올랐다. 성법기(聖法技)의 성스러운 불이었다. 궐련의 끝자락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길게 빨아들이면 담뱃불이 붙는다.
“용사 가는 길에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주교의 입에서 담배 연기가 장막처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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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다. 날씨도 더럽게 좋았다.
용사도 이런 주말에는 쉬어야지, 는 개뿔. 나는 오늘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을 나서, 왕도의 밖으로 가는 검문소에서 병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원래 계획은 푹 쉬는 것이었지만, 안드레 주교와 대화를 나누고 난 뒤로 생각이 바뀌었다. 쉬고 있을 시간 따위, 용사에게 없었다.
“주말인데도 수고가 많습니다, 용사님.”
“위병님이야말로.”
오늘, 늘 곁에 대동하던 다프네는 없다. 든든하게 몸을 감싸주던 방호 마법도 없다. 오늘은 나, 그리고 허리춤에 매달린 성검만이 있을 뿐.
…가자고.
나는 성검을 뽑아 들고 미풍이 불어오는, 조용한 숲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오늘의 목표 :
성검 1단계 개방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