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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12화 (13/158)

Chapter 12 - 12. 개방 (2)

정확히는, 거미의 배 위로 여성의 상반신이 돋아난 것이 벽에 붙어 있었다. 거미의 체모가 두텁게 몸 곳곳을 덮고 있었고, 그 꼭대기에 달린 머리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탄생할 수 없는, 강한 마력에 의한 돌연변이 마물이었다. 아마 저 돋아난 여성의 몸은 과거에 저 빌어먹을 년이 잡아먹은 수많은 모험가 중 하나일 거다.

‘아라그리드’.

나는 저 녀석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 아르옌이 상대한 마물 중 하나였으니까. 개미굴의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보스에 해당하는 마물이자, ‘이름이 있는’ 마물이었다. 마물의 개체에 이름이 있다는 건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이름이 생길 정도로 오래 살아남아 악명을 떨쳤거나, 자아를 갖고 자신에게 이름을 붙일 정도의 지성이 있거나.

“안녕? 난 아라그리드야. 이 굴의 가장 깊은 곳에 살고 있어.”

불행하게도, 저년은 둘 다에 해당하는 괴물이었다.

“맛있는 냄새가 이 굴의 밑바닥까지 폴폴 풍기더라.”

거미는 얼음을 깎아 만든 구슬을 굴리는 듯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말의 마디마다 추임새처럼 딸깍거리는 소리가 났다.

“특히 거기 너, 아주 자극적인 냄새가 나던데.”

내 횃불과 하비의 랜턴 빛에 아라그리드의 대가리에 박힌 흰자 없는 눈이 새카만 구슬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저 눈이 향하는 곳은 정확히 내 쪽. 내 몸에서 삼겹살 냄새라도 나는 건가.

“…이거, 뒤쪽으로 도망가야 할 것 같은데요. 말하는 거미 마물, 길드에서 들어본 적이 있어요. 차라리 굴 깊이 들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놈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하비가 내게 속삭였다.

“이 굴 전체가 내 둥지나 다름없으니, 들어와 주면 아주 고맙겠어.”

친절하게도, 아라그리드가 깔깔거리며 하비의 속삭임에 대답했다. 거미가 제 말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란 듯했다. 거미는 여섯 발을 딸각거리며 거미줄을 타고 벽에서 내려왔다. 왜 발이 여섯 개인가 보았더니, 남은 두 개는 팔이 되어 제 얼굴을 매만지고 있었다. 거미가 기어 다니며 돌바닥을 갉는 소리가 귀를 뚫고는 뇌리를 주무르는 것 같았다.

“내 새끼들의 좋은 한 끼 식사 거리가 되겠구나.”

새끼들?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등 뒤에서부터 손톱으로 달걀 껍데기를 긁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비의 얼굴이 굳고, 로빈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어나고, 레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뒤쪽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확인하고 싶었지만, 저 괴물에게서 절대 눈을 떼면 안 된다. 나는 자꾸만 뒤로 돌아보려 경련을 일으키는 목을 붙들려 이를 부드득 갈았다.

“거미… 거미들이….”

외마디 비명과 같은 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동공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라그리드의 새끼들이 동굴 깊은 곳에서부터 기어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싸워야 합니다.”

레아가 그리 말하며 도끼를 거머쥐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성검은 깨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런 기적에 의존하려고 하면 앞으로 벌어질 수많은 변수 속에서 내가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나는 머릿속에서 개방이라는 단어를 지워버리며 기수식을 취했다.

굴 깊은 곳에서 기어 나온 거미들이 우리의 주위를 둘러쌌다. 어미인 아라그리드를 닮아 새끼 거미들 또한 무식하게 크기가 컸다. 사람 몸만 한 새끼 거미들이 적어도 백 마리. 새끼라고는 하지만 하나하나가 웬만한 마물만큼이나 강할 거다.

“용사님….”

전투 대원이 아닌 로빈과 하비가 나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거미의 눈, 사람의 눈. 시선이 무거웠다. 수십, 수백 쌍의 눈은 전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이 동공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눈이 되어 나를 바라봄으로써 찌부러뜨려 죽이려는 것 같았다.

전장의 침묵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거미들의 발이 딸깍거리는 소리가 초침을 대신해서 폭발을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마지막 한 번의 딸깍거림을 남겨두었을 때, 아라그리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거 아니?”

아라그리드가 천천히 그 여섯 다리를 놀리며 내게로 다가왔다. 주위를 빼곡이 메우고 있던 새끼 거미들이 제 어미를 위해 물러서며 길을 터주었다.

“거기 앞에 서 있는 남자만 아니었어도, 내가 여기까지 올라올 일은 없었어. 저 남자가 너무 농후하고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데, 아무리 굴의 가장 안쪽에서 잠을 자는 나라도, 이건 도저히 참지를 못하겠더라고.”

사람 모양의 상체가 서서히 앞으로 기울어졌다. 거미는 그 눈을 모험가 파티원들과 하나씩, 확실히 마주하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너희들은 희생되는 거야. 너희와 함께 온 이 남자 때문에. 그리고, 이 남자는 꽤 강하지만 나는 이길 수 없어.”

나를 줄곧 주시하던 로빈과 하비의 시선이 떨리고 있었다. 레아만큼은 표정에 변동이 없었지만, 그녀는 제 동료들을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분하지? 아, 분하다고 하는 게 아니었나? 억울하지? 여기서 너희들이 죽지 않아도 괜찮은데, 내게 머리부터 거미줄에 묶여 천천히 녹아가며 죽지 않아도 되는데.”

아라그리드의 미소는 허공에 걸려 시계추처럼 흔들린다. 마물은 모험가들의 반응을 음미하듯 지그시 바라보며 그 입을 더욱 섬뜩하게 찢었다.

“원망스럽지?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지?”

아라그리드의 고개는 완전히 모험가들의 눈높이와 맞닿았다. 마물은 로빈과 하비의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며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마물의 말은 얼음처럼 사람들 사이를 미끄러져 지나다니고 있었다.

“내가 너희들이 살 방법을 하나 가르쳐줄까?”

번들거리는 아라그리드의 눈과 모험가들의 눈이 마주쳤다.

“사실 너희들은 먹어봤자 맛없어. 마나가 풍부하지도 않고. 내가 진짜 원하는 건 그 남자.”

아라그리드가 나를 가리키며 웃어 보였다.

“이 녀석을 남겨두고 가겠다고 하면, 가만히 보내줄게. 나도 쓸데없이 내 새끼들을 많이 잃는 건 싫어. 그냥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가면 되는 거야. 걱정하지 마. 아 녀석은 내가 붙잡고 있을 테니까.”

다시, 모험가들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고, 모험가들과 눈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기수식을 취한 그대로, 눈을 아라그리드에 고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기습은 할 수 없었다. 아라그리드의 움직임은 계속 나를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야 해.”

하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빈은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고, 레아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냐고 묻는 듯 눈을 홉뜨고 하비를 노려보았다. 이제껏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로 일관하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완전히 굳어버린 듯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레아의 말에 하비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모르겠어? 우리가 여기서 죽을 이유 따위는 없잖아. 일단 나는 지금 죽기 싫어. 로빈도 같은 생각일 거고. 리더라면 냉철하게 판단해. 잠시 동행했다고는 해도, 용사는 우리 파티가 아니잖아. 여기서 싸워서 우리를 다 죽일 생각이야? 안 오겠다면, 나라도 먼저 가겠어.”

하비는 따지듯 말하며 로빈의 손을 잡아끌었다. 로빈은 그대로 하비에게 끌려갔고, 레아는 나를 계속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휙 돌리고는 하비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모험가들이 사라질 때까지 단 한 번도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계속, 아라그리드의 움직임만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횃불과 랜턴이 사라진 동굴 속에서 내 시야가 천천히 회복되며 다시 아라그리드를 포착했다.

“흐음.”

아라그리드는 사라지는 모험가들을 바라보며 웃음을 흘렸다.

“너, 독특하네. 화 안 나? 저 녀석들 안 죽여? 일부러 경계도 느슨하게 해줬는데.”

“그렇게 몇 명이나 잡아먹었지?”

내 질문에 아라그리드의 입이 찢어질 듯 올라갔다. 사람의 말을 할 줄 아는 마물은 위험했다.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절대 통하지 않을, 엉터리 협박이라도 듣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었으니까. 마물이 말을 한다는 사실은 곧 공포였고, 공포는 사람의 이성을 좀먹는다. 놈들은 그렇게 사람을 가지고 놀다가, 죽여버린다.

“잘 아네?”

아라그리드의 발이 딸깍거렸다. 손가락으로 제 턱 아래를 받치며, 괴물의 머리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우면서 징그러운 얼굴이었다.

“저 모험가들과 내가 함께 저항하면, 자칫하면 변수가 발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겠지. 그러니까 저 녀석들의 머릿속에서 남아 저항한다는 선택지를 없애려 한 거잖아. 나를 더 죽이기 쉽게 하려고. 적당히 강한 사람들을 만나면, 대체로 이런 식으로 대응했겠지.”

아라그리드는 진심으로 놀란 눈치였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잘 아니? 다른 사람들은 백이면 백 자기편을 공격하던데.”

그러면서 의문이 든다는 듯 눈가를 좁혔다.

“그리고, 그렇게 잘 알면서도 왜 나를 공격하려 하지 않았던 거지? 나를 공격했으면, 그 모험가들도 억지로 싸워야 했을 건데?”

“그랬다면 저 모험가들이라도 살릴 기회를 놓쳤겠지.”

나를 두고 가버린 게 괘씸할 수는 있어도, 저들에게 있어서는 최선의 수였다. 남아봤자 내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은 레아뿐이었을 거고, 그 레아도 이 괴물과 싸우면 결국 이기지 못하고 죽었을 테니까.

나를 죽이려 하지도 않았고, 내 탓을 하지도 않았다.

내가 성인군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거슬린다는 이유로 사람 목을 썰어버릴 정도의 정신병자도 아니었다. 그리고, 조금이지만 아직 살아남을 가능성도 있었고. 나는 하비가 동굴을 나가려 하기 전, 몰래 내게 입 모양으로 전달해주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사람들과 다시 올게요.’

저 녀석을 상대로 시간을 끌면서 버틴다면, 지원군이 올 수도 있다. 나는 내뱉듯 그리 말하고 마나를 끌어올렸다. 성검은 깨어나지 않는다. 방호마법도 없다. 과연 오래 버티기나 할 수 있을까. 목전에서 죽음이 확연한 형태를 띠고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쉽네에. 거기서는 감점이야.”

아라그리드는 말끝을 길게 늘어뜨리며 말했다.

“저 녀석들이 진심으로, 절박하게 도망가려는 게 아닌 걸 내가 몰랐을까? 바보들. 그런 작전을 생각했다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로 내 둥지를 뛰쳐나갔어야지. 남아서 여유롭게 생각도 하고, 지원군을 불러올 거라는 말도 하고. 보면서 얼마나 우스웠는지 몰라.”

아라그리드가 광소를 터뜨렸다. 괴물의 웃음소리는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동공을 울렸다. 이 괴물 새끼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해하는 것 외에도 가지고 노는 것도 아주 좋아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런데 내가 걔네를 왜 그냥 가게 뒀는지 알아?”

성검을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라그리드는 나를 내려다보며 황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검은자위밖에 없는 눈이 번들거렸다. 사각, 사각, 사각, 사각. 거미 새끼들이 제 어미를 호위하려는 듯 아라그리드의 앞으로 몰려들며 장벽을 이루었다.

“내 새끼들도 이제 슬슬 혼자 사냥하는 법을 알아야 하거든.”

나는 몸속의 마나를 격발시키며 신형을 날렸다. 거미의 장벽이 격류가 되어 나를 덮친다, 성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저 가증스러운 마물의 머리통을 잘라내기 위해, 망설임 없이 거미들에게로 검끝을 꽂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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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하비! 너는 도대체 왜…!”

하비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가오는 레아를 향해 다급하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레아는 영문도 모른 채 더 크게 화를 내려다, 하비가 그녀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리는 탓에 당황하며 멈춰버리고 말았다.

“지원군을 부르러 갈 거야.”

하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레아는 눈을 크게 뜨며 하비를 바라보았다. 하비는 다시 조용히 하라는 당부를 내리고는 레아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내렸다.

“어째서 저 거미 괴물이 우리를 풀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둘러 여기를 빠져나가서 왕도로 돌아가거나, 지나가는 모험가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해. 용사님이라면 혹시 모르지만, 저기서 결코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거야.”

레아는 하비의 말을 듣고는,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빈은 여전히 용사가 있는 쪽이 신경 쓰인다는 듯 뒤로 흘긋흘긋 돌아보았지만, 이내 일행의 발걸음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지나가는 모험가에게 부탁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야. 모험가를 찾아볼 생각도 하지 말고 곧장 왕도로 향해 도움을 요청하는 게 좋겠어.”

하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도 용사의 힘을 믿었지만, 용사가 그 괴물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맞아. 용사님이니, 어떻게든 빠른 정규군 파견만 할 수 있다면….”

앞서가던 레아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하비는 레아에게 어째서 멈추었냐고 물어보기도 전, 그 이유를 깨달아버리고 말았다.

사각, 사각, 사각, 사각.

뛰어서 빠져나온 통로의 맞은편. 사람 몸통만 한 거미가 수십 마리씩 바위틈 새로 삐져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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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봐라,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아까운데.”

초주검이 된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나는 동공의 벽에 처박힌 채로 아라그리드를 노려보았다, 방금 잘린 그녀의 다리 한 쌍이 새로 돋아나는 중이었다.

“너 때문에 내 사랑스러운 새끼들을 꽤 많이 잃어야 했잖아.”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어떻게든 아라그리드를 막아서던 새끼 거미 떼를 뚫어낼 수 있었다. 놈들은 아직 지능이랄 것을 갖추지 못한 상태로 그저 아라그리드의 통제를 따르고 있었던 것 같다. 체계적으로 나를 공격하려 하기보다는 아라그리드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노 젓듯 검을 휘두르며 거미들을 수없이 많이 죽이긴 했다만...

엄연히 따지자면, 이 새끼 거미들의 어미 되는 년의 지분도 만만치 않다. 거미들을 뚫어내고 아라그리드와 전투를 벌였다. 처음 싸울 때는 생각보다 분전했다고 생각했다. 몸에 상처를 몇 군데나 내고, 다리도 세 개나 잘랐다. 물론 그만큼 내 몸에도 상처가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지만, 이 괴물을 쓰러트리고 살아나갈 수 있겠다는 희망에 가려 상처의 고통은 둔했다.

‘생각보다 짜증 나는구나, 너.’

그리 말하며 아라그리드가 새끼 거미를 하나 집어삼키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라그리드는 큰 상처가 생길 때마다 무차별적으로 자신의 새끼를 잡아먹었다. 새끼는 어미의 자양분이 되어 잘린 팔다리를 자라나게 했고, 베어져 벌어지는 몸통의 상처에 새살을 돋게 했다.

나는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채 너덜너덜한 상태가 되어버린 한편, 저 거미 괴물은 방금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말짱했다.

“…부족하구나.”

아라그리드의 다리가 돋아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아라그리드는 한껏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바닥의 새끼 거미들을 무차별적으로 집어 들고 독으로 녹여 먹었다. 그 기괴한 광경에 나는 헛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잘도 내가 내 새끼들을 먹게 했겠다.”

아라그리드는 분노한 목소리로 말하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잇새로 욕지기를 흘려보내면서도 성검으로 땅을 짚고 일어섰다. 아직은 괜찮다. 아직, 버틸 수 있다.

쾅-!!

“큭-!”

아라그리드의 발이 날아들었고, 나는 꼴사납게 공격을 피하려 땅을 구르다가 그 발에 차여 허공을 날았다.

“커헉.”

위험했다. 이 이상으로 공격을 허용하면, 정신력으로 억지로 버티고 있던 몸이 완전히 무너져버릴 거다. 억지로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려던 내 몸을, 아라그리드가 손으로 집어 올렸다.

퍽.

나는 다시 집어던져져 동공의 반대편 벽 아래에 추락했다. 뼈가 몇 군데 부러진 것 같다. 숨 쉴 때마다 흉부가 따끔거리는 것으로 보아 갈비뼈도 두어 군데 부러졌나 보다. 레아는 잘 버티고 있을까? 나보다 먼저 죽지는 않았어야 할 텐데. 나는 후들거리면서도 손에 쥔 성검을 절대 놓으려 하지는 않았다.

네가 원하는 게 뭐냐.

그리고, 누가 아까 전부터 계속 싸가지 없는 말투로 귀에 이상한 소리를 지껄인다. 저승사자인가? 사람이 죽음의 위기를 목전에 두니 이상한 소리도 들리나 보다.

네가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다.

내가 원하는 거? 당연하지 않나. 지금 이 거미를 죽여버리고, 살아있다면, 모험가 파티도 구해내고, 살아남는 거다. 그리고 다시 아르옌과 엮일 일 없이 남은 재앙을 쓰러트리고, 결국, 결국은….

-지켜내고 싶어.

내 안에서, 내가 아닌 것 같은 무언가가 대답의 마지막 문장을 완성했다.

“[잘 알겠다.]”

키이이잉-!!

성검의 검신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미증유의 힘이 내 몸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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