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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13화 (14/158)

Chapter 13 - 13. 개방 (3)

레아가 손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도끼를 강하게 쥐었다. 하비와 로빈은 자리에 멈춰 서 얼굴을 굳혔다. 새끼 거미들은 동굴의 바닥에서부터 벽면까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로빈…, 우선 가방은 버려.”

레아의 말에 로빈은 군말하지 않고 배낭을 내려놓았다. 하비의 손에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고, 로빈은 배낭에 넣어 다니던 메이스를 꺼내 들었다.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모험가로 몇 년을 살아가면서 위험했던 적은 많았다. 실수로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만큼 선명하게 죽음과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마. 우선 여기를 뚫고 나아가는 걸 우선해야 해.”

로빈과 하비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자신을 위해 하는 말이기도 했다. 여기서 자기들이 쓰러진다면, 저 뒤, 동공 속에서 싸우는 용사도 구해낼 수 없었다.

“그 거미새끼. 그냥 보내준다고 해서 조금 이상하다 생각하긴 했는데.”

하비가 두려움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애초에 우리가 가든, 가지 않든 상관이 없었던 거구나.”

“무기 똑바로 잡아. 여차하면 한 명만 살려 보내야 할 것 같으니까.”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레아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뚫어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뚫을 각오로 싸워야 했다. 레아는 도끼를 그러쥐고는 그들에게로 뛰어 날아오는 거미의 아가리에 도끼날을 박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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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검에서 안개처럼 무겁고 정숙하게 뿜어져 나오는 빛은 태양이라기에는 순결했고, 달빛이라기에는 너무 환하게 빛났다. 벼락불이라기에는 소란스럽지 않았지만, 촛불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파괴적이었다. 그래, 굳이 말하자면 세상을 관망하듯 멀리서 빛나는 은하와 별무리. 혹은 길게 광망을 그리며 지평선과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지는 유성이 비춘 외계의 숭고(崇高).

“저게… 도대체 뭐냐.”

경악한 아라그리드의 목소리. 내 몸은 빛에 이끌려 인형처럼 늘어지며 일어났다. 누가 사지의 관절과 뼈, 근육 사이로 실을 꿰어 넣고서, 그 실을 잡아당겨 몸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만큼 성검에서 내게 흘러 들어오는 힘은 폭력적이었다.

“어떻게… 다 죽어가던 놈이.”

귓가가 윙윙거리며 울리고 있었다. 뼈와 살과 근육, 핏줄이. 몸을 구성하는 세포 하나하나가 몸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힘을 받아들이며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솔직히, 뼈 부러지고 살 찢어지던 고통보다 지금 이 힘을 감내하며 겪는 고통이 훨씬 심했다. 몸이 안으로 우그러드는 동시에 바깥으로 팽창하고 있었다. 몸이 아주 길게 버티지는 못할 것 같다. 빨리 끝내야 한다.

나는 성검을 두 손으로 쥐고 재차 기수식을 취했다. 성검의 빛이 한층 강렬해졌다. 몸 전체를 관통하는 강렬한 마력의 격류에 내 몸은 달아오른 포신이 되었고, 성검은 적에게 날아갈 포환이 되었다. 그 기세에, 아라그리드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앞으로 손을 쭉 뻗었다.

“가만히 둘 줄 알고!”

거미줄이 내게 쇄도했다. 뱀처럼 내 발치에 똬리를 틀던 거미줄은 올가미를 만들어 내 발목을 붙들었다. 발목이 붙들리기가 무섭게 거미줄이 망처럼 펼쳐지며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그대로 죽여주마.”

아라그리드는 이빨을 드러내며 흉악하게 웃어 보였다. 아라그리드가 손을 가볍게 뒤로 잡아당기는 시늉을 하고, 거미줄이 팽팽히 당겨지며 내 몸을 잡아당기려 했다. 장력을 받는 거미줄이 천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늘어나기 시작했다.

“…어째서?!”

끌려가지 않는다. 준마 수백 마리가 내 몸을 잡아끄는 것 같은 장력이 느껴졌지만, 괜히 이런 고통을 선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듯 내 몸은 깊이 뿌리 내린 고목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라그리드는 경악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더욱 거세가 나를 잡아당기려 제 팔까지 끌어왔다.

“언제까지 그렇게 버틸 수 있나 보자. 네놈의 팔다리를 그대로 뜯어내 버리겠다.”

몸과 거미줄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하며 거미줄을 잡아당겼지만, 나와 아라그리드 사이의 균형은 여전히 깨지지 않고 팽팽했다. 덕분에 나와 아라그리드는 거미줄에 묶인 채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고, 이 경우 훨씬 유리한 쪽은 저 거미였다. 나와 아라그리드가 줄다리기를 하는 중 슬금슬금 내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한 저 새끼 거미들이 내 몸을 물어뜯어 버릴 거다.

그때, 계속 머릿속에 들려오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저항이 항상 답인 건 아니다. 주어진 힘을 이용해라.]”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순간, 나는 몸에 힘을 풀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거미줄은 내가 버티기를 포기한 순간 날 쏘아내는 활시위가 되었다. 움직임을 간소하게. 나는 잿빛곰을 찔러 죽일 때의 움직임을 떠올리며 검끝에 온 감각을 집중했다. 안개처럼 흩날리던 성검의 마력이 검신에 정착하며 한층 강하게 빛을 내었다.

카아아앙-!

전투기가 창공을 갈라내는 소리가 들려온다. 강하게 응집된 마력이 성검과 함께 공기를 찢어내며 나는 소리인 거 같았다. 몸에 가해지는 압박이 덩달아 늘어났다. 바람이 공기와 더불어 나까지 찢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압박을 견뎌내며 팔을 당겨 아라그리드의 숨통을 끊을 준비를 마쳤다.

몸통.

나는 아라그리드의 배를 뚫어버릴 작정으로 성검을 쏘았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아라그리드는 싸움이고 뭐고, 모조리 내팽개치고는 거미줄을 당겨 동공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콰아아앙-!!!

성검은 그대로 동공의 벽면에 거대한 크레이터를 만들어놓으며 함몰시켜버렸다. 나는 내심 그 절륜한 위력에 식은땀을 흘리며 경악했다.

‘…그래도 공격이 닿지 않았어.’

검신이 무언가를 베고 지나간 느낌은 있었지만, 의도했던 대로 아라그리드의 몸통을 꿰뚫어버리진 못한 것 같았다. 나는 바닥에 흩뿌려진 녹색 체액을 보며 혀를 내찼다. 나는 피어오르는 흙먼지 사이로, 체액의 흔적을 쫓아 아라그리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놈이… 이놈이 잘도!!!”

아라그리드의 ‘상반신’, 그러니까, 여성의 몸이 있는 곳과 거미의 몸통이 연결되는 접합부가 반쯤 잘려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거미의 배에 해당하는 부분도 검풍에 찢겨버린 듯 내장을 쏟아냈고, 옆구리에 붙은 세 쌍의 다리는 파들거리며 경련했다.

“네놈만큼은 반드시 잡아먹어 버리겠다-!”

아라그리드의 목소리는 끝으로 가며 칼로 금속판을 긁는 듯한 끔찍한 소음으로 바뀌었다. 쩌어억. 아라그리드의 입이 마치 지퍼라도 달린 듯 찢어졌다.

마치 쓰레기통의 뚜껑을 열어버리듯 제 머리통을 열어젖힌 아라그리드가 손을 뻗어 새끼 거미들을 삽처럼 퍼 올렸다. 아니, 손이라고 할 수 없겠군. 이제 그 사람의 것을 닮아있던 ‘팔’은 세 개의 마디를 지닌 거미의 그것으로 바뀌어있었다.

으걱, 으걱.

새끼 거미들은 세절기에 빨려 들어가는 파지처럼 저항 없이 아라그리드의 입으로 빨려들어갔다. 나는 놈이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 완전히 숨통을 끊으려 했으나, 아라그리드가 사방으로 흩뿌리는 독에 주춤하며 시간을 빼앗겼다.

내가 발을 주춤거리자, 그 목소리가 참견하듯 다시 들려왔다.

“[쯧쯧. 성검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도 잘 모르는군.]”

나는 애써 그 말을 한 귀로 흘리고는 성검을 돌려 쥐었다. 새끼 거미 수십 마리를 순식간에 삼켜버린 아라그리드의 상반신이 흐물거리더니, 사람의 형체를 잃어버리고는 촛농처럼 줄줄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카득, 카득, 카득.

껍데기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함께, 아라그리드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의 상반신은 오간데 없고, 이번에는 그냥 거대한 거미의 모습이었다. 사람의 몸통이 돋아나 있던 모습은 낯설고 아름답기라도 했는데, 이젠 그냥 커다랗고 징그러운 거미 한 마리에 불과했다.

키에에에엑-!!

사람의 상반신이 사라지면서 발성기관이 바뀌어서 그런가, 사람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저런 모습이어서야, 이름으로 칭하는 건 아까웠다. 거미 마물. 내 안에서 저 괴물의 호칭이 아라그리드에서 거미 마물로 정정되었다.

성검의 빛이 다시금 피어올랐다. 몸을 좀먹던 고통이 차츰 익숙해지고 있었다. 고통이 둔해짐과 함께 몸이 안정감을 찾았다. 이제야 이 힘을 내가 원하는 대로 써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너를 최대한 천천히 죽이며 이것저것 시험해보고 싶은데.”

나는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거미 마물이 내 말에 대답하듯 날카롭게 울었다.

“덕분에 빨리 가야 하잖아.”

보였다. 성검을 개방하기 전에는 무작정 검을 휘두르기만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검을 그려야 할지 그 길이 아주 조금은 보이는 것 같았다. 심장에서 시작해 전신으로, 다리로 팔로 퍼져나가는 마력의 흐름에서 검로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었다. 나는 검을 들어 거미 마물을 겨냥했다. 놈들이 도망갈 길은 내 첫 공격에 벽면이 무너져내려 막혀버렸다.

키이이이익-!!

거미 마물이 남은 새끼들을 데리고 펄쩍 뛰었다. 힘을 이용하라는 말. 나는 끝까지 놈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성검의 검끝을 낮추었다. 내가 속도와 힘으로 저들을 압도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일부러 마주 뛰어줄 이유는 없었다.

우선 하나. 가장 먼저 떨어지는 새끼 거미의 머리가 하늘을 날았다. 그 단면이 분리도기도 전 다음 거미의 몸이 둘로 쪼개졌다. 다음 거미의 배가 뚫리고, 쏟아져 내리는 거미들의 덩어리에 한 줄기 섬광이 균열처럼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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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불러보는 건 이번이 세 번째. 로빈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엎어져 쓰러진 와중에 몸이 조금씩 들썩이는 걸 보면 아직 죽은 건 아니었다. 레아는 고개를 돌려 그 옆에 나란히 쓰러진 하비를 바라보았다. 로빈의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이대로 둔다면 온몸이 마비된 채로 거미에게 먹혀 죽을 거다. 회복 포션은 다 썼다. 거미의 이빨에 물리며 서서히 몸에 쌓이는 독을 해독할 방법은 이제 없었다.

“나도 얼마 안 남았네.”

레아는 중독되어 서서히 굳어가기 시작하는 근육을 느꼈다. 한 명을 먼저 보내기는커녕, 제대로 길을 뚫지도 못했다. 레아는 비틀거리며 팔을 움직여 거미의 몸통에서 도끼를 뽑아내었다. 거미는 발치에서 몸을 바르르 떨더니 배를 까뒤집고 죽었다.

까득, 까드득.

거미들이 죽어가는 먹잇감의 근처로 서서히 몰려들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하비의 랜턴이 거미들을 비추며 모험가들의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키이익!

거미 한 마리가 성급하게 달려들다가, 레아의 도끼에 머리가 쪼개졌다. 몸을 빠르게 움직일수록 독이 혈관을 타고 퍼지는 속도도 빨라졌다. 레아는 마나를 운용해 최대한 그 작용을 늦추고는 있었지만, 영원히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큭-.”

그 거미를 시작으로, 한 마리씩 간을 보듯 모험가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족족 레아의 방패에 막히거나, 도끼에 다리가 한 짝씩 잘려 나갔지만, 거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끈질기게 달려들었다. 거미가 한 마리씩 줄어갈 때마다 레아의 움직임은 더 둔해진다.

풀썩.

레아의 다리가 완전히 굳어버렸다. 레아는 로빈과 하비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죽음은 언제나 생각해보았다. 모험가로 일하면 언제 죽을지 몰랐으니까. 항상 유서를 품고 다닌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한두 명씩 생겼던 동료들이 내일이면 갈가리 찢어진 주검이 되어 돌아오는 건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모험가들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말을 버릇처럼 입에 달고 살았다. 레아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자신 또한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 상황이 닥쳐오니 드는 건 두려움이었다. 각오는 준비를 의미하지 않았다. 레아는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았다. 모든 희망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꺼져가고 있음에도 자신은 여전히 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용사님….”

그는 아직 저 굴 아래에서 버티고 있을까. 희망을 놓지 않고 있을까, 자신처럼 절망했을까, 아니면 그 거미 마물에게 이미 사냥당해 처참한 모습으로 먹히고 있을까.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게 거미라니, 참 기구한 처지였다. 레아는 파들거리는 눈꺼풀을 아래로 서서히 내렸다.

콰아아앙-!!!

이변은, 그때 일어났다.

벽력이 치는 듯한 굉음이 개미굴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졌다. 거미들이 딸깍거리는 소리를 내며 동요하더니, 갑자기 한데 모여 굴 깊숙한 곳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레아는 졸음이 한순간에 달아난 사람처럼 눈을 깜박이며 거미들이 사라져버린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소음으로 가득 메워졌던 공간이 텅 비니, 남은 건 간간이 들려오는 로빈과 하비의 숨소리밖에 없었다. 레아는 숨을 죽이며 공간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마력의 흐름을 감지했다.

쿵.

쿵.

키에에엑-!!

소리가 들려왔다. 금속성, 살점이 찢어지는 소리, 거미들의 비명, 무언가 무거운 것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 부딪치는 소리는 꼭 거대한 북이 울리는 소리 같았다. 그 소리는 느릿하게 뛰고 있는 레아의 심박에 맞추듯 울리며 점점 크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쿵.

쿵.

그 소리가 바로 앞의 공간까지 다다랐을 때, 레아는 통로 너머에서 익숙한 기척을 느꼈다.

콰아아아앙-!!!

개미굴의 벽면이 터져 나갔다. 그리고 흩날리는 흙먼지 사이로 나타난 건, 다리를 부들거리는 새끼 거미 한 마리였다. 거미는 필사적으로 앞다리를 뻗다가, 뒤에서 걸어 올라오던 누군가의 발에 밟히며 바닥에 피와 뇌수를 쏟아냈다. 그 발은 거미의 사체를 옆으로 치워버리더니, 천천히 걸음을 딛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발걸음은 통로를 걸어 나오더니 바닥에 쓰러진 레아의 앞에 멈춰 섰다. 레아의 눈에 랜턴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검의 검신이 보이고 있었다.

“다들 살아있나요?”

이윽고 들려오는 용사의 목소리에, 레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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