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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14화 (15/158)

Chapter 14 - 14. 청문회 (1)

“아주 잘~ 하는 짓이다.”

폭풍 같았던 주말이 지난 후의 월요일 아침, 오랜만에 사무실에 얼굴을 비춘 게오르그가 나를 보며 혀를 쯧쯧 찼다. 나는 대꾸해줄 힘도 없어 눈썹을 찡그리며 손을 내저었다. 개미굴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 온몸을 이곳저곳 쑤시고 있었다. 게오르그는 내 늘어진 모습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한동안 좀 얌전히 지내나 했는데, 이번에는 멋대로 혼자 마물 사냥에 나갔다가 팔까지 부러뜨리고 오다니. 당장 오늘 원정을 나서야 했다면 어떡하려 그랬나?”

나를 힐난하는 게오르그에게, 한숨을 푹 내쉬며 힘없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오늘 재앙을 물리치러 가는 게 아니잖아. 겨우 팔 하나 부러진 일 가지고 호들갑 떨 필요 없어. 우리가 언제는 몸 성하게, 안 다치면서 싸웠냐?”

물론 아라그리드와의 일전에서 입은 부상은 부러진 팔 하나뿐만은 아니었다. 갑작스레 자연치유 능력이라도 생긴 것인지, 하룻밤 지나고 나니 꽤 많은 상처가 나아 있었다. 부러졌던 다리와 갈비뼈, 깊게 베이고 찔린 상처 등. 남은 상처는 성검을 휘두를 때 그 힘을 고스란히 견뎌주었던 내 오른팔뿐이었다. 성검 개방에 부가적인 효과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때는 목이 잘리는 게 아닌 이상 얼마든지 다쳐도 괜찮았다. 이 파티에 아직 아이시스가 있을 때였으니까.”

야이 씨,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

나는 뻘쭘하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이 소설에 빙의해서 눈을 떴을 때도 이 책상에 앉아있었지. 게오르그는 내 옆에 서 있었고, 내 바로 앞에는 아이시스가 서 있었다. 무엇에 그리 화가 나 있었는지, 내게 파티에서 나가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었고. 그 흘러내리는 것 같은 금발과 하늘빛으로 빛나던 벽안. 잠깐 보았을 뿐이지만, 내 머릿속에서 아이시스의 이미지는 꽤나 선명한 형태로 떠올랐다.

하긴, 아이시스의 능력이라면 팔이 부러지든 다리가 부러지든 내장이 쏟아져 내리든 손짓 몇 번이면 치료해줄 수 있었을 테니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만 말이다. 나는 붕대를 칭칭 감아놓은 오른팔을 쓰다듬으며 콧바람을 흘렸다.

“후회하나? 아르옌을 내보내고, 아이시스가 나가게 내버려 둔걸.”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던 게오르그가 물었다. 내가 한 일은 아니지만, 후회한다는 말을 내 입에서 내뱉기 싫었다. 괜히 원작의 일로이가 후회하던 광경이 떠올랐다.

“후회해도 소용없잖아. 이미 일어난 일인데. 해야 하는 일 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그 팔 부러뜨린 게 할 수 있던 일이라는 소리냐?”

이놈이 비꼴 줄도 알고. 나는 쓴웃음을 내뱉었다.

“후회 안 해. 아이시스와 아르옌이 있던 그때의 우리만이 할 수 있던 게 있었다면, 지금의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있겠지.”

게오르그가 실소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의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거라. 과연 뭐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오고 있잖아. 그때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만 있는 사람이.”

나는 문을 향해 턱짓했다. 기척 하나가 사무실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게오르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처음 이곳에 빙의되었을 때보다는 적의가 그래도 제법 누그러든 눈빛이었다.

“…예전에는 도대체 왜 그랬던 거냐.”

게오르그의 중얼거림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나는 대답하지 않으며 책상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출근했습니다.”

성격처럼 조심스럽게 열리는 문 사이로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슬쩍 나타나더니, 작고 파리한 손이 문을 다 열어젖히고는 다프네가 들어왔다.

“어서 와. 주말 동안은 잘 쉬었고?”

다프네는 작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게오로그에게로 눈을 돌리고는 놀랐다는 듯 눈을 깜박거렸다.

“네. 오늘은 게오르그씨도 출근했네요?”

“출근이 아니라, 잠깐 전해줄 게 있어서 들른 거다. 마침 너도 왔으니 지금 말하면 되겠군.”

게오르그는 기사단 제복의 안감에 손을 집어넣었다.

“뭐야, 따로 용건이 있어서 온 거였어?”

“그게 아니면 내가 뭣 하러 제복까지 차려입고 사무실에 왔겠나. 잠깐 전해줄 것만 전해주고, 나는 곧장 기사단으로 돌아갈 거야. 다프네도 잘 들어라. 너와도 관련이 없는 일은 아니니.”

게오르그가 제복의 안주머니에서 끄집어낸 건 굉장히 비싸 보이는, 빳빳한 종이봉투였다. 그 입구를 밀봉한 낙인을 확인한 나는 곧장 게오르그가 무엇을 가져왔는지 알아차렸다.

“왕궁에서 청문회를 한다더군.”

안드레 주교가 말해주었던 대로였다. 나는 봉투를 받아 들고는 그 봉인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마주 보며 포효하는 사자 두 마리. 왕궁의 낙인임이 틀림없었다. 뭐, 아마 나를 불러낸 건 이 나라의 왕이 아니라 그 아랫것들이겠지만.

“참 할 짓도 없다.”

“네가 정치의 희생양이 될 만한 짓을 많이 하긴 했다. 아무리 용사라고 해도 이번 청문회는 피해 가기 어려울 거다. 아이시스와 성국, 새로운 파티원의 영입, 독선적인 행보. 아마 잔뜩 벼르고 있을 분들이 많이들 계실 테니까.”

나는 편지칼로 봉투를 뜯어내고는 내용을 대충 읽어보았다. 날짜는 이번 주 금요일. 출석하는 사람은 나 혼자. 나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고, 질문을 던진 사람끼리 싸울 예정이다. 입 안이 텁텁했다. 나는 종이를 접어 책상 구석에 던져두었다.

“날 더러 이걸 직접 네게 전달하라더군. 알 테지만, 내가 옆에서 너를 도와주지는 못할 거다.”

“괜찮아. 차라리 홀로 나가는 게 속이 편하지.”

내가 대답과 함께 손을 내젓자, 사무실에서 나가려는 듯 걸음을 옮기던 게오르그가 책상 앞에서 멈춰 섰다. 머뭇거리면서 눈살을 찌푸리는 꼴이 꼭 아들에게 어색하게 말을 걸려는 아버지 같았다. 게오르그는 제 각진 턱을 문지르다가,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말 한 번 하는데 준비동작이 참 길었다,

“그… 모험가 길드에서 이야기는 들었다. 자세한 말은 듣지 못했다만, 이번에 개미굴에서 세 명의 모험가를 구출한 뒤 무사히 돌려보냈다고 하더군.”

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 시끌벅적한 세 사람이 다른 모험가들에게 내 이야기를 어떻게 했을지, 그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꼭 믿을 수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아니. 수고했다. 다만 몸을 성히 유지해야 한다는 말은 철회하지 않겠다. 적어도 그런 건 다음번 원정을 위해 아껴둬.”

걱정하는 건지, 아니면 대견하다고 여기는 건지. 솔직히 둘 다 아닐 것 같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말하는 것도 꼭 칭찬하는 아버지의 말처럼 퉁명스러웠다. 게오르그는 말을 내뱉고는 닭살이 돋는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나는 괜스레 다시 웃음을 지으며 다프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다프네는 어딘가 침울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문회…인가요. 왜 일로이를 홀로 불러내서.”

“나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벌 받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우리 파티에 정치적으로 간섭하려는 사람들을 걸러낼 기회가 될지도 몰라.”

실제로 그럴 생각이기도 했고. 괜히 깊게 얽혔다가는 골치 아파진다.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그 침울한 기색을 거두지는 않았다. 나는 다프네의 시선이 내 오른팔에 닿아있는 걸 보고는 부러진 팔을 들어올려 보여주었다.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일주일, 길어봤자 열흘만 있으면 될걸? 네 훈련은 미안하지만, 그때까지만 조금 미뤄야겠어.”

다프네에게는 미안하지만, 오른팔을 부러트린 채 마물과 싸우는 건 무리였다. 자연치유가 말도 안 되게 빨라져 부러진 팔 정도야 일주일이면 붙는 게 다행일까. 다프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내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다프네는 조심스럽게 그 손을 붕대 위로 올렸다. 붕대 너머로 그 손길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다프네는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그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다프네가 내 오른팔을 만지작거리게 내버려 두었다. 그 모습에 강아지가 주인 상처를 핥아주려는 장면이 겹쳐서, 제법 귀여웠다.

“오늘은 그냥 쉬어. 어차피 청문회가 끝날 때까지 나는 청문회 준비로 바빴을 테니. 다치려면 지금 다쳐두는 게 좋지.”

나는 농담하듯 말했지만, 다프네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저대로 돌려보내면 마음이 영 편치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던 펜을 집어 들어 다프네에게 건네었다.

“낙서할래?”

그 말에, 다프네가 드디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프네는 고개를 저으며 펜을 밀어내더니 그녀의 검지 끝에 푸른 마나의 빛을 맺었다. 그리고는 장난스럽게 내 팔 위로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나는 붕대에 글자가 각인되는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이윽고 낙서를 완성한 다프네가 손가락을 떼었다. ‘빨리 나으세요.’라는 말이 귀여운 필체로 붕대 위에서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다프네는 문신한 피부를 문지르듯 말이 새겨진 붕대를 슥슥 문지르며, 그림을 완성한 아이처럼 미소를 지었다.

“이러면 절대로 안 지워져요.”

“…고마워.”

이렇게까지 해줄 줄은 몰랐는데. 나는 보랏빛 눈을 깜박이는 다프네에게 마주 웃어주었다.

“퇴근해도 좋아. 어차피 오늘 할 일도 딱히 없고. 청문회까지도 아마 없을 테니까, 다음 주까지는 아예 안 나와도 돼.”

“아뇨, 청소라도 하고 있을게요. 일로이는 매일 여기 나오잖아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다프네답지 않은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리고는 다프네는 청소 용구라도 가지고 오겠다며 몸을 일으키더니 재빠르게 사무실을 나섰다. 나는 뭐라 말리거나, 하라고 하지도 못한 채, 문을 열고 나서는 다프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버렸네.”

내 중얼거림에, 갑자기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재미있는 친구를 두었구나. 이건 또 지켜보는 재미가 있겠어.]”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자, 웃음소리와 함께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성의 깨끗하고 흠결 없는 목소리였다. 들려온다기보다는,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웅웅 울린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리라.

“[뭘 그렇게 놀라고 있느냐. 우리는 초면도 아니지 않나. 대화를 나누어본 것도 처음이 아니고.]”

서서히 기억이 머릿속에서 살아났다. 나는 뻣뻣하게 굳은 표정으로 책상에 기대 세워놓았던 성검을 들어 올렸다. 아니, 잠깐만. 이렇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원작에서 성검이 말을 한다는 소리 따위, 들어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었다.

"설마, 성검…?"

“[그래. 너희들이 성검이라 부르는 존재다. 눈치가 아예 없지는 않아 좋군. ]”

고위 귀족이 쓸 법한 고풍스럽고 고아한 말투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니, 성검이 말을 걸었다고 해야 하겠다. 나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검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잘도 말하던데, 갑자기 벙어리라도 되어버린 게냐?]”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날 쓰는 사람이 되었다고 내가 다 말을 걸어주는 줄 아느냐? 영광인 줄 알아라, 용사.]”

“아니, 도대체 그럼 여태 가만히 있었으면서 왜 갑자기 이제야….”

벌컥.

내가 성검을 붙들고 마구 따지는 말을 쏟아내려 할 때, 먼지떨이와 빗자루, 쓰레받기를 든 다프네가 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왔다.

“일로이, 방금 아래층에 손님이 한 분….”

그리고, 성검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는 말을 걸고 있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얼어붙은 것 같은 정적. 나는 말없이 성검을 책상 옆으로 다시 내려놓았고, 다프네는 먼지떨이를 들고 방구석의 먼지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원망스러운 눈길로 성검을 바라보았다.

“[꼭 엄한 짓 하다가 걸린 사람 같네.]”

입 다물어라,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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