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 - 15. 청문회 (2)
달칵, 달칵. 탁. 탁.
꼼꼼하게 먼지를 털어내는 소리가 들려온다. 열린 창문 틈새로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와중에 나는 그 백색 소음을 즐기지도 못한 채 책상 위에 널브러진 문서 따위를 읽고 확인해보는 척을 하고 있었다.
“일로이, 아래층에 손님이 한 명 찾아왔어요.”
다프네가 손을 휘저어 얼굴로 날아드는 먼지를 떨쳐내고는 말했다. 머리에 두건까지 두른 게 아무래도 정말 작정하고 이 방을 청소하려는 듯했다. 그나저나, 방금 일은 못 본 거로 해주려는 건가. 고마웠지만 그게 되려 더 민망했다. 차라리 사실대로 ‘갑자기 성검이 나한테 말을 걸어서 그랬어!’라고 말해볼까.
“[나와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꽤 귀찮아질 거다, 그다지 추천하지는 않아. 아마 나를 성검으로 신봉하고 있는 청교회의 광신도들이 내 말을 들려달라고, 너를 성자로 추대하겠다고 지랄 발광을 떨 것이다.]”
성검이라 불리는 신물치고는 말이 제법 걸었다. 그나저나 지난번에 만났던 모험가, 하비도 그렇고, 내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녀석을 요새 너무 자주 만나는 게 아닐까. 나는 성검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다른 종이를 집어 들었다.
“[네 마음을 읽는 건 어렵지 않다. 네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데, 그 틈을 비집고 슬쩍 침범해 네 마음을 읽는 건, 내게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아니, 성검은 진짜로 읽을 수 있는 거였네. 나는 황당함에 그만 소리 내어 대답할 뻔했다. 그러면 한시도 빠짐없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듣고 있을 수 있다는 소리인가.
“[너는 내가 무슨 변태인 줄 아나? 대충 필요한 말만 골라 들을 테니, 네 걱정이나 해라.]”
성검은 화를 내듯 말했다. 정말 안심해도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좀 쓸 만해지려면 몸도 마음도, 나중에 제대로 훈련을 시켜놔야겠구나.]”
“일로이?”
뭔가 달갑지 않은 성검의 말을 뚫고, 다프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정신을 성검에서 떼어놓고는 고개를 들어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바라보기만 할 뿐, 눈을 똑바로 마주치진 못했다.
“미안해. 손님이 왔다고?”
“네. 왕궁 쪽에서 온 사람 같은데, 정확한 신분은 모르겠어요.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아마 제법 고위 관직의 귀족이 찾아온 거 같아요.”
고위 귀족이라. 하필 내가 청문회에 참석하라는 공고를 받은 직후 방문한 걸 보면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사람이겠지. 솔직히 나를 도우려는 쪽이든, 아니든,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날 돕겠다면 돕는 대로 내게 원하는 게 있을 거고, 아니라면 아닌 대로 성가셨다.
“[관리라는 자들이 배짱도 두둑하구나. 네게 고개 빳빳이 들고 찾아올 줄도 알고.]”
나니까 이렇게 찾아오는 거지, 어찌할 수 없다는 걸 뻔히 아니까. 평범한 모험가야 수틀리면 엿 먹이고 도망가면 그만이지만, 나는 어찌 되었건 불편한 동행 관계를 계속해야 하거든. …그런데, 이 검, 내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으면서 원하는 대답은 다 얻어가네.
“[칭얼대지 않아도 곧 대답해주마. 지금은 그 손님이라는 놈을 맞이하는 게 우선 아니냐.]”
“예, 예. 알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대답을 해버렸다. 행여 누군가 들을까 주위를 스윽 둘러보고는 마저 층계를 내려갔다.
“[저기 보이는군. 저 머리 벗겨진 놈이 아니냐.]”
성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어보았다. 로비에 마련된 응접실의 소파에, 풍채 좋은 아저씨 하나가 앉아있었다. 다프네의 말대로 굉장히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화려함만을 중시했다기보다는 세련된 맞춤복인 듯했다. 머리는 거의 다 벗겨졌지만, 귀 뒤에서부터 이어지는 수염은 굉장히 덥수룩하게 하관을 덮고 있었다.
“오셨네요, 용사님.”
“…안녕하십니까.”
아저씨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반갑게 얼굴을 활짝 피며 다가와 내 손을 붙잡고 악수했다. 나도 어색하게 웃으며 맞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미안하지만, 이름은 모른다.
“처음 뵙겠습니다. 월레스 비그완이라고 합니다.”
쾌활하면서도 걸걸한 목소리였다. 손아귀에 힘이 제법 좋았지만, 결코 기사나 마법사는 아니었다. 월레스는 제 가슴팍에 달린 휘장을 자랑하듯 툭툭 쳤다.
“작위는 백작이고, 왕궁에서는 내무대신 보좌를 맡고 있습니다.”
내무대신 보좌면 꽤 높은 직급인가? 뭐, 솔직히 이 사람 직급이나 작위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 아니, 이름조차도 그리 관심이 없으니 얌전히 나를 혼자 내버려두고 사라졌으면 좋겠는데. 나는 가만히, 최대한 뚱한 표정을 지으며 월레스 백작을 바라보았다. 월레스 백작은 나와는 정반대로, 싱글싱글 웃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나저나, 부상을 당하셨군요.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은 의사라도 한 명 소개해드릴까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내 오른팔을 보려는 월레스 백작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게오르그 단장이 전해준 소환장은 받으셨겠지요.”
“예. 잘 받았습니다. 겨우 소환장 하나 쓰는데도 굉장히 정성을 들였더군요.”
내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인 건지, 아니면 비꼬려는 건지 월레스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렴, 왕궁에서 쓰는 물건인데, 이 왕국에서 가장 좋은 물건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고작 편지지 하나가 되더라도 말입니다.”
음. 확실히 나와 잘 맞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떫은 표정을 계속 유지했다.
“아무튼. 이번 청문회에서 용사님께 어떤 질문이 들어올지 짐작하고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의 왕궁 가신들이 달려들어 용사님을 물어뜯고 까 내리려 할 겁니다. 성녀와 용병을 어째서 추방했는지에서부터 시작해, 민감한 질문을 던지고, 책임을 묻고. 마치 죄인 대하듯 할 겁니다.”
월레스는 사뭇 근엄한 목소리를 내었다. 뭐, 월레스가 말해주는 건 이미 충분히 짐작하던 바였다. 청문회는 기회였다. 용사를 제 발판으로 삼아 왕궁 내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키우고 싶은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놈들은 이리와 같습니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자기 부모도 팔아먹을 놈들입니다. 그리고 용사님은 저들에게는 그럴 제물로밖에는 보이지 않겠지요. 실제로 용사님 또한 청문회가 끝나고 나면 상당한 곤경에 처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내 물음에, 월레스가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용사님께서 제 손을 잡으시겠다면야 이야기가 다르지요. 그렇게 하신다면 제가 그 이리떼들을 몰아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청문회에서 용사님을 적극적으로 변호해드리겠다는 말입니다. 저라면 웬만한 어중이떠중이들의 입 정도는 다물게 할 수 있으니까요.”
시작되었군. 얼마나 평소에 일로이가 우습게 보였으면 이렇게 회유라는 이름의 협박을 하려 들려는 걸까. 하긴, 원래 일로이는 안드레 주교의 제안을 받아들여 책임을 성녀에게 떠넘기며 청문회를 회피했을 테니,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겠지.
“저도 뭐, 이번 청문회에서는 만만치 않겠지만, 용사님을 위해 기꺼이 싸울 의향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용사님이 저와 좋은 관계를 이어 나가시겠다면 말이지요.”
나는 참지 못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내 개가 되어라, 쉽게 말하자면 그런 거겠지.
“거절하겠습니다. 어디 발목 묶이는 건 내 성격이랑은 전혀 안 맞아서.”
1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잘라냈다. 내 대답에 월레스의 표정이 썩어 문드러진 토마토처럼 뭉개졌다.
“다시 찬찬히 생각해보시지요. 용사님, 이번 청문회를 무사히 넘길 뿐만이 아니라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도 한 명 생기는 셈입니다. 용사님에게 손해 될 일은 전혀 없는데, 어째서 제 제안을 거절하려 하시는 겁니까?”
“같은 말을 두 번 하게 하시네요.”
이번에는 일부러 싸가지 없게 대답했다. 월레스의 얼굴은 썩어 문드러진 토마토를 한 번 밟은 것 같이 망가졌다. 나를 거의 손안에 넣은 듯 득의양양했던 모습이 망가지니, 미소가 절로 얼굴 위로 번졌다.
“후회하실 겁니다.”
“신기하네요. 누가 최근에 후회하지 않냐는 질문을 했는데. 저는 절대 안 한다고 대답했거든요.”
“청문회에서 저를 만나면 적으로 돌변해있을 텐데요.”
거참 질척거리네, 이 사람.
“뭐, 마음대로 하세요. 계속 이상한 소리 하실 거면 이제 나가주시고요.”
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슬쩍 기세를 끌어올렸다.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자, 월레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뒷걸음질을 쳤다. 나는 건물로 들어오는 문가에 선 월레스 백작을 향해 빙그레 웃음을 지어주었다. 지금 누구 목에 목줄을 걸려 하는 거야.
“…용사. 무엇을 믿고 그리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청문회에서 알게 될 거다. 네가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말이다.”
이제는 존대도 하지 않고, 막 나가네. 나는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려주며 친절하게 문까지 열어주었다. 늦봄의 온풍이 건물 안으로 거세게 밀고 들어왔다.
“그럼, 청문회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월레스 비그완 백작은 문밖을 보고, 나를 보기를 반복하다가 도망치듯 건물을 나섰다. 나는 문을 단단히 걸어 닫고는 휑하니 빈 로비의 소파에 앉았다.
“[저놈의 제안을 어째서 거절했느냐?]”
“잠시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스스로 족쇄에 메일 필요는 없잖아. 게다가, 굳이 저놈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이번 청문회 정도야 알아서 잘 헤쳐 나갈 수 있어.”
“[보아하니, 왕궁에서 방귀깨나 뀌는 사람인 것 같던데, 적으로 돌려도 괜찮겠느냐?]”
성검의 질문은 나를 걱정하기보다는, 모든 걸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나를 시험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게 되려 달가웠다. 적어도 훌륭한 조력자가 하나 생긴 셈이니까.
“용사의 좋은 점이지. 적으로 돌린다 해도 나를 어찌하지는 못하잖아. 뭐, 반대로 말하자면, 나도 저 녀석을 어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그리 말하며 부러진 오른팔을 매만졌다.
“그리고…, 만약 백작의 손을 잡은 채로 일곱 재앙을 쓰러트렸다면, 월레스 백작은 높아진 용사의 명성을 믿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겠지.”
나는 계속 백작에게 목줄을 잡힌 채 끌려다니게 되었을 테고 말이야.
“[영 생각이 없는 건 아니로구나. 네게 말을 걸어준 보람이 있긴 하겠어.]”
성검은 만족스러운 듯 말하더니, 흐음, 하고 콧소리를 내었다.
“그래, 그 대답을 들려준다며. 어째서 여태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그 거미에게 죽을 뻔한 상황이 되어서야 말을 걸어온 거야?”
“[너를 내 사용자로 선택하는 것과 내 힘을 빌려주는 건 전혀 별개의 이야기다. 합당한 시련이 주어지고, 그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면서 힘을 빌려줘도 될지 결정하는 거지.]”
결국은 죽기 적전까지 어떻게든 갔어야 했다는 소리로군.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성검을 바라보았다. 성검은 낮게 쿡쿡 웃으며 나를 달래듯 말했다.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말거라. 그 말은, 시련을 극복할수록 합당한 강함을 얻게 될 거라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청문회도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시련이라.
나는 정말 팔자에도 없던 용사 노릇을 시작했다는 실감이 들어 한숨을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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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나는 대기실에서 내 이름이 불리기만을 멍하니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궁정귀족부터 반쯤 은퇴했다는 틀니들까지, 왕국의 중진들이 모두 모였다. 이번 청문회에 그만큼 이목이 쏠리고 있다는 뜻이겠지. 나는 굳게 닫힌 대기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문 너머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기척과 소리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긴장하고 있구나.]”
“이런 상황에서 긴장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앞으로는 더 익숙해져야 할 거다.]”
그래야겠지.
나는 옷깃을 다잡았다. 용사용 제복이 따로 있는 줄은 몰랐는데, 입으니 굉장히 부끄러웠다. 받쳐 입는 셔츠가 검은색인 걸 빼면 완전히 새하얀 백정장이나 다름없었다. 공적인 행사에 나설 때는 이 복장을 갖춰야 한다나, 뭐라나.
“[잘 어울리지는 않는군.]”
뼈 때리는 말을 해줘서 고맙다.
쓴웃음을 짓던 찰나, 문이 열리며 하위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용사님, 입장하실 시간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틈 새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성검은 어디 한 번 지켜보겠다는 목소리로 말을 남겼다.
“[한번 잘해보거라.]”
그래, 이리 새끼들의 아가리를 다물게 해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