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 - 17. 청문회 (4)
성검은 여느 전설에 나오는 검처럼 바위에 꽂혀있었다. 왕도를 둘러싼 산에 있는 한 고대 유적에, 조용히, 잠을 자듯 바위에 꽂혀 보관되고 있었다. 평범한 모험가 신분으로 밖에 나섰던 일로이는 우연히 유적에 발을 들이게 되었고, 그곳에서 성검을 뽑게 되었다.
그간 다른 모험가들이 성검을 뽑아보려는 시도를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오히려 유적 근처로 갈 일이 있는 모험가들의 연례행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성검은 움찔하지도 않았다. 아예 성검이 꽂힌 바위를 쪼개버리려는 이들도 있었으나,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다.
“에라이, 가자, 가.”
“젠장, 괜히 몸에 힘만 뺐네. 마나로 강화한 힘으로도 뽑을 수 없는 건 대체 뭐야?”
“괜히 저 검이 청교회의 보구(寶具), 신물, 성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겠어? 자격이 있어야지. 그런데 너는 일단 탈락이다.”
성검을 뽑으려는 시도는 차츰 줄어들었다. 모험가들이 아닌, 왕도의 기사들은 성검이 뽑히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에 굳이 시도하려 들지 않았다.
그렇게 전설로만 남을 것만 같던 성검은, 그날 처음으로 유적지 근처에 가게 된 한 청년에 의해 뽑히게 된다. 일로이는 그렇게 용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거의 유일하게 아는 용사 일로이의 과거였다.
“용사, 성검을 가지고 앞으로 나와 보아라.”
초반의 격식은 장물아비에게 갖다 팔아버린 대신이 명령조로 내게 말했다. 나는 상념으로 빠졌던 정신을 다시 의회로 되돌려놓으며 대신을 바라보았다.
“정녕 지금 제게 용사의 자격을 묻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질문은 우리가 하지, 그대가 하는 게 아니다. 용사, 성검을 가지고 앞으로 나와라.”
이 대신, 사람 열받게 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여기서 냉정을 잃고 소리라도 쳤다가는 그대로 내가 붙들어놓은 분위기가 반전되겠지. 일로이를 만날 수만 있다면, 평소 행실을 좀 똑바로 하라고 말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평소에 얼마나 건방지게 굴었으면, 저렇게 광기에 찬 목소리와 눈으로 내게 용사의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제가 만약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된다면, 그때는 어떡하실 생각입니까?”
대신의 얼굴 위로 굉장히 추한 미소가 떠올랐다.
“현재 용사보다도 뛰어난 자질을 갖춘 이가 있으면, 응당 그 이를 용사로 추대하는 게 옳지 않겠나? 그대는 그렇다면 더 용사도, 원정대의 대장도 아니게 되겠지.”
저 얼굴을 계속 보고 있으면 속이 안 좋아질 것 같았다.
“그대가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그 책임을 지고 원정대장의 직위를 내려놓겠다면, 그 자질을 묻는 건 없었던 일로 하지. 구태여 복잡하게 일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나.”
정말 원하는 건 이것이었나. 내가 대신의 제안에 겁을 덜컥 먹고 굴복을 선언하는 것.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자격이야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시험하실 겁니까? 대동하신 기사들에게 성검을 쥐여 주고 검식이라도 펼쳐 보이라고 하실 셈입니까?”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으십쇼, 좀. 그리 에둘러 말하자 대신은 얼굴을 더욱 일그러뜨리며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전설에 따르면, 성검은 선택받은 이들에게 빛과 함께 신성한 힘을 부여한다고 했다.”
간신히 화를 가라앉힌 대신이 말했다. 노련한 정치인답게 제 감정을 다루는 데 익숙해 보였다. 물론 그 목소리는 이를 꽉 깨물고 있었던 듯 반쯤 잠겨있었지만.
“달리 제대로 된 주인을 찾는다면 성검도 어떤 변화를 보이겠지. 그대가 들고 있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말이야.”
대신은 그리 말하며 내 허리춤의 성검을 향해 삿대질했다.
“[대충 주워들은 낭설을 떠들어대는 데다가, 자꾸 날 다루었던 인간들을 주인이라고 부르는 게, 상당히 아니꼽구나.]”
내 머릿속에서 성검이 투덜거렸다. 조금만 기다려. 어차피 저 얼굴들은 얼마 있지 않아 오래된 과일처럼 썩어들어 갈 테니까.
“자, 그대에게 달렸다, 용사 이제 어떻게 하겠는….”
“이렇게 하죠.”
나는 단상에서 걸어 나왔다. 내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대신들의 어깨들이 움찔거렸다. 저렇게들 담이 작아서 어떻게 정치 생활을 한담. 나는 작게 코웃음을 치고는 왼손으로 성검을 뽑아 들었다. 의회 천장의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검신이 번들거렸다.
“아니, 용사.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대신은 사색이 되어 손을 닭 날개처럼 파닥거렸다. 나는 그 반응들을 깔끔하게 무시하고는 의회 정중앙의 바닥에 성검을 가볍게 내리꽂았다. 너무 강하게 했다가는 바닥에 커다란 금이 가버릴 것 같았으니.
콱.
대신들은 내 행동을 의문 반, 두려움 반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검자루를 부드럽게 감싸 쥐며 마지막으로 성검에게 당부를 남겼다.
‘잘 부탁할게.’
“[염려 말거라.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아니까. 그나저나, 이렇게 되니 처음 네가 나를 뽑았을 때가 떠오르는군.]”
‘무슨 새삼스럽게.’
나는 쓴웃음과 함께 성검에서 손을 떼고는 물러났다. 성검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성검을 처음 뽑았던 기억이 없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는, 생각해낸 방안을 제시했다.
“제가 어떻게 성검에게 선택받았는지는 다들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왕도 외곽의 한 유적에 있던 바위에서 뽑아 들었지요.”
의회는 침묵하며 내 말을 기다렸다. 그들의 시선이 전부 성검에 꽂혔을 때, 나는 성검을 척 가리키며 말했다.
“성검을 다루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도 없습니다. 바닥에 꽂힌 저 성검을 뽑아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용사의 위치도, 원정대장의 직함도 모두 내려놓고 그 사람에게 모든 직위와 책무를 이양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신들이 크게 술렁였다. 그 와중에 나와 계속 다투던 대신의 눈이 흔들렸다. 내가 너무 자신만만하게 나오니, 갑자기 좋지 않은 예감이 든 듯했다. 대신은 자기가 먼저 말했으니 제안을 무를 수도 없겠지. 게오르그는 혼란스럽다는 듯 나와 성검을 보고 있었고, 안드레 주교는 턱을 괸 채로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주 자신감이 넘치는군, 용사.”
“그러는 대신께서는 자신감이 부족해 보이시는군요. 지금이라도 제게 자격을 물었던 발언을 사과하고 물러나시겠다면야 저도 성검을 회수해가겠습니다만.”
내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겠지. 뭐, 하긴. 나도 성검이 내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자신만만하게 나올 수 없었을 거다. 운이 지지리도 없었다고 생각하라고, 대신.
“…좋다. 정녕 그대가 그렇게 나오겠다면야.”
자기가 칼을 뽑을 것도 아닌데 폼은 오질나게 잡네.
대신이 기사들에게 눈짓하자, 뒷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기사 출신답게, 그들은 어떤 동요의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게오르그만 빼고. 게오르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라고 묻는 듯 나를 보았고, 나는 성검을 바라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먼저 할래?”
나는 게오르그에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게오르그는 내 표정을 읽으려는 듯 한참을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먼저 시도해보겠습니다.”
“그래, 잿빛곰 기사단의 게오르그 단장. 원정대의 일원이기도 한 그대라면 충분히 자격이 있지. 해보아라.”
성검 주인은 난데, 허락은 왜 대신이 내리는지 모르겠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을 노려보는 동안, 게오르그는 성검 근처로 다가가 검자루를 잡았다. 의회의 시선이 게오르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게오르그는 미안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는, 자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
정적.
“흡!”
다시 정적.
“게오르그 단장? 시도해도 좋다고 말했을 터이다.”
대신의 이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게오르그는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는 게 진심으로 모든 힘을 다해서 성검을 뽑으려 한 것 같았다. 그래도 동료라는 점을 감안해서 적당히 봐줄 줄 알았는데, 융통성 없고 괘씸한 놈.
“…시도하고 있습니다.”
“뭐?”
“제 전력을 다해서 성검을 뽑아보려 하고 있습니다.”
게오르그는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성검에서 손을 떼고 떨어졌다. 대신들이 작게 웅성거렸다.
“장난하지 말라, 게오르그 단장.”
“제 명예를 걸고 맹세합니다. 저는 지금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게오르그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하자, 대신의 얼굴이 초조함으로 물들었다.
“다음으로 시도해볼 기사는 없는가.”
대신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기사단장들이 자기들끼리 눈치를 교환했다. 그중에서 청문회 내내 나를 매서운 눈초리로 바라보던 기사 하나가 손을 들고 나섰다.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좋다, 흰매 기사단의 알베르토 단장. 시도해보도록.”
이제 나는 완전 들러리 취급이군. 손에 먹을 거라도 좀 쥐여줬으면 좋겠는데.
알베르토라고 불린 기사는 앞으로 호기롭게 나서더니 망설임 없이 검을 쥐었다. 검을 쥐기 전에 나를 한 번 노려본 것이 꼭 ‘그래도 너보다는 내가 낫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알베르토는 여유로운 미소로 검자루를 잡고, 들어 올리려 했다.
물론, 성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뭐지. 이럴 리가 없는데.”
마음속으로 해야 할 소리가 알베르토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리액션 한 번 끝내주네. 알베르토는 자세를 재차 수정하고는 마치 무를 뽑아 올리는 것처럼 성검을 두 손으로 쥐었다.
“흐압!”
그리고는 꼴사나운 기합과 함께 팔뚝과 광배근에 힘을 주었다. 물론, 성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알베르토의 얼굴만 검붉은색으로 물들 뿐이었다. 알베르토의 씨름은 그 이후로 몇 분이나 이어지다가, 보다 못한 대신이 그만하라고 세 번이나 외치고서야 끝났다.
“…다음.”
그러나 다음 기사도, 그다음 기사도. 성검을 뽑아 올리기는커녕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하지도 못했다. 기사들이 한 명씩 실패할수록 대신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져갔고, 다음 기사를 부르는 목소리에 깃들었던 힘이 사그라들어갔다. 자리에 참석한 다른 궁정귀족들은 내 눈치와 대신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끄으으읍!”
마지막. 게오르그보다도 덩치가 큰 기사가 나가떨어졌다. 기사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거칠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되겠습니다. 마나로 신체를 강화하고 아무리 용을 써봐도,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이…, 이 자식들이.”
대신은 이가 으스러지라 꾹 깨물고 있었다. 그리고는 불안감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청문회 위원장을 포함한 다른 궁정귀족들은 누구 하나 그를 제지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를 지켜보았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대신은 검자루를 거머쥐고는, 힘을 주어 뽑아보려 해보았다. 아저씨가 저러면 허리 나갈 텐데. 대신이 힘을 주었지만, 성검은 요지부동이다. 대신은 이제는 추한 모습을 보이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 검자루를 붙들고는 악을 쓰기 시작했다.
“크으으으읍!! 으아아악!!”
나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악을 쓰는 대신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헛짓거리도 계속 보고 있으려니 우습기는커녕 되려 안쓰러워졌다. 허리를 구부리고는 아직 용을 쓰는 대신을 내려다보자, 대신이 나를 올려다보며 턱을 덜덜 떨었다.
“크… 네가, 성검에 무슨 짓을….”
“촌극은 그만하도록 합시다, 이제.”
나는 대신을 슬쩍 뒤로 밀어내며 성검을 붙잡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성검의 마나가 흘러들어왔고, 기다렸다는 듯 성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려왔다.
“[저들이 용쓰는 꼴이 우습기 그지없더구나. 꽤 재미있었다.]”
그럼 이제 확인 사살을 할 차례야.
“[알고 있다, 재미있는 구경을 하게 해주었으니, 도와주도록 하마. 잠깐 견뎌보아라.]”
나는 별 힘을 들이지 않고 서서히 성검을 뽑아 올렸다. 성검의 검신이 뿌리에서부터 서서히 상서롭게 빛나기 시작하더니,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자, 의회 전체를 감싸 안는 찬란한 빛줄기가 되어 신의 기적처럼 좌중이 고개를 조아리게 했다.
“…미친.”
누군가의 경악 어린 중얼거림이 들려왔고,
“신이시여….”
황홀한 듯 말끝을 늘리는 안드레 주교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나는 성검을 들어 의회에 앉아있는 대신들을 가리키며 선언했다.
“제가, 다른 누구도 아닌 저만이 성검에게 선택받은 용사입니다.”
성검의 빛이 사그라들었다. 1단계 개방의 후폭풍을 이를 깨물며 견뎌내고는, 나는 다시 성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의회는 완전한 침묵에 잠겨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시겠습니까?”
바닥에 주저앉은 대신이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패배야. 인정하지는 못하겠지만.
“아니…아니다. 그럴 리가.”
“그만. 청문회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대신의 부정과 무겁게 내려앉은 정적을 깨트리고는, 여성의 목소리가 의회를 가로질러 들려왔다. 그리 큰 목소리로 말하지 않았는데도, 그 울림은 이상하리만치 똑똑하게 귀에 들어와 각인되었다. 의회의 대신들은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으로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고, 나 또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고는 놀라움에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그 사람이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성검을 거머쥐었고, 성검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누구를 말하는 게냐?]”
나를 원정대장의 자리에 앉히고, ‘원정대의 인사권한을 부여하신 분’. 오늘 이 자리에 나설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권한을 부여하신 분?]”
성검의 목소리와 함께, 의회로 들어오는 문이 열렸다. 그리고, 복도를 가로지르며 걸어오는 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또각.
또각.
그 기척이 선명해지고, 성검으로부터 시작되어 쌓이고 쌓인 모든 침묵과 혼란이 저 한 점으로 모인 순간, 의회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카이로스 왕국의 적법한 통치자이자, 엄격한 심판자, 위대한 전사이며 국민의 자애로운 보호자이신 아그네스 블랑쉬 뤼미에르 여왕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