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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18화 (19/158)

Chapter 18 - 18. 청문회 (5)

“카이로스 왕국의 적법한 통치자이자, 엄격한 심판자, 위대한 전사이며 국민의 자애로운 보호자이신 아그네스 블랑쉬 뤼미에르 여왕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 순간, 의회에 앉아있던 모든 대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대신 또한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또각, 또각.

울리는 구두 굽의 소리는 왕의 그것답게 오만하면서도 위엄있었고, 뽐내지 않아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열린 문 사이로 여왕이 입장한다. 나는 감히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재빠르게 고개를 숙였고, 다른 대신들 또한 여왕이 지나가자 고개를 숙였다.

여왕의 발소리는 높거나 낮게, 크거나 작게 변하지 않았다. 그녀가 스스로 몸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으며, 걸음에 싣는 무게가 일정하다는 뜻이었다. 호흡 또한, 교본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안정감 있었고, 불필요하게 낭비하는 동작도 없었다.

“[강하구나.]”

성검은 그리 평했다. 짧게 여왕의 많은 것을 설명해주는 말이었다.

아그네스 블랑쉬 뤼미에르- 아그네스는 카이로스 왕국 내에서도 손에 꼽는 소드마스터다. 아니, 그저 그렇게 설명하기만 하면 그녀가 지닌 검의 재능을 다 설명할 수 없을 거다. 아마 그 무력으로 따지면 왕국이 아니라, 원작 전체를 따져도 손에 꼽을 거다.

저 사람이 직접 재앙을 잡으러 다닐 수 없는 게 아까울 뿐이지. 왕국의 통치자만 아니었다면, 용사 파티에 들어가서 재앙을 쓰러트리는 데 큰 활약을 했을 거다. 원작에서 그녀의 활약은 ‘여섯 번째 재앙’이 왕국을 덮쳤을 때 잠시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또각. 또각.

여왕은 서서히 발걸음을 늦추더니, 나와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멈추었다. 공기 중에 남아 맴돌던 성검과 내가 남긴 잔재는 여왕의 존재에 의해 흡수되며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여왕이 먼저 입을 열기 전에, 재빠르게 예를 갖추었다.

“여왕 폐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들라.”

여왕은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장식이 간소한, 새햐안 드레스 차림을 갖춘 여왕의 모습이 발치에서부터 시작해 발목을 거쳐 다리를 지나, 서서히 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본 여왕은, 유리창에 낀 성에처럼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갸름한 선에 희고 고운 피부, 그에 대비되는 새카만 머리카락. 굳지는 않았지만 절대 올라가지도 않을 것만 같은 입매. 그리고, 살짝 아래로 내려가는 선을 그리는 눈꼬리. 그 속에 자리한 눈동자는 피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용사 일로이. ‘세 번째 재앙’을 쓰러트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쓸데없는 짓을 한 건 아닌가 싶구나.”

여왕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지만 아주 적대적이지만도 않았다. 그녀가 본디 일로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해의를 갖고 있던 건 아닌 것 같았다.

“아닙니다, 폐하. 저는 용사이지만 이 나라의 국민이기도 한데, 어찌 이를 쓸데없는 짓이라 여기겠습니까.”

나는 그리 말하며 슬쩍 성검을 잡고 뻘짓을 하던 대신을 흘겨보았다. 그도 당연히 찔리는 구석이 있었는지, 내 시선을 피해 아래로 고개를 숙이며 진땀을 뻘뻘 흘렸다.

“그래. 너그러이 받아주니 다행이구나.”

여왕은 그리 말하고는 내게서 등을 돌려 대신들을 바라보았다. 여왕의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위압감이 넘쳤다. 신하들을 이미 꽉 장악하고 있는 모양이로군.

“성국에서 예까지 온 안드레 주교에게는 미안하군. 흉한 모습을 보여준 것 같아.”

안드레 주교는 늘 띠고 있던 인자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폐하. 이 또한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주교의 대답이 일품이었다. 흉한 모습이라는 건 은근슬쩍 부정하지 않았군. 나는 낄낄거리며 웃고 싶은 마음을 미소를 짓는 것으로 대신했다.

“폐하, 처음부터 용사를 지켜봐 오신 폐하께서는 아시지 않습니까. 용사가 그간 얼마나 안하무인에 독선적으로 원정대를 이끌었는지….”

“그 말은 청문회 내내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한 것 같구나. 내무대신, 이곳은 그대의 놀이터가 아니라, 성국의 대표까지 참석한 청문회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더냐?”

저 사람이 내무대신이었군. 어쩐지 유달리 내게 공격적이더라. 나를 회유하려다 실패했으니,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만도 하지. 나는 어느 순간 완전히 조용해진 내무대신 보좌, 월레스 백작을 흘긋 보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만. 나도 그가 그간 독선적인 행동을 보였음을 모르는 바 아니나, 그 과(過)가 공을 덮어버릴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이미 그대의 제안이 보기 좋게 용사의 자격을 증명함으로 끝난 이상, 그대가 더 할 말은 없을 터인데.”

여왕의 말은 그 이상의 반론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압박을 담고 있었다. 내무대신은 얼굴을 완전히 구겨버리며 얼굴을 숙였다. 여왕은 내무대신에게서 시선을 떼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가리를 다물었던 이리떼는 이제 완전히 굴복한 개가 되었다. 여왕은 그들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 질문할 사람이 있나?”

그럴 용자가 있다면, 성검을 들게 해줘도 괜찮을 것 같다.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자, 여왕은 안드레 주교가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들어보았다.

“성국의 주교는? 이번 일을 어떻게 결론지을 생각이지?”

“성녀, 아이시스의 추방 건은 크게 문제 삼을 만한 건 없어 보입니다. 교황께도 그리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성국에서 용사께 어떤 지원을 더 해드려야 할지는 조금 의논해봐야 할 것 같군요.”

여왕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성국과의 관계마저 틀어지지 않는다면, 이 청문회가 더 이어질 의미가 없었다. 청문회 위원장은 눈치 빠르게 먼저 입을 열었다.

“이상, 용사 일로이의 청문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참석해주신 대신분들께는 모두 감사의 인사를 전해드리는 바이며….”

끝났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치 못한 도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계획한 대로 상황을 바꿀 수 있었다.

“[고비를 하나 넘겼구나. 수고했다.]”

성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겨우 청문회 하나 넘긴 거 가지고는 고비를 넘겼다고 할 수도 없었다. 앞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재앙 공략전은 이런 것과는 비교가 안 될 테니까.

“용사 일로이.”

서늘하고, 건조한 여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숙이며 재차 예를 갖추었다. 대신들은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숨을 죽이며 여왕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

“처음 한 번이면 족하니, 나를 볼 때마다 그리 예를 갖출 필요는 없다.”

여왕은 그리 말하며 발걸음을 돌려 의회의 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흘리듯 남기는 말이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따라오너라. 잠깐 대화를 나눠 보고 싶으니.”

주변의 시선은 이제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나는 안드레 주교에게 슬쩍 고개를 끄덕여주고, 아직 멍하게 서 있는 게오르그를 툭 쳐서 깨운 뒤, 여왕의 뒤를 쫓아 의회의 밖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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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에서의 소란이 무색하게, 왕궁의 후원은 고요했다. 여왕은 장미 덤불 옆에 서서 그 꽃잎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제 막 개화하기 시작한 장미에 여왕의 손끝이 가 닿자, 그 연약한 꽃잎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장미가 피기 시작하는군.”

감상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여왕의 목소리는 전혀 감상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저 장미가 피었다. 라는 사실만을 고하는 듯했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이 일대가 전부 장미로 뒤덮일 거다. 그러면 숨이 막힐 정도의 장미 향이 정원의 공기를 짓누르겠지.”

천천히 걷는 여왕은 제 눈과 꼭 같은 빛을 띤 장미를 놓아주었다.

“해마다 보아도 전혀 질리지 않는 장관이다.”

여왕이 그리 말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구두를 신은 여왕은 내 코에 머리끝이 닿을 정도로 키가 컸다. 여왕은 붉은 시선으로 나를 꿰뚫어버릴 듯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내 오른팔로 시선이 이동했다. 그 소매 속에는 여전히 붕대가 둘둘 감겨있었으나, 어느 정도는 움직일 수 있게 되었기에, 거추장스러운 부목은 풀어버렸다.

“팔을 다쳤더구나.”

나는 반사적으로 오른팔을 등 뒤로 숨겼다. 여왕의 시선은 내 오른팔을 따라 왼쪽으로 굴러가다가, 이내 다시 내 얼굴로 돌아왔다.

“‘세 번째 재앙’을 토벌할 때 입은 부상은 아니겠지.”

“예, 그때 입은 부상은 이미 다 치료되었습니다.”

“허면, 어찌하여 팔을 다쳤는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별로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닌데. 나는 눈살을 살짝 좁히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수련을 위해, 마물을 사냥하다가 입은 부상입니다. 대단찮은 이유라 부끄럽습니다.”

“사정을 전부 설명해라. 거짓을 고하지 말고. 아무리 대단찮다 하더라도 용사의 부상은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느냐.”

별로 자랑하고 싶은 일은 아닌데. 나는 성검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성검을 개방하러 갔다는 사실만을 빼놓고 모든 경위를 들려주었다. 수련을 위해 홀로 마물 사냥을 떠난 것, 우연히 세 모험가를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는 것, 아라그라드라는 거미 마물을 만나게 된 것, 모험가들을 내보내고 전투를 벌였다는 것.

경위를 전해들은 여왕은 고개를 주억이며 가늘게 숨을 내뱉었다.

“용사로서, 너는 무엇이 더 중요하다 생각하지? 토벌인가? 구원인가?”

망설일 건 없다. 무슨 대답을 들려줘야 할지는 정해져 있었다.

“저는 복수자가 아니라, 수호자입니다.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 되었는지요.”

“…그렇군.”

생각할 것이 생겼는지, 여왕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 사이로, 성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 사람들을 구했다는 사실을 밝히기 꺼린 거냐?]”

그리 숭고한 일도 아닌데, 뭐. 애초에 내가 그들과 동행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위기에 빠질 일도 없었겠지.

“[너는 참 이상한 곳에서 겸손하구나. 뭐, 그 점이 너답다만.]”

…나답다고? 나는 의문스럽게 마음속으로 되물었지만, 성검은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때, 성검과 교대해 들어오듯 여왕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가 어째서 네게 그 정도의 권한을 부여했는지 추측할 수 있겠느냐."

그건 솔직히 나도 궁금했던 바였다. 대외적인 위신과 체면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원작의 여왕은 일로이가 다섯 번째 재앙과 맞서다 목숨을 잃을 때까지 그를 지원해주는 모습이었으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잘 모르겠습니다."

"용사라는 말은 가혹하다."

여왕이 그리 단언했다.

"세상을 마치 홀로, 반드시 구원해야 하는 사람처럼 들리지 않느냐."

여왕의 건조한 목소리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렇다면, 그를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옆에서 방해가 되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여왕이 그리 말하고는 걸음을 이어갔다. 장미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정원 끝으로는 넓은 광장과 거대한 분수가 있었다.

“네 번째 재앙을 토벌하러 갈 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여왕은 나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의회에서 대신들이 너를 귀찮게 할 일은 없을 거다. 내가 보증하지. 너는 그저 네 번째 재앙을 공략하러 갈 준비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합니다.”

이건 정말 감사할 일이다. 다른 대신이 내게 정치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완벽하게 차단해줄뿐더러, 귀찮은 파벌 싸움에도 얽힐 일은 없을 거다.

“대신, 확실히 강해질 수 있도록 해라. 겨우 마물과 맞서 팔이 부러지는 용사가 어찌 재앙과 싸워 이길 수 있겠나.”

“…명심하겠습니다.”

뼈를 때리는 말이었다. 휘청이는 내 마음에 성검이 결정적으로 못질을 했다.

“[맞는 말이다. 조만간 내가 확실하게 수련시켜 줄 테니, 마음을 확실하게 다잡고 있어라.]”

미안. 방금 그 말 때문에 조금 의욕이 꺾인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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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도 이제 끝이군.”

청문회가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게오르그는 삼 일 전부터 다시 출근하기 시작했고, 다프네는 늘 하던 대로 나와 수련하러 나섰다. 그리고 나는 붕대도 완전히 풀고 다시 성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전 경험들이 아주 헛된 건 아니었는지, 이제는 1단계 개방도 큰 무리 없이 이뤄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제 우리 내기도 확인할 때가 되지 않았나?”

게오르그는 내게 넌지시 물었다. 나는 창가의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 다프네를 향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다프네를 말하는 거야?”

“그래. 이제는 합을 맞추며 네 번째 재앙 공략전에 대비할 때도 되었으니, 우리의 내기도 점검하는 게 맞겠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게오르그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뭐, 만약 네가 이긴다고 하면 저번에 말한 그대로 하게?”

게오르그는 난감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지난 몇 주 동안 계속 얼굴을 마주하다 보니, 게오르그 또한 다프네를 슬슬 동료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상부에 보고하거나,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래도 내기는 내기이니, 일로이, 네가 내가 원하는 것 하나 정도는 들어줘야 수지가 맞지 않겠나.”

나는 너털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다프네를 쫓아내지 않은 것만으로 이미 크나큰 수확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지. 그 지랄맞은 마법사보다는 다프네가 훨씬 낫다니까. 내 웃음에, 게오르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그걸 다프네가 바라보던 때, 계단을 마구 거센 발걸음으로 걸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용사아아-!!”

카랑카랑하게 귀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 게오르그는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다프네는 겁을 먹은 듯한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나는 썩은 미소를 짓고는 다가오는 사람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진짜로 내가 이 파티에서 쫓아내야 할 녀석이, 그 지랄맞은 마법사가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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