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 - 19. 한 걸음 (1)
마법사, 넬라 타르.
5서클의 끝자락, 6서클의 목전에 다다른 마법사이자, 마탑에서는 천재라 칭송받던 이. 파괴 계열 마법에 재능이 있으며, 전장에서 아르옌과 일로이가 큰 놈을 담당했다면, 넬라는 자잘한 마물들을 맡아 태워버리는 역할을 맡았다. 게오르그는 뭐, 인간 성벽이나 다름없었고, 아이시스는 그 뒤에서 엄호받으며 부상입은 멤버를 치료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딜, 탱, 힐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밸런스 좋은 파티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아르옌과 일로이는 대립했고, 아이시스가 아르옌의 편을 가끔 들고, 넬라는 용사의 직위에 빌붙어 아이시스와 아르옌을 못살게 굴었다. 게오르그는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리고, 원작에서 일로이와 아이시스가 파티를 탈퇴하고 오래지 않은 시점.
“왜 이리 잡는 속도가 느린 거야! 각오하고 아르옌을 자른 거 아니었어? 용사 아니냐고!”
“이대로 가다간 재앙의 발끝도 못 보고 죽겠어.”
“이럴 거면 왜 성녀를 붙잡지 않았지? 아르옌을 파티에서 내보낸 거야?”
“왜 너는 아르옌의 반만큼도 싸울 수 없냐고!”
넬라는 용사에게 붙어 아양 떨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불만만이 남은 파티원이 하나 되었다. 그렇게 번번이 일로이와 마찰을 일으키던 때였다. 다섯 번째 재앙의 공략전을 나서기 직전, 넬라 타르는 일로이에게 파티를 탈퇴하겠다며 일방적으로 고하고 파티를 나서고는, 네 번째 재앙을 물리쳤던 아르옌에게 빌붙으러 떠난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다섯 번째 재앙의 공략전에서 용사 파티는 전멸한다.
아르옌과 아이시스가 파티에 없다면, 굳이 데려갈 이유가 없는 멤버. 파티에 도움이 되는 것보다 해악을 끼치는 게 더욱 큰 사람. 갱생의 여지를 생각해낼 여유 따위는 내게 없었다. 내가 성장시키는 사람은 다프네 하나만으로도 벅찼다.
“다프네를 본다면, 아마 넬라가 불같이 화를 낼 거다. 그녀 성격이라면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을 거야.”
이틀 전, 아침 일찍 출근한 게오르그가 내게 그리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여주고는 평화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며칠간 비가 내리다, 서서히 개는 날이었다.
“어떡할 거냐.”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주는 게 맞겠지. 넬라가 그녀의 의사로 용사 파티에 계속 남겠다면, 다프네와 좋은 시너지를 일으키겠지만, 그렇지 않겠다고 나서면….”
알지? 라는 눈으로 나는 게오르그를 바라보았다. 게오르그는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옌, 아이시스 다음으로는 넬라인가.”
“꼭 넬라가 파티에 남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눈치인데.”
“너도 그녀가 남겠다고 말할 성격은 아니라는 걸 알지 않나. 그리고 일로이 너도 그런 사람을 구태여 잡으려 들지는 않을 테고.”
좀 아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새끼는 뭐가 이렇게 당당해. 게오르그는 그런 눈빛을 내게 쏘아 보냈지만,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지난 청문회 이후로, 게오르그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제 짜증은 사라지고 모종의 의구심만이 남아있었다.
“다프네가 정말 넬라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아무리 성격이 지랄맞다고는 해도, 젊은 나이에 한 탑주의 최소 자격인 6서클을 목전에 둔 마법사였다. 아르옌과 아이시스만큼은 아니겠지만, 넬라 또한 웬만해서는 그 대체자를 찾기 쉽지 않았을 거다. 물론 나만 빼고.
“어. 나는 믿어. 끝까지 책임질 각오로 영입했으니까.”
그리고, 다프네가 언젠가는 그 벽을 완전히 부수고 나와 환하게 빛을 발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나는 게오르그에게 단호하게 대답해줄 수 있었다. 게오르그는 미간을 좁히고는 팔짱을 끼었다. 의심이 생긴다면 으레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그래. 곧 확인할 수 있겠지.”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 지금.
“오늘이 넬라가 돌아오는 날이었나.”
게오르그가 침음성을 내뱉었다. 이 와중에도 마법사의 발소리는 끊기지 않고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턱을 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쿵쿵.
발소리는 마침내 문 앞까지 다다랐고, 넬라는 문을 부숴버릴 기세로 열어젖히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가엾은 다프네가 조금씩 뒷걸음질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콰당-!!
넬라 타르는 활짝 문을 연 상태로 가만히 사무실을 응시했다. 처음에는 증오 어린 눈빛으로 나를, 그리고 더욱 불타는 눈빛으로 다프네를, 마지막으로 게오르그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고압적인 목소리. 게오르그는 두통이 온 듯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다프네는 우물쭈물하며 나를 보았고, 나는 침착하게 넬라에게 대답을 들려주었다.
“마법사를 한 명 영입했어. 이름은 다프네 에피폰. 지금 4서클의….”
넬라는 내 말을 끊으며 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왜 또 마법사를 데려왔냐고. 나라는 마법사가 여기 눈 시퍼렇게 뜨고 네 파티에 남아있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뛰어난 재능은 파티에 많을수록 좋아. 아르옌과 아이시스의 빈자리를 메워야 했으니.”
“그 연놈들의 빈자리를 왜 마법사가 메우는데. 어디 굴러다니는 검사나 주워 와야 하는 거 아니야? 저딴 년을, 뭐? 재능이라고 주워 와?”
넬라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당장 내보내. 한 번은 눈감아주지. 아니면 저 썅년이 눈치가 있으면 여기서 걸어 나가겠지.”
넬라가 으르렁거리며 다프네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럴 순 없어.”
“뭐?”
넬라는 걸음을 멈추고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 눈이 날카롭게 뜨이며 다프네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내 다채로운 감정이 섞인 표정으로 다시 나를 노려보았다. 실망감, 분노, 그리고 짜증과 질투.
“저년한테 빠졌구나. 용사. 성녀한테 껄떡댈 때는 언제고, 금방 또 새로운 년을 찾았네? 발정 난 개새끼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이야, 이게?”
심드렁했다. 저런 도발이나 성질 건드리는 모욕이야, 이미 이 세상에 떨어지고 난 직후에도 들었고, 그 이후로도 수십, 수백 번은 들어와서 이제는 인사처럼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내 뒤편에서 가만히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다프네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당신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처음 들어보는, 다프네의 서늘한 목소리가 내 어깨 뒤편에서부터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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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로이가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한 다음 날.
회복은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다프네는 일로이가 무리하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일로이는 오른팔로 성검을 잡고 붕붕 휘둘러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제는 팔에 감기지 않은 붕대. 그리고 그 위에 적혀있던 자신의 손글씨를 되새기며, 다프네는 일로이를 따라 다시 왕도의 외곽으로 향했다.
“오늘부터는 나한테 방호마법을 사용하는 것보다, 네 파괴 계열 마법으로 마물을 쓰러트리는 데 더 집중해보자.”
일로이는 그리 말하며 몸을 풀었다. 평소처럼 자신만만하고, 한결 여유가 깃든 표정이었다. 물론, 다프네는 그때도 마물 앞에 서면 제대로 된 파괴 계열 마법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희석되었다고는 해도, 과거의 기억은 여전히 그녀를 붙잡은 채 놓아주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볼까. 이전보다 나아가는 속도가 확연히 빨라지기도 했고.”
일로이가 고기 조각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진 호른호그를 발로 툭툭 밀쳐내며 말했다. 일로이는 예전보다 확연히 강해졌다. 힘이나 마나가 강해졌다기보다는, 전투에서 여유가 깃들기 시작했다고 해야 하나. 힘을 효율적으로 분배해 쓰는 법을 터득한 듯, 호른호그 여러 마리를 쓰러트리면서도 별다른 힘을 쓴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강해졌네요.”
일로이는 다프네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다기보다는 침착해진 거지.”
일로이는 태연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그가 공들여 도와주고 있는데도 다프네는 발전이 더뎠다. 아니, 없었다. 하지만 일로이는 그녀를 재촉할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저 매번 그녀를 데리고 꾸준히 숲으로 나설 뿐이었다.
“…저기, 일로이.”
“응?”
다프네가 부르는 소리에, 일로이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며 그녀를 되돌아보았다. 비가 내리다 만 숲길은 진창이었다. 오늘따라 더욱 어둡고 축축한 숲은 꼭 일로이의 눈동자 색처럼 고요하고 조용하게, 깊은 청록빛으로 도사리고 있었다. 다프네는 순간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입을 열어버렸다.
“혹시 일로이는 나를 좋아하나요?”
다프네를 꽃으로 여겼던 모험가들은 여태 수도 없이 많았다. 물론 가시덤불 속의 꽃. 그녀는 꺾이지 않을뿐더러 가시덤불 속으로 손을 뻗으려는 사람조차 없었다. 가시가 많다며 침을 뱉고는 떠나갔지. 그들은 멋대로 다프네를 단정하고, 기대를 품다가 다시 다프네의 탓을 하며 사라졌다.
“…뭐?”
그리고, 변화하는 일로이의 표정을 마주한 다프네는 즉각 자신이 던진 말을 주워 담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일로이는 처음에는 당혹스러운 듯이 눈썹을 구부렸고, 이내 그 당혹은 서서히 미미한 실망감을 띤 것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다프네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에요.
당신에게 그런 기분을 들게 하려 던진 질문이 아니었는데.
멍청했다. 알고 있었는데. 일로이는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다프네는 일로이가 그녀와 이야기할 때 시선이 다른 곳으로 새지 않고 오로지 눈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에 담긴 것이, 믿음과 격려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건 조바심이었다. 조바심이자 자책이었고, 뚫리지 않는 벽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다프네… 나는.”
“미안해요.”
다프네는 즉각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실망하지 마요. 여태 나를 바라보던 그 눈에서 다른 눈이 되어버리지 말아요. 날 싫어하지 말아줘.
침묵은 무섭고 무거웠다. 나뭇잎이 맺혀있던 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리는 소리, 무거운 물방울이 흘러내리며 풀잎이 고개를 떨구었다가 드는 소리가 다 들렸다.
“잠깐 앉아있다 갈까.”
일로이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젖은 바위를 마법으로 말렸다. 일로이는 한참이고 말을 하지 않았다. 다프네는 일로이의 눈치를 보다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다프네가 던진 질문의 여파가 빗소리에 묻혀 사라졌을 때, 일로이가 불쑥 다시 입을 열었다.
“좀 진정됐어?”
“네.”
“….”
“….”
“미안해요.”
“알면 됐어.”
“…화났죠?”
“조금은?”
“미안해요.”
“지금은 화 안 났어.”
“….”
“그래도, 바보 같은 질문이었어.”
“…알고 있어요.”
다시 다프네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일로이가 익숙한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미 앙금은 다 털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뭐,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
“그렇지 않아요.”
자신 없이 말하는 다프네를 보며 웃던 일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바지를 툭툭 털었다.
“그 사람들이 뭐라 하든 전혀 신경 안 쓸 거지만 말이야.”
일로이가 다프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건 화해와 용서의 손짓이기도 했고, 안심하라는 듯한, 그런 상냥한 말이 담긴 손짓이기도 했다. 다프네는 그 손을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설임은 사라지고, 오로지 한 가지 감정, 생각만이 남아있었다.
남아있을 거다. 날 믿어주는 이 사람의 곁에.
일로이의 손을 잡는 다프네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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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년한테 빠졌구나. 용사. 성녀한테 껄떡댈 때는 언제고, 금방 또 새로운 년을 찾았네? 발정 난 개새끼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이야, 이게?”
그리고 지금, 날 믿어준 사람을, 고작 발정 난 개새끼 취급하는 사람이 저기 있었다. 내가 있을 곳을 없애라고 말하는 사람이 저기 있었다. 나를 모욕하는 건 괜찮아도, 나를 믿어주는 사람을 모욕하는 건 이제 참을 수 없었다. 참아서는 안 되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마나가 꿈틀댄다. 앞으로 나서라고 말하고 있다.
다프네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정으로, 넬라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