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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21화 (22/158)

Chapter 21 - 21. 한 걸음 (3)

“…위험하군.”

게오르그가 중얼거렸다. 방금 또 한 마리의 호른호그를 넬라가 태워버린 차였다. 나는 매캐한 탄내를 풍기는 연기를 고개를 저어 떨치며 게오르그를 보았다. 새카만 연기 사이로 풍겨오는 냄새를 슬쩍 맡아보니 삼겹살 굽는 냄새가 났다.

“뭐가 그렇게 위험한데?”

“이대로 가면 그냥 꼼짝없이 다프네를 파티에서 내쫓아야 할 상황이 아닌가.”

넬라는 손가락 한 번 튕겨 호른호그 다섯 마리를 그 자리에서 구워버렸다. 그보다 살짝 뒤에 처져 걷는 다프네는 아직 제대로 된 마법 한 번 발현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나와 함께 수련할 때면 늘 그랬듯, 손에서 작은 마력의 스파크가 튀기고는 마법으로 바뀌지 않았다. 여태 다프네가 무찌를 수 있었던 마물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걱정해주는 거냐? 너는 넬라가 이기기를 바라는 거 아니었어?”

내 질문에 게오르그는 불편하게 눈썹을 찡그렸다. 나는 낮고 짓궂게 웃음을 흘렸다.

“나는 그저 두 사람이서 싸우는 걸 멈추기 위해 둘 모두가 납득할 만한 제안을 했을 뿐이었다. 누가 이기기를 딱히 바라고 있던 건 전혀 아니었어.”

거짓말. 넬라가 얼마나 게오르그를 부려 먹었는지는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아르옌은 그저 갈굼의 대상이었다면, 게오르그는 만만한 고기방패였으니까. 게오르그는 절대 넬라가 다시 파티에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을 거다. 그런 주제에 융통성 없이 납득할 만한 제안을 하겠답시고 넬라가 이길 확률이 더 높은 대결을 제시하다니. 아니면 지독한 마조히스트인가.

“나는 솔직히 다프네가 이기기를 바라고 있어. 확실하게 말이야.”

“그런데 어째서 넬라와 다프네가 뻔히 기량을 겨루도록 내버려 둔 거냐?”

게오르그는 힐난하듯 내게 말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다프네는 마나를 흘리며 손에서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전혀 느낌이 달랐다. 나는 그런 다프네의 성장을 미소 지으며 바라보다, 게오르그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다프네가 하겠다고 했거든. 그럼 믿어주는 거지, 뭐.”

파지직.

평소에 마법을 발현하는 데 실패한 다프네는 항상 축 처진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실망하고, 나에게는 미안하다고 말하는 표정이었다. 실패를 곱씹으며 시도한 다음 마법이 실패하면, 더욱 움직임과 표정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지금의 다프네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4서클씩이나 되는 년이 내 앞에서 마법도 못 쓰고 빌빌거리는 꼴은.”

도발해오는 넬라의 말을 아예 무시한다. 다프네는 마치 발상을 떠올리기 직전의 예술가처럼 굉장히 무언가에 몰입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눈 속에 비치는 건, 돌진해오는 마물들의 모습도 아니었고, 넬라의 모습은 더더욱 아니었다.

파지지직!

달라졌다. 다프네의 눈은 평소대로였지만, 다프네를 돌아보는 넬라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프네에게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넬라는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다급하게 외쳤다.

“이제 이쯤 하면 된 거 아니야?! 더 볼 필요가 있어?”

아니, 너도 그만할 생각은 없었잖아.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프네가 제대로 벽을 무너뜨리는 건 보고 끝내야 할 거 아냐.

“아직 안 끝났어.”

분노와 절망감으로 넬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마구 낭비되던 다프네의 마나가 어느 순간 완전히 사그라들어버린 것을 느꼈다. 무언가를 찾는 듯 완전히 심상세게에 몰두해있던 보랏빛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다프네의 손에 맺힌, 보랏빛으로 빛나는 마력의 구체를 확인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한 걸음. 내디뎠구나.

사그라들었던 마나는 이내 일점의 폭발로 이어진다. 다프네는 손을 앞으로 쭉 내뻗고는 입으로 주문을 외웠다.

콰과과과광-!!

보랏빛 벼락이- 아니, 이쯤 되면 벼락의 형태를 띤 무언가라고 해야겠다. 한 마리 용처럼 꿈틀거리는 마력의 폭주가 굉음과 함께 숲 일대를 날려버리기 시작했다.

“…!!”

그 여파에 게오르그와 내가 뒤로 밀려났고, 넬라는 황급히 방호마법을 전개해 후폭풍으로부터 몸을 지켰다. 흙모래가 바람에 휩쓸려 파도처럼 튀었다. 피어오른 먼지가 가라앉고 난 후, 다프네의 마법이 가져온 참상을 보며 게오르그는 입을 쩍 벌렸다.

“…이게, 내가 알던 라이트닝 볼트가 맞나?”

뭘 이 정도로 그리 호들갑을 떨어. 나는 내심 뿌듯한 기분이 되어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다프네의 주변을 보라색 전류가 마치 갑옷처럼 감싸져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그 앞으로는, 누가 지우개로 숲을 통째로 지워놓은 듯, 다프네의 마법이 훑고 지나간 곳의 모든 게 아예 사라져버렸다. 나무든, 땅이든, 마물이든 말이다.

“다프네의 마법이 특별하긴 하지. 놀란 건 없어. 앞으로는 더욱 성장할 건데, 뭐.”

나는 당장 뛰어가 다프네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눌러 참으며,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 물론 내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이 자랑스러운 기색이 묻어났겠지만. 게오르그는 멍하니 잔해를 바라보다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찬가지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

“…진작에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거냐, 일로이?”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알고 있었다마다. 물론 그녀가 벽을 부숴버리며 여기까지 나아온 건 순전히 그녀의 공이었다. 나는 그저 옆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기만 했을 뿐.

“사람을 볼 때는 제대로 봐야지. 뭐, 다프네가 열심히 해줬으니 가능한 거야.”

“…너는 도대체….”

게오르그는 굉장히 오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징그러우니 그런 식으로 쳐다보지 좀 말았으면 좋겠는데. 게오르그는 그리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 진작에 이리 믿고 있었으니, 이 모든 게 가능했겠지.”

나는 게오르그를 보며 피식 웃어준 후에 다시 마법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 정말 본격적인 대결이 시작될 차였다.

“…이제 겨우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수준에 올라 놓고 우쭐하기는.”

넬라가 다프네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단순히 수치만 놓고 보면 5서클 대 5서클. 하지만 다프네가 완성한 다섯 고리의 마법은 넬라의 그것과는 궤를 달리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넬라도 다프네도 모두 깨달은 듯하다.

더 추해지기 전에 그만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나는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앞서가는 마법사들을 따라 걸어갔다. 그리고, 차마 눈 뜨고 보고 있기 힘들 정도의 양민 학살이 시작되었다. 물론, 이번에는 그 양민이 다프네가 아닌 넬라가 되었다는 차이가 있지만.

라이트닝 볼트.

콰과과광-!!

다프네는 지독할 정도로 같은 마법만을 쓰며 나아갔다. 그녀가 손을 뻗을 때마다 날아드는 번개에 넬라는 손도 써보지 못하고 마물이 사라지는 광경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넬라는 이를 부득, 갈더니 4서클의 공격마법을 펼쳐 다프네보다 먼저 마물을 처리했다.

“…쓸 줄 아는 마법이 3서클의 라이트닝 볼트, 그거 하나밖에 없나 보지?”

다프네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에 넬라는 헛웃음을 쳤다. 다프네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그건 안 되나 보네요.”

“…?”

“아무리 그래도 ‘라이트닝 볼트’ 하나만 가지고 이기는 건 역시 힘들 거 같아요.”

“뭐…?”

넬라가 벙찐 표정을 지어 보였고, 다프네는 손에서 새로운 마나를 피워 올렸다. 이번에는 꽃잎처럼 피어오르는 불길. 다프네는 자신의 손안에서 춤추듯 피어오르는 불을 허공으로 띄워 보냈다. 그 마법을 보던 넬라의 표정이 거세게 흔들렸다. 자신이 여태 주로 사용했던 5서클의 마법- 불의 기둥. 하지만 달랐다. 다프네의 손끝에서 완성되어가는 저 마법은 결 자체가 넬라의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그 전에 내뱉은 말들을 모두 후회하게 만들어드리려 했는데 말이죠.”

다프네는 그리 중얼거리더니, 손을 꽉 쥐었다. 다프네의 손아귀에서 감돌던 불꽃이 사라졌다. 다프네의 보랏빛 눈 속에서 그와 같은 불이 나타난 것 같았다. 잿빛곰 한 마리가 풀숲을 넘어 불쑥 나타났다. 다프네의 눈이 잿빛곰을 포착했고, 곰은 포효를 내지르며 자신의 구역을 망가뜨리는 이들에게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그리고, 이내 솟아오른 거대한 불기둥이 곰을 집어삼켰다. 불은 곰의 두꺼운 가죽과 털을 감싸며 맹렬하게 타올랐다. 곰은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뒷걸음질을 쳤다. 저걸 맞고 한 번에 죽지 않은 맷집이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부족했네.”

다프네가 다시 마나를 끌어올렸다. 휘청거리는 곰의 머리로 빛나는 얼음의 창이 꽂혔다. 하나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을까, 곰은 머리가 관통되었는데도 그 팔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다프네는 무표정한 눈으로 다시 손가락을 까닥했다.

푹. 푸푹. 푸푹.

불의 기둥에 의해 한 차례 연해진 잿빛곰의 가죽을 얼음 창들이 어렵지 않게 꿰뚫었다. 뱃가죽, 등가죽, 앞발과 뒷발. 잿빛곰은 고슴도치가 되어 피를 쏟으며 죽었다. 내가 저 녀석을 쓰러트릴 때 조금은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다프네가 잿빛곰을 상대하며 보이는 여유는 무섭게까지 느껴졌다.

“[긴장하지 않으면 저 아이에게 뒤처지겠구나.]”

성검이 느긋하게 말했다. 이미 따라잡히고도 남은 거 같은데 말이지. 나는 쓰러진 잿빛곰 앞에서 늠름한 모습으로 선 다프네를 쓴웃음과 함께 바라보았다.

“더 하시겠어요?”

넬라는 도발하듯 묻는 다프네의 말에 주먹을 쥐었다. 패배는 명백했다. 하지만 넬라는 반항하듯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이렇게 되리라 예상하지는 않았겠지.

“아직 안 끝났어.”

넬라가 마나를 끌어올렸다. 다프네라면 몰라도, 넬라는 이 이상으로 마력을 소모하면 지칠 텐데. 이미 마물을 몇십, 몇백 마리는 쓸어버렸고 중간에 회복할 시간도 없이 강행군을 지속했다. 특별한 수준의 마법사가 아니라면 이미 나가떨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직….”

넬라의 머리 위로 마력의 빛이 떠오른다. 아직 여유가 있다고, 더 싸울 수 있다고 시위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넬라와 다프네의 눈이 마주쳤다.

파지직!

넬라의 주변을 맴돌던 마력이 전류 튀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마력의 방전 현상이었다. 넬라는 당황한 눈초리로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다프네는 역시 의문스러운 듯한 눈으로 넬라를 마주 보았다.

이제 넬라가 나가떨어질 때가 된 건가.

“[아니, 사용할 수 있는 여유 마나는 남아있었을 게다.]”

성검이 내 생각을 부정했다. 사용할 수 있는 여유 마나가 남아있다니?

“[마법사의 마법 사용에 영향을 미치는 건 잔여 마나뿐만이 아니다. 심리적 요인 또한 무시할 수 없지. 아마 지금 저 마법사는 다프네에게 겁을 먹은 상태일 거다.]”

겁을 먹었다고?

“[그래. 사기가 꺾여버린 거지. 마음속으로는 부정하고 싶어도 머리는 깨달았을 거다. 지금 자신이 어떻게 발버둥 쳐도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을 거라고. 다프네를 이길 수 없을 거라고 말이다. 보기보다 심지가 굳센 사람은 아니었군.]”

마물의 습격은 더 일어나지 않았다. 근방에 사는 마물 대부분을 두 사람이 쓸어버린 탓인 듯했다. 산바람이 불어왔다. 재가 되어버린 마물의 잔해가 바람에 섞여 날았다.

“당신이 졌어요.”

다프네가 넬라의 패배를, 자신의 승리를 선언했다. 넬라는 그 명백한 결과를 부정하지도, 인정하지도 못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약속은 이행하세요.”

“개 같은…년이….”

넬라는 불기둥에 맞은 곰처럼 휘청거리며 뒤로 돌아섰다. 저벅, 저벅, 걸어 돌아가는 발걸음이 재를 무겁게 짓밟았다.

“일로이… 정녕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지.”

넬라는 뱀이 쉿쉿거리듯 내 앞에 멈춰 서서 낮게 읊조렸다. 나는 넬라를 내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그 태도를 바꾸겠다면 남겨둘 의향은 있어. 그렇지 않다면…”

“지랄하지 마, 용사. 재앙이나 잡다가 뒤져버려.”

넬라는 깊게 분노를 담아 내뱉고는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나는 사라지는 넬라의 뒷모습을 눈으로 배웅하다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일로이.”

다프네가 그곳에 서 있었다. 다프네는 어느새 긴장이 완전히 풀린 듯한, 해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프네는 천천히 내게로 다가오다가, 다리에 힘이 풀리며 앞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마음을 가로막던 트라우마를 벗어나며 정신력을 마나 못지않게 사용했을 테니, 지칠 만도 하다. 나는 다프네를 받쳐 들었다. 그녀의 희미한 체향이 코끝을 스쳤다.

“저, 해냈어요.”

다프네는 헤헤, 웃음이 섞인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와 흙먼지로 조금 더러워진 뺨은 상기되어 있었다. 지친 보랏빛 눈이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응. 결국 해냈네.”

“믿어줘서 고마…워….”

다프네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한계치까지 누적된 피로에 깊은 잠에 빠진 듯했다. 다프네를 안아 들자, 게오르그가 다가왔다. 어딘가 씁쓸하면서도,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고했다, 일로이.”

짧게 말을 남기고는, 게오르그는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저 우직한 녀석이 사람으로 인해 고통받을 일도 없겠지.

“일…로이.”

다프네의 잠꼬대가 들려왔다. 그녀는 깊이 자는 중에도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다프네의 시련이 하나 끝났다. 나는 순수하게 그 사실을 기뻐하며, 다프네의 얼굴에 늘어 붙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수고했어, 다프네.”

나는 다프네를 안아 들고, 앞서가는 게오르그의 뒤를 따라 천천히 왕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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