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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22화 (23/158)

Chapter 22 - 22. 썩 달갑지만은 않은 (1)

말은 출근이라고는 해도, 사실 용사의 사무실에 딱히 체계적인 업무가 주어진 건 아니었다. 이따금 왕실이나 고위 귀족이 보내오는 서신에 답변을 쓰거나, 용사의 협조가 필요한 마물 토벌이 있다면 지원을 나서주는 정도.

물론 정말 시간을 허비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 비는 시간은 모조리 수련에 투자하고 있었으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서신에 답변을 쓰는 것도, 행사에 얼굴을 비추는 일도 용사에게는 시간 낭비였다. 더 강해져야만 내가 살아남고, 재앙을 쓰러트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커진다. 네 번째 재앙의 토벌을 나서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달력 위로 하얀 칸을 하나씩 잡아먹는 빨간 곱표가 내 마음도 함께 갉아먹으며 조바심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한가해 보이는군.”

게오르그가 문득 내게 말을 걸었다. 방금 세 번째 재앙을 공략할 때의 복기를 마친 참이었다. 어차피 내가 아는 게 없었기 때문에, 내 역할은 그저 게오르그의 말을 경청하는 척해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간단한 회의를 진행했다고 할까. 아주 영양가 있는 시간을 보낸 건 아니었다.

“수면 아래 백조의 발이라고 들어는 봤어?”

“노력이라는 건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계속해야 하는 법이다. 백조도 헤엄을 멈추면 물에 빠지지 않나.”

게오르그도 내 말을 받아치는 게 점점 능숙해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로 몸을 늘어뜨렸다. 요새 성검은 꽤 혹독하게 나를 단련시키고 있었다. 심, 기, 체 중에서 가장 먼저 기반이 되어주어야 하는 건 결국 몸이라나, 뭐라나. 여태 그런 체계도 없이 단순히 검을 휘둘렀냐며 욕을 꽤 먹었다.

성검의 개방이 내 몸의 회복 속도를 높여놓았기 때문에, 잠을 쪼개 자면서도 수련에 열중할 수 있게 되었다. 새벽 2시경에 잠들고 새벽 5시에 다시 깨어 수련을 시작하는 미라클 모닝. 그러면서도 몸의 피로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조금 충격이었다. 이 정도는 약과라며 혀를 차는 성검의 목소리는 더더욱 충격이었고.

“차 가져왔어요.”

탕비실의 문을 열고 다프네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다프네의 투명한 구슬 같은 목소리가 단비 같았다. 달칵, 내 책상 위로 놓이는 찻잔에서는 달그락거리는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다프네가 재주 좋게 차가운 차를 탔나 보다. 나는 차가운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며 그 서늘한 냉기를 만끽했다. 초여름에 딱 어울리는 음료였다.

“조금씩 더워지고 있어서, 한 번 차갑게 해봤어요.”

“너밖에 없다, 다프네.”

기쁜 한숨과 함께 중얼거리자, 다프네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차를 한 모금 마셔보자, 자스민과 녹차가 적절히 섞인 향이 몸에 스며들었다.

“좋네.”

내 감상에, 다프네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넬라와의 대결 이후, 부쩍 표정이 밝아진 다프네였다. 나는 이제 제법 자주 볼 수 있게 된 그 미소를 감상하며,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쿵, 쿵, 쿵.

그때, 1층에서 누군가가 정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고개를 들었고, 나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는 내 뒤를 다프네가 습관처럼 따랐다.

“누굴까요? 지금 찾아올 만한 사람이.”

“…그러게. 지난번과 같은 불청객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께름칙한 기분과 함께 1층에 도달한 나는 확신이 서지 않은 손길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가에 서 있는 인물은, 반갑게 맞이해야 할지 애매한 녀석이었다.

“오랜만은 아니고, 날씨가 참 좋군요, 용사님.”

안드레 주교는 언제나처럼 새카만 사제복에 은빛 묵주를 매고, 실눈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불청객…은 아니겠지?

“이거, 지금 찾아온 게 실례가 되는 게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안드레 주교가 내 뚱한 표정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지난 청문회 때에 나와 말을 잘 맞춰주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 사람은 이단심문관들의 우두머리다. 절대로 방심해서도, 온전히 믿어서도 안 될 사람이라는 뜻이다.

“일단 들어오시죠.”

나는 길을 내어주었다. 안드레 주교는 감상하듯 로비를 둘러보며 들어왔다.

“생각보다 왕국에 오래 머무르시네요.”

“카이로스 왕국에 있으면서 해결해야 하는 일이 생각보다 많더군요. 아이시스와 용사님 덕분에 말입니다.”

안드레 주교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하긴, 아이시스가 사라진 건 왕국에 들어오고 나서였으니, 그녀의 행방을 파악하거나 소식을 듣기 위해서는 당분간은 왕국에 머물러야겠지. 저번 내무대신 보좌때처럼 로비에서 끝낼 수는 없을 듯하니,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했다.

“이번에 찾아오신 건….”

“몇 가지 알려드려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아마 용사님께서 반길 소식도 있을 듯하군요.”

안드레 주교는 기대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무실에 도달하자, 방을 지키고 있던 게오르그가 안드레 주교를 보고는 기사의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주교님.”

“그리 딱딱하게 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평범한 손님이라 생각하고 대해주시지요.”

안드레 주교는 응대용으로 마련된 소파에 가 앉았다. 나는 그 맞은편에 앉았고, 다프네는 차를 더 타오겠다며 탕비실로 쪼르르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흘긋 바라보던 안드레 주교가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성장했군요. 다프네 양이라고 했던가요?”

“잘 알아보시는군요.”

“예. 이거 축하드려야겠습니다. 제법 큰 성취를 이룬 듯하니까요. 용사 파티에 정말 걸맞은 마법사가 되었네요.”

주교는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다시금 내게 고개를 돌렸다. 과연 저 웃는 얼굴이 오늘은 어떤 폭탄을 들고 왔을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다프네가 다시 차를 내어왔고, 안드레 주교는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자스민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이시스를 찾았습니다.”

주교의 실눈 사이로 회색 눈이 번득였다. 마시던 차를 그대로 뿜어버릴 뻔했다. 나는 목울대를 찡하게 울리는 찻물을 침과 함께 삼켜내며 눈을 깜박였다. 설마, 이 사람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쓸데없는 짓을 하려는 건 아니었겠지.

“아이시스를… 찾았다고요?”

“언제 거기까지 갔는지, 왕도에서 꽤나 떨어진 도시에 있더군요. 모험가 길드에서 몇 번인가 목격되었고, 지금은 콜다의 한 여관에서 지내는 중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주말마다 온 도시의 정보가 모여드는 곳이니, 아이시스가 어디 있는지 찾는 게 어렵지는 않더군요.”

집 나가면 고생이지 않습니까. 안드레 주교는 그리 덧붙였다.

“아이시스는 아직 교회를 찾아오지는 않았습니다. 목적이 따로 있는 것인지, 누군가를 계속 찾아다니고 있는 모양이긴 한데. 언제까지 교회를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일 테니, 오래지 않아 교회에 한 번 모습을 드러내리라 생각합니다.”

그 누군가는 분명 아르옌이겠지. 두 사람이 만나기는 했으려나? 원작에서는 제법 감명 깊게 보았던 장면 중 하나지만, 지금 생각하면 위장이 뒤틀리는 느낌밖에는 들지 않았다.

“아이시스를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연락이 닿게 된다면 전후 수습을 부탁하려 합니다. 마침 콜다는 세 번째 재앙이 나타났던 바크틴스와 가까우니까요. 용사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를 들려줘도 괜찮겠죠.”

다행히, 이단심문관들이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나야 아이시스를 납치하거나 주인공을 건드리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렇군요.”

“용사님이 청문회에서 해주신 말씀 덕분에, 성국과 성녀가 곤란한 입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이 점은 재차 감사를 드려야겠군요.”

안드레 주교는 한숨을 내쉬었다.

“성녀를 다시 마물이 득실거리는 전장에 내보내지는 않겠지만, 사람들이 원한다면 언젠가는 아이시스와 다시 얼굴을 마주해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아이시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나 주인공에게는 더 관여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용사고 그녀가 성녀로 남아있는 이상 어쩔 수 없이 엮일 수밖에 없는 듯하다.

“그런 기회가 온다면 부디 성녀와 용사 간에 쌓인 오해를 풀고, 갈등을 해소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성국과 카이로스 왕국의 관계와는 별개로 말이에요.”

이미 꼬일 대로 꼬여버린 관계를 건드려서 좋을 게 있나 싶다. 괜히 싸움만 날 거 같은데. 나는 얼추 고개를 끄덕여준 뒤 남아있는 차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고는, 안드레 주교가 쓴웃음과 함께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서, 제가 반길 만한 소식은 무엇입니까.”

안드레 주교는 손바닥을 마주쳤다. 저 눈에 깃든 기대감을 보니, 정말 내가 반길 만한 소식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경위는 어찌 되었든, 용병과 성녀가 용사 파티에서 떠나지 않았습니까. 용사 파티의 전력이 깎인 것도 틀림없는 사실일 테고요.”

“…그렇죠.”

“이번 일을 통해 성국이 용사님께 빚을 진 것도 있으니…, 조그마한 보답을 준비했습니다.”

보답?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돈으로 주신다면 정말 감사할 거 같은데요.”

내 말에 안드레 주교가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 아닌데.

“성국도 요새 쪼들리는 처지라, 돈으로 드릴 수는 없고, 대신 돈으로는 그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물건을 준비했습니다. 아마 용사님께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물건이라. 저런 식으로 대답하니까 오히려 불안한데.

“물건을 여기 직접 들고 오셨다는 말인가요?”

안드레 주교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개인적으로 들고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성국에서 이곳으로 옮길 때도 꽤나 신경을 써야 했던 물건이고요.”

“그럼, 지금 어디에….”

“현재 왕도의 한 교회 지하에 엄숙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

주교가 그리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시지요. 아마 시간이 좀 걸릴 텐데, 지하의 출입은 저와 용사님만이 허가받은지라, 두 분은….”

주교가 다프네와 게오르그를 돌아보며 말하자,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내저었다.

“기다릴 필요는 없어. 먼저 퇴근해도 좋아.”

게오르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돌아갔고, 나는 걱정하는 표정으로 끝까지 기다리겠다는 다프네를 억지로 퇴근시켰다. 그 광경을 안드레 주교가 웃음을 띤 채 바라보고 있었다.

“좋은 동료를 두셨군요.”

“…출발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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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외로, 청교회의 교회는 규모가 크지 않았다. 고딕 성당의 웅장함 같은 느낌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내 앞에 나타난 건 그레고리안, 로마네스크의 투박함에 가까운 평범한 크기의 성당이었다. 아마 그런 거대한 성당은 주로 여기가 아니라 성국에 즐비하겠지.

“카이로스 왕국의 교회는 역사와 전통이 있습니다. 이곳도 제가 제법 좋아하는 교회 중 하나지요.”

삐걱거리는 성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며 안드레 주교가 말했다. 햇빛을 등지고 지어진 교회는 여름이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서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주교는 긴 의자가 놓인 신랑을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갔다.

“…사람이 아무도 없네요.”

“미사가 없는 날이기도 하고, 오늘 용사님을 모시고 올 테니 잠깐 자리를 비워달라 부탁을 드렸습니다. 흔쾌히 들어주시더군요.”

나는 괜히 불안해져 성검의 검자루를 매만졌다.

“[어떤 물건을 가져왔을지 궁금해지는구나.]”

…뭐, 성검은 그다지 신경을 쓰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자, 이곳입니다.”

내진의 뒤편, 회랑과 같은 곳에 마련된 나무 문 앞에 서서 안드레 주교가 말했다. 이단심문관이 지하로 내려가는 문을 열고 있으니, 마치 저 문 뒤로 도사리는 게 이교도들을 가둬놓는 지하감옥일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들어가시지요.”

주교는 어디선가 꺼내온 랜턴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는 몰래 마른침을 삼키고는 주교를 따라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안 그래도 어두운데, 지하실로 들어가기 시작하니 이제 냉기라기보다는 한기에 가까운 것이 몸을 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성유물(聖遺物)이라는 게 있습니다. 혹시 들어보신 적은 있습니까?”

돌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발소리 사이로 주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흔들리는 랜턴의 불빛에 주교의 그림자가 귀신처럼 벽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옛 성인들이 남긴 유물 같은 걸 말하는 건가요?”

주교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예. 그리고 그들은 특별한 힘을 지닌 경우가 많지요. 주인을 가리는 경우도 많고요. 마치 용사님께서 사용하시는 성검처럼 말입니다.”

나는 흘긋 허리춤의 성검을 내려다보았다. 기다렸다는 듯 성검이 말을 걸어왔다.

“[그것들 전부가 나 같지는 않을 거다.]”

그래. 성검 정도로 강력한 물건이 또 존재하지는 않을 거다. 그렇다면 교회라기보다는 그냥 수상할 정도로 강력한 병기를 잔뜩 지닌 무력 집단이라고 생각해야 옳으리라.

“지금 용사님께 그 성유물 중 하나를 빌려드리려고 합니다.”

지하실에 도착하자, 안드레 주교는 렌턴을 천장에 걸었다. 번들거리는 불빛 아래, 검은 천에 감싸져 있는 유리관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주교는 천천히 관으로 다가가더니 천을 잡아서 끌어 내렸다. 나는 유리관 속에 자리한 성유물을 보고는 침음성을 흘렸다.

“옛날.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아주 먼 옛날, 한 성인이 남긴 물건.”

가시덩굴을 엮은, 군데군데 얼룩이 진 관(冠)이 그곳에 있었다.

“면류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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