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 - 23. 썩 달갑지만은 않은 (2)
나는 안드레 주교가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면류관을 바라보며 눈꺼풀을 부들부들 떨었다. 원작에서 이런 무시무시한 물건을 본 적은 없는데. 주인공이 이런 물건을 받았던 내용도 없었다고 기억하는데. 머리에 쓰기는커녕 만질 수조차 없을 것 같은데.
“…이걸 머리에 쓰고 싸우라는 겁니까?”
이걸 쓰고 싸웠다가는, 머릿가죽에 바람구멍 숭숭 뚫리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았다. 내 황망한 목소리에, 안드레 주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모든 성유물이 다 전투할 때 쓰이는 건 아닙니다. 이 면류관도 그렇죠. 이 관은 병기가 아닙니다. 소유자가 어떤 식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요.”
“사용이라고요?”
주교가 유리관 위로 손을 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 면류관을 바라보는 주교의 눈은 모종의 기대와 존경심이 담겨있었다. 안드레 주교는 면류관을 감싼 유리관을 가볍게 붙잡고 벗겨냈다. 면류관이 살포시 놓여있는 붉은 벨벳은 마치 피 때문에 빨갛게 물든 것처럼 보였다.
“이 면류관은… 먼 옛날에 한 성인(聖人)이 썼었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유물입니다. 그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어요. 막연하게 신화시대의 물건이리라 여기는 추측밖에는 없습니다. 정말 오래된 유물이니만큼 그 힘도 웬만한 유물보다 훨씬 강력할 겁니다.”
원작에서 나온 물건은 아니지만, 작가가 실제로 설정을 한 성유물이라면, 무엇을 모티브로 했는지는 일단 알 것 같다.
“그간 사람들은 이 관을 쓰고 기도하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믿었습니다. 면류관이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거나요.”
그거참 쓸데없는 기도 방식이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안타깝게도 말이죠, 그렇게 가시 면류관을 쓰고 기도한 사람들에게 면류관은 답을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면류관을 더 이상 찾지 않게 되어버렸죠.”
안드레 주교는 가시 면류관을 들어 올려 내게 건네었다. 나는 면류관을 받아 들고는 의문스럽게 바라보았다.
“…한 번도 답을 들려주지 않았다는 건, 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는 소리 아닙니까?”
“용사님께서도 절대 뽑을 수 없다고 여겨졌던 성검을 뽑아 올리시고 그 힘을 세상에 증명해내지 않으셨습니까. 이 면류관도 다르지는 않을 겁니다.”
내가 그래도 어딘가 마뜩찮은 기색을 띠자, 안드레 주교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시 면류관을 향해 손짓했다.
“성유물은 사용자의 자격을 시험할 테니, 궁금하시면 써보셔도 괜찮습니다만.”
이미 수분이 다 빠져나가 말라비틀어진 가시 면류관은 의외로 가벼웠다. 조금만 잘못 만지면 먼지가 되어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머리에 쓴다고 하더라도 그리 아플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가시 면류관을 머리 위로 올려보았다. 조금 따끔한 느낌이 들더니, 내 머리 위로 면류관이 자리를 잡았다. 우려했던 대로 가시가 내 머리를 파고들지는 않았다.
“어떻게 사용자를 시험한다는 건가요.”
“면류관이 시험을 내린다고 하더군요. 극복한다면 그 힘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겁니다.”
안드레의 설명과 함께, 한 줌 마나가 면류관의 가시를 타고 내 몸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성검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낯선 느낌의 마력이었다. 나는 괜히 거스르려 하지 않고 면류관의 마나가 내 몸을 타고 들어오게 내버려 두었다.
“시련은….”
어떤 식으로 주어지나요. 라고 나오려던 말이 목구멍에 걸렸다. 벼락이 순간 정수리를 파고들어 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조각조각 부숴버리는 듯한 느낌. 나는 그 끔찍한 고통에 비명도 채 지르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일로이!]”
“용사님?!”
눈앞이 캄캄해지고 의식이 점차 희미해져 갔다. 머리 위의 면류관이 흘러내리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안드레 주교와 성검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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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꿈을 꾸었던 것 같다.
빙의하기 전의 나는 아니었다. 나는 꿈속에서도 일로이였다. 억수같이 비가 내리는 날에, 일로이는 유적지 속에 고스란히 내리는 비를 다 맞으며 서 있었다. 빗줄기 사이로, 일로이는 성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검은 바위에 꽂힌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일로이는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성검이 꽂힌 바위에 다가가서는, 그 검자루를 거머쥐더니 뽑아 올렸다. 성검은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고 말하듯 일로이의 손길을 따라 부드럽게 뽑혀 올라왔다. 일로이는 그렇게 뽑힌 성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일로이는 힘없는 손짓으로 성검을 끌어안고는 돌무더기 위에 주저앉았다. 비는 여전히 일로이와 함께 세상을 집어삼킬 듯 퍼부어대고 있었다.
비가. 귀와 머리가 어지럽게 쏟아지는 비가.
“…음.”
의식이 차츰 부상했다. 가장 먼저 돌아온 감각은 청각이었다. 내 머리가 맞닿은 무언가와 마찰하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다음으로는 후각. 오래된 나무의 냄새와 향초가 타는 냄새가 났다. 시각이 가장 늦었다. 흐릿하게, 교회의 방으로 보이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끔찍한 탈력감이 몸을 짓누르고 있어, 당장 일어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불편하게 몸을 뒤척이며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머리와 얼굴에 와닿는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굉장히 편안했다.
…잠깐만, 감촉?
나는 얼어붙은 채 눈을 깜박였다. 빌어먹을 클리셰. 그리고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안드레 주교의 기척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내 가슴을 지그시 누르는 손길에 강하게 저항하지 못하고 다시 몸에 힘을 빼었다.
“용사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내게 무릎베개를 해주고 있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쪽 귀는 그녀의 허벅지에 묻혀, 그 소리가 반쯤 웅웅거리며 들려오고 있었다. 주교는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내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주교는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건 제 불찰이군요.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가시 면류관. 그 시련을 받아보겠답시고 머리에 면류관을 썼다가, 정신을 잃어버렸지. 기억을 떠올린 건 둘째 치고, 그냥 일어나게 해주면 안 될까. 부끄러워서 죽을 거 같다.
“면류관은 어떡하시겠습니까? 원하신다면 다른 성유물로 교환해드리겠습니다만.”
“[받아두거라.]”
나는 들려오는 성검의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곱 재앙을 물리치는 데 저것만큼 도움이 되는 것도 없을 거다. 다른 건 없느니만 못한 잡동사니들이 대부분일 거니.]”
성검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신화시대라면, 아직 성검이 바위에 꽂히지 않았을 때니 저 가시 면류관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도 아는 걸까. 나는 그 벼락이 몸에 내리꽂히는 것 같은 고통을 떠올리며 표정을 찡그렸다.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알지 않느냐.]”
성검의 말이 맞다. 지금의 나는 재앙을 잡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전력을 갖고 있었으니까. 물불 가려 강해질 처지는 아니었다. 나는 한숨을 폭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면류관은 감사히 받아두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요.”
“그래도 다른 성유물을 지원해드리는 게 가능한지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마냥 하나에만 의존하기도 힘든 상황이니까요.”
안드레 주교는 생각하듯 턱을 잡으며 그리 말했다. 아니, 그나저나….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내가 일어나려 할 때마다 내 가슴을 지그시 누르는 이 무릎베개의 주인공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안드레 주교와 함께 있다는 건 이 사람도 이단심문관이라는 소리인가.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하니 그대로 누워계시지요.”
“아니, 이 사람은….”
안드레 주교가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와 관련된 이야기는 나중에 다른 방식으로 하려 했는데, 이런 방식으로 소개해드리게 되어서 머쓱하군요.”
안드레 주교는 여성을 향해 시선을 올렸다가, 다시 내게로 내렸다.
“이번에 여왕 폐하와 회담을 나누며, 성국 측에서 원정대에 대표를 하나 보내기를 결정했습니다. 내부 논의 끝에, 그녀가 선정되었지요.”
뭐 이딴 식으로 새로운 동료가 생기냐. 나는 얼굴에 경련을 일으켰다.
“마리안느 프림이라고 합니다.”
마리안느의 목소리가 다시금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아니,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아마 원작에서 성녀 납치 에피소드가 진행될 때 청교회 측의, 이단심문관들의 중간 보스 정도로 나서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 그리고 성녀를 되찾으려는 주인공과 겨루다가 – 목이 잘려 무참하게 살해당했을 거다.
“…그녀가 용사 파티에 들어올 정도의 실력자라는 뜻이겠죠.”
“적어도 성국 내에서 그녀와 맞먹는 실력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주교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저 미소가 어찌나 살벌한지.
“아이시스와 같은 치유의 마력을 지니지는 않았지만, 제법 도움이 될 겁니다.”
그래서 왜 멀쩡한 베개를 두고 이런 사람이 나한테 무릎베개를 해주고 있는 건데. 나는 눈으로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안드레 주교는 알아듣지 못하는 척하며 웃을 뿐이었다. 성검이 뭐라 충고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저 허벅다리 위로 편하게 누워 있는 꼴이 아주 좋아 보이더구나. 너 알아서 해라.]”
성검은 그 말만을 남기고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렸다. 왠지 모르게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녀가 아이시스나 그 용병처럼, 당신의 명령을 어기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니까 좀 찜찜한데. 나는 다시 내 가슴을 누르는 마리안느의 손을 밀어내려 했다.
“안정을.”
“이제 괜찮으니까 일어나게 해주세요.”
안드레 주교의 말에, 마리안느가 손을 치웠다. 나는 힘겹게 자유를 되찾고는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벌개진 것 같았다.
“장난이 참 짓궂네요.”
“그녀의 특징을 알려준 것일 뿐이라고 해놓겠습니다. 혹여 그것이 신경 쓰이는 건가요?”
나는 마리안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은발에 금안. 흔하다고 할 수 있는 조합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에 띄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는 얼굴. 마리안느의 얼굴은 말 그대로 대리석을 깎아 만들어 놓은 조각상 같았다. 핏기는 물론이고 감정의 조짐으로 보이는 그 어떤 움직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청교회에서 사람을 키워내는 방식인가요.”
“그리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청교회에 분명 피도 눈물도 없는 이들은 있어도, 그리고 그들이 필요할지는 몰라도, 우리는 그런 이들을 결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지’ 않아요. 마리안느도 마찬가지입니다.”
안드레 주교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는 데에서 안드레 주교는 이미 충분히 피도 눈물도 없는 것 같다.
“그건 무슨 뜻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처음부터 그런’ 사람들을, 청교회의 필요에 따라 키워냈다는 뜻입니다.”
혀라도 내차고 싶은 심정이었다. ‘처음부터 그런’ 사람들이라니. 마리안느는 안드레 주교의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안드레 주교의 눈이 번득이며 마리안느와 나를 바라보았다.
“마리안느는 도움이 될 겁니다. 보증하지요. 성국에서도 최고 전력 중 하나를 보내는 것이니, 부디 사양하지 마시고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국에서 성의를 보낸다고 하니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차피 세 명으로 재앙의 공략에 나서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안드레 주교가 보증할 정도로 강한 전력이라면 어떻게든 도움이 되겠지.
“마리안느, 지금부터는 용사님의 명령에 따를 수 있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마리안느는 그리고서 내게로 고개를 돌려 머리를 숙였다.
“지금부터 용사님을 섬길 마리안느라고 합니다. 하명을.”
내가 뭐라 말을 돌려주지 못하고 있자, 안드레 주교가 벼락을 떨어트렸다.
“아, 참고로 성국에서 넘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마리안느에게는 현재 숙소가 없습니다. 부디 용사께서 넓은 아량을 베풀어 방을 제공해주시면….”
미쳐버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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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꼴이 상당히 우스웠다. 한 손에는 신성한 가시 면류관이 담긴 목관을 들고, 허리춤에는 성검을 차고, 옆으로는 수녀복을 입은 아리따운 여성이 함께 걷고 있었다. 청교회 입문자를 위한 스타터팩 같은 건가. 신도가 제법 꼬일 것 같다.
“…3층에 아마 주거용으로 남는 방이 있을 겁니다. 아주 안락하지는 않겠지만, 그 방을 사용하시면 될 거예요.”
“알겠습니다.”
마리안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회에서 우리 본부까지 걸어오는 와중에 몇 번이고 말을 걸어보긴 했지만, 죄다 알겠다, 혹은 예, 아니오로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나는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눌러 참고 본부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1층의 로비에 앉아있던 다프네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일로이.”
어라, 너 아직 안 돌아가고 있었냐.
아무래도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나를 기다린 모양이다. 미안한 마음에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하는데, 다프네는 갑자기 내 옆을 바라보더니 눈을 깜박였다. 다프네의 시선은 정확히 마리안느에게 꽂혀 있었다. 마리안느를 바라보는 다프네의 보랏빛 눈에서 광채가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시죠?”
다프네가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