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24화 (25/158)

Chapter 24 - 24. 썩 달갑지만은 않은 (3)

순간 한기가 느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다프네에게서 두 걸음 정도 물러났다. 하지만 다프네의 시선을 받는 마리안느는 전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다프네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며 마리안느의 눈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반가워요, 저는 다프네 에피폰이라고 해요.”

다프네의 인사에, 마리안느가 고개를 까닥이며 마주 인사했다. 여태 저 표정에 금이 가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이대로 그냥 두었다가는 다프네가 고장 나버릴 것 같아, 나는 재빨리 변명하듯 설명을 시작했다. 이상하네. 왜 식은땀이 이렇게 줄줄 흐르는 걸까.

“청교회 측에서 보내준 사람이야. 이름은 마리안느. 용사 파티에 새로 들어오게 되었고, 당연히 우리 원정에 동행하게 될 거야.”

“청교회라면, 그 주교인가 하는 사람이 보냈다는 건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프네는 여전히 마리안느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마리안느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내 다프네가 스멀스멀 내보내던 한기가 사그라들었고, 평소의 그녀로 돌아왔다. 나는 그 광경을 조금 복잡해진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업자득이라 생각하거라.]”

성검이 꼴 좋다고 놀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여기서 뭘 얼마나 잘못했다고 자업자득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다시피 원래 원정대 인원은 다섯 명이었어, 그게 세 명으로 줄어버렸으니 성국 측에서 특별히 신경을 써준 거야. 실력은 보증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다프네는 다시 내게로 눈을 돌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마리안느의 손에 들린 트렁크를 마주하고는 다시 표정을 살짝 굳혔다. …그러고 보니 아직 다프네에게 말해주지 않은 제일 중요한 사실 하나가 남아있었구나.

“그런데, 본부를 소개해주러 온 것치고는 짐이 좀 많네요.”

다프네는 내가 마리안느를 본부로 데려온 것이 단순히 소개를 해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그녀의 보라색 눈이 안쓰러울 정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거 말인데. 마리안느는 여기 본부에 살게 됐어.”

삐거덕.

다프네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저 눈을 보고 있으려니, 느껴지는 죄책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나도 원해서 그녀를 여기 살게 한 건 아니라고. 다프네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여기서 살게 되었다고요? 일로이의 집에서?”

“마리안느는 다른 층에서 지내게 될 거야. 결코 이상한 게 아니라, 그냥 한 아파트에 있는 다른 주민들이라고 생각하면 돼.”

미안하다, 다프네.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어.

“성국에서 따로 숙소를 잡아줄 수도 있었던 거잖아요.”

“숙소를 구하기 힘들다고도 했고, 다음 재앙을 공략하러 갈 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함께 있으면서 합을 맞추는 시간을 늘려가라고 하더라고. 그녀도 무투파라고 하니, 아마 전선에서는 나와 호흡을 맞출 일이 더 많을 거라고.”

성국의 대표가 그리 부탁하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겠냐. 그냥 따르는 수밖에 없지. 다프네는 그런 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래, 차라리 나를 원망하려무나. 네 원망이라면 얼마든지 받아줄 테니까. 다프네에게 동물 귀가 달려있었다면, 가장 경계하며 한계까지 치솟았던 것이 지금은 풀이 죽어버린 채 축 처져버렸을 것 같았다.

“알겠어요.”

다프네는 단념해버린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이내 집으로 돌아가려는 듯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머리 위로 손을 가져가 툭툭 정수리를 부드럽게 두드려버렸다. 다프네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일 보자. 기다려줘서 고마웠어.”

얼굴을 살짝 상기시킨 다프네는 미간을 좁히며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향했다. 표정이 조금은 풀어진 것 같았으나, 내게 대답하지 않은 건 최소한의 불만 표시라고 생각해야겠지. 나는 로비의 문을 열고 나서는 다프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 일단은.”

나는 다시 마리안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후의 햇살이 로비의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마리안느의 은발은 그 진한 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빛났다.

“이 본부와 당신이 지낼 곳을 소개해드릴게요.”

“알겠습니다.”

마리안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은 차라리 마리안느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를 섬기게 되었다, 따위의 말을 던졌다면 다프네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상황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마리안느를 데리고 계단을 올랐다. 이 5층짜리 건물이 쓸데없이 비대하긴 했다. 마리안느뿐만이 아니라 대여섯 명이 더 들어와 살아도 딱히 붐빈다는 느낌은 들지 않을 거다. 다프네를 뽑을 당시 면접을 볼 때 수십 명의 사람을 너끈하게 수용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자, 이 3층에서.”

3층은 거의 비어있었다. 객실들이 군데군데 게스트하우스처럼 들어서 있었고, 그 외의 편의시설이라면 커다란 욕탕 하나 정도. 내심 욕탕을 보여줄 때는 감탄하는 표정이라도 지어주길 바랐지만, 마리안느는 역시나 그냥 알겠다고 넘길 뿐이었다.

“아무 곳이나, 원하는 방에 들어가면 됩니다. 모두 빈방이니까요.”

나는 방을 한 번씩 다 보여주고는 말했다. 마리안느는 복도 한가운데 양 손으로 트렁크를 잡은 채 서서 멀뚱히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냥 잘 만들어진 인형 하나 같았다.

“주시는 대로 들어가겠습니다.”

…명령을 거스르지는 않는다는 게 내 명령으로만 움직인다는 소리였어? 안드레 주교가 그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 있던 모습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무구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는 마리안느에게 따라오라 손짓했다.

“그렇다면, 욕탕 근처에 있는 방이 편할 거예요.”

“그렇습니까.”

“훈련하고 돌아오면 찝찝하잖아요? 이것저것 챙겨서 욕탕까지 가려면 피곤하고 귀찮으니까. 씻고 얼른 돌아와서 방에 드러눕는 게 낫죠.”

마리안느가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너는 땀을 흘릴 것처럼 생기지도 않았어. 나는 복도를 가로질러 가 욕탕 바로 옆 방의 문을 열어주었다.

“오늘부터는 여기서 지내면 될 것 같아요. 내일부터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훈련할 테니, 알고 계시면 될 것 같고.”

마리안느는 트렁크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은 말 그대로 필요한 것만이 갖추어져 있었다. 침대와 침구류, 작은 책상, 의자. 붙박이 옷장 하나. 다섯 평 정도 됨직한 공간은 그다지 넓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좁아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아직도 멀뚱히 서 있는 마리안느에게 앉으라 손짓했다.

“편히 쉬어도 됩니다. 오늘은 뭐 하라고 하지는 않을 거니까.”

마리안느가 그때야 침대로 가 앉았다. 폭, 하고 볼록 솟아있던 이불이 옴폭 파이며 들어갔다.

“아, 아니다. 먼저 사무실을 보여드려야 하나.”

마리안느가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다시 일어났다. 무언가 감정 없는 모습으로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꼴이 꼭 선임의 부름을 받는 이등병 같기도 하고.

“…생각해보니 굳이 안 와도 될 거 같아요. 그냥 내일 사무실을 보도록 할까요.”

마리안느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저 조각 같은 표정은 조금도 찡그려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오히려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다시 죄책감이 강하게 들었다. 괜히 내가 뭔가 나쁜 놈이 된 거 같은 기분이다.

“[재미있어 보이는구나.]”

…이 사디스트 성검의 흥미롭다는 듯한 목소리는 무시했다. 성검이라면 그냥 재미있다는 이유로 마리안느에게 앉았다 일어서기를 질릴 때까지 시켜볼 것 같다.

“[너는 나를 대체 뭐라 생각하는 거냐.]”

내 든든한 동료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리 마음속으로 말하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침이 4를 지나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그 면류관을 쓰고 오래 쓰러져있었던 모양이다.

“저녁 시간 될 때까지 여기서 쉬고 계세요. 보통 제가 6시에 저녁을 먹으니까, 얼추 그 시간에 맞춰 2층 식당으로 내려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마리안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원작에서 주인공에게 목이 잘려버린 저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지니고 있었을까. 마리안느는 나를 마주 보며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적어도, 이번에는 그런 죽음에서 벗어나게 되었네.

“…채식주의자는 아니죠?”

문득 맛있게 병아리콩을 집어먹던 안드레 주교가 생각났다. 청교회의 교리에 채식이 있었던가. 마리안느는 고개를 아주 살짝 갸우뚱거리고는, 이내 내저었다.

“아뇨. 아닙니다.”

“나중에 봐요.”

나는 그리 말하며 문을 닫고 나왔다. 여태 혼자 살고 있던 건물에, 다른 누군가가 들어와서 살 거라는 사실이 어색했다. 여기서 두 사람분의 요리를 해본 적은 없는데. 나는 미묘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천히 2층으로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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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솔직히 할 수 있는 종류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중에서 남 앞에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요리는 더더욱 적었고. 겨우 한두 가지 정도일까. 그마저도 그리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차라리 나가서 같이 먹자고 할 걸 그랬나.”

나는 솥에서 끓고 있는 수프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내 입맛에는 맛있는 수프긴 한데, 내가 워낙 아무거나 잘 집어먹는 식성인지라 마리안느의 입맛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겉으로 봐서는 정말 까다로운 입맛일 것 같은데, 내 말을 잘 듣는 걸 보면 그냥 아무 말 하지 않고 잘 먹을 것 같기도 하고.

“[아무거나 먹으라고 해라. 어차피 네 말에 잘 따르는 아이지 않느냐.]”

성검이 짓궂게 말했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확히는 내 명령을 듣는 거지. 내 말을 따르는 건 아니잖아.”

“[아무튼.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줄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다. 주는 대로 먹으면 되지.]”

“사람에게는 밥이 제일 중요하답니다. 일하면서 늦게 퇴근하라는 말보다는, 밥을 안 줄 때 더 화난다는 사실 알아?”

나는 그리 말하며 수프를 떴다. 그래도, 성검이 곁에 있으니 이렇게 혼자 있을 때 외롭거나 심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것 같다.

“[고마우면 잘해라.]”

고맙다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비겁하게, 생각을 읽지 말고 말로 해라, 검.

“…그러고 보니 내 생각을 읽는 건 간단하다고 말했잖아.”

“[간단하다마다.]”

“하지만 모든 생각이 다 들리는 건 아니라고 했던가?”

“[사람이 어떤 생각을 떠올릴 때 무조건 언어로 생각을 하는 건 아니잖느냐. 순간을 떠올릴 때도 있고, 냄새나 소리를 떠올릴 때도 있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는 그중 네가 ‘말’로 생각하는 것뿐이다.]”

원작이니, 빙의했니 뭐니 하는 말을 다 듣고 있던 건 아니었나. 그래도, 성검이라면 어느 정도는 알고 있겠지. 일부러 내게 언급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을 거다. 나는 마구 떠오르는 잡생각을 머리를 흔들며 흐트러뜨렸다.

“[말했다시피, 네 심지가 굳어지고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게 된다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읽기 힘들어질 거다. 생각을 읽히고 싶지 않다면 열심히 수련하거라. 조만간 심력을 수련할 좋은 방법을 알려줄 테니 말이다.]”

성검이 덧붙였다.

수프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한 번 맛을 보고는 수프가 더 끓게 내버려 두었다. 맛은 평소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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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들고 밖으로 나와보니, 이미 식기가 다 준비되어 있었다. 마리안느는 알아서 물까지 떠다 준비한 후 식탁 앞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나는 모자를 벗어두고 온 마리안느에게 고개를 저었다.

“앉아있어. 이미 다 도와주고 준비했는데 뭘.”

물론, 마리안느는 내가 다 준비를 마칠 때까지 자리에 앉지 않았다. 마리안느의 짧은 식전 기도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 후, 나는 천천히 수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슬쩍 눈치를 보니, 마리안느도 숟가락을 들고는 식사를 시작했다.

대화는 딱히 오가지 않았다. 나도 피로가 조금씩 몰려오고 있던 참이었고, 마리안느는 애초에 먼저 입을 열지 않았으니까. 다만, 혹여 맛이 이상하다며 싫어하지는 않을지, 이따금 마리안느의 눈치를 보는 것이 식사하는 두 사람 간에 이뤄지는 교류의 전부였다.

달그락.

식사를 끝내고 잠시 눈을 감고 있으려니, 마리안느가 숟가락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음식을 남기거나 하지는 않았고, 깨끗하게 그릇을 비워놓은 채였다.

“…맛은 어땠어?”

내 조심스러운 물음에, 마리안느는 제 접시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서는 기게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접시를 하나씩 걷어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개수대로 식기를 옮기는 마리안느가 문득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은 제가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이거 돌려 까는 거 맞지?

“[돌려 까는군.]”

성검이 내 불안감에 못을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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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느가 만든 아침은 분할 정도로 맛있었다. 정말 별것 아닌 재료로 만든 음식인데, 음식의 디테일이 달랐다. 굽는 정도라든가, 재료의 절묘한 배합이라든가. 원정을 떠난다면 일단 파티의 요리 담당은 확정. 어제 괜히 내가 요리하겠다고 나선 것 같다.

“커피 드리겠습니다.”

마리안느가 잔을 내려놓았다. 탕비실은 다프네 차지였는데. 이거 가지고 싸움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면 좋으려만. 나는 김이 피어오르는 쌉싸름한 커피를 마시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일로이, 출근했다. 너도 슬슬 준비해야….”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게오르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게오르그의 손에는 얼마 전에 본 적 있는 고급스러운 봉투가 하나 들려있었다.

“이번에는 또 뭐냐?”

“마리안느 프림. 새로운 동료. 복장을 보면 알다시피, 성국에서 보내줬어.”

“…반갑습니다.”

게오르그의 인사를, 마리안느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았다. 게오르그는 찡그린 표정 그대로 다시 내게로 얼굴을 돌렸다. 이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러려니, 하면서 넘기려는 듯했다.

“그건 어찌 되었든, 이번에 출정식 날짜가 잡혔다.”

게오르그는 책상 위로 봉투를 내려놓았다.

“이제 네 번째 재앙을 정말 공략하러 갈 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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