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25화 (26/158)

Chapter 25 - 25. 떠나는 이와 남는 이 (1)

나는 게오르그에게서 봉투를 전달받았다. 이전에 내게 날아왔던 소환장과는 무언가 느낌이 다른 것 같았다. 그때는 아무렇게나 편지칼을 집어 잡아 뜯었지만, 이번에는 신중을 가해서 봉투도 훼손되지 않게 뜯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와는 다른 글씨체로 적힌 서지가 나타났다. 나는 세 번 접힌 종이를 펼쳐 여왕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용사 일로이에게.

왕도의 봄은 섭섭할 정도로 빨리 지나가는구나. 여름은 코앞에 닿을 듯 가깝더니, 이미 봄을 지나 보내고 그 자리에 들어섰더군. 하지만 카이로스 왕국의 여왕으로서, 그리고 재앙 공략 원정대를 보내는 총책임자로서, 나는 훌쩍 가까워진 여름의 열기가 기껍다. 그대들이 ‘네 번째 재앙’을 공략하기에 수월한 날씨가 찾아오고 있다는 뜻이니 말이지.

출정식은 당연히 그대들이 공략에 나서는 날에 맞추어 진행할 예정이다. 내가 얼추 좋은 때를 생각해보기는 했지만, 공략에 나서는 이들이 편한 날에 맞추어야 하지 않겠나. 6월의 초입 중에 원하는 날짜를 답신으로 적어 보낼 수 있도록 하여라. 그때 함께 왕궁에서도 모든 준비를 다 할 수 있도록 하겠다.

에버노드는, 북부는 추운 곳이다. 여름이어도 최북단에 이르러서는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하는 경계선이 있다고 하니 말이다. 부디 단단히 대비를 할 수 있도록 하거라. 이만 줄이겠다.

카이로스 왕국 국왕, 아그네스 블랑쉬 뤼미에르.

달필이시군요, 폐하.

아마 여왕이 직접 써 내렸을 듯한 서신의 글은 그 성격처럼 네모반듯하고 위엄이 있었다. 나는 국왕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다시 읽고는 조심스럽게 결대로 접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뭐라고 하시던가?”

내가 서신을 읽는 동안 쭉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오던 게오르그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출정을 원하는 날짜를 직접 정하라고 말씀하시더라. 6월 초순 중의 날짜로 고르라던데.”

“그렇군, 폐하께서도 섬세하게 배려해주시는군.”

게오르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장이니, 왕실의 편지를 받는 게 감격스럽겠지. 게오르그는 그러다가 다시 문득 고개를 들어 마리안느를 보았다.

“그래서, 저 사람은 무슨 역할을 맡게 될 건가?”

“아마 이전에 아르옌이 맡던 역할과 비슷할걸. 앞에서 전장을 휘저어주는 역할.”

게오르그가 미간을 좁혔다.

“그 정도로 강하다는 말이지. 아르옌만큼은 아니겠지만. 하긴, 사람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으니, 충원되는 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뭐야, 이제는 그냥 아무 말 없이 넘어가네? 지난번처럼 내기할 생각은 없어?”

“…크흠.”

게오르그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이 자식, 나랑 한 내기는 은근슬쩍 묻어가려고 하는 것 같다. 저번에 뭐라고 말했던가? ‘그럼 다프네 에피폰을 파티에 포함하는 건 물론이고, 다시는 네 말에 토를 달지도 않고, 닥치고 따라다니도록 하지.’라고 했던가? 그 이후로 다프네를 동료로 인정하는 꼴이 꼭 강아지 집에 데리고 오지 말라는 아버지 같았다.

“아무튼, 그렇다면 6월 첫째 주 중으로 잡는 게 좋겠군. 안 그래도 북부에 가는데, 그나마 덜 추울 때 갈 수 있겠어.”

끼익.

소심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분홍빛 머리가 문틈으로 나타났다. 다프네는 소심하게 고개를 들이밀고, 이내 내 옆에 선 마리안느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왔습니다.”

“어서 와. 안 그래도 방금 네 번째 재앙을 공략하러 갈 날짜를 정하고 있던 참이야.”

다프네는 입술을 비죽 내밀더니 이내 내 곁에 다가와 섰다. 그리고는 내 책상 위에 올려진 커피를 보고는 다시 한번 얼굴을 찡그렸다.

“…이제 진짜 일찍 올 테니까, 아침에 커피는 제가 타게 해주세요.”

다프네는 그리 말하며 마리안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다프네는 시무룩한 표정을 원래대로 되돌리자, 나는 여왕의 서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자, 그래서 우리가 출발할 날짜는 6월 초순. 이제 삼 주도 채 남지 않았지.”

게오르그와 다프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안느는 가만히 내 말을 경청했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떠나는 게 좋다고 생각해. 6월의 첫 번째 날에 출발하자.”

게오르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생각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출발하려 하는군. 너라면 최대한 늦게 출발할 수 있다면 늦게 출발하려 할 줄 알았다. 준비니, 뭐나 하며.”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어차피 우리가 왕도에 더 머물러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기껏해야 잿빛곰의 머리 가죽 정도? 준비는 오히려 북부에 가서 더 착실하게 할 수 있을 거야. 북부에 도착한다고 해서 바로 네 번째 재앙을 사냥하러 떠나지도 않을 테고. 차라리 서둘러 도착해서 북부의 척박한 환경에 하루라도 빨리 적응하는 게 훨씬 나을 거야.”

그렇지, 성검?

“[간만에 옳은 말을 하는구나. 네 수련 또한 북부에 다다르면 더 진전을 보일 수 있을 거다.]”

간만에, 라는 말이 조금 걸리긴 했다만, 나는 성검의 동의와 함께 자신 있게 미소를 띠었다.

“다른 의견 있는 사람?”

“아니, 오히려 웬일로 그런 깊은 생각을 했다 싶군. 나는 네가 늦게 출발하자고 하면 일찍 출발하는 편이 훨씬 나을 거라 말해주려 했다.”

게오르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 말에 동의했다. 다프네 또한 내 말에 동의했고, 마리안느는… 구태여 물을 필요도 없이 내가 눈을 돌리자마자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자, 확인도 받았겠다, 더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곧장 펜을 들어 왕실에 보낼 답장의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여왕 폐하께’로 시작해야 하나. 이 뒤로는 아마, ‘용사 일로이가 삼가 아뢰옵니다…’ 이런 식으로 적는 게 옳겠지. 솔직히, 왕궁 측도 며칠이나 걸려서 작성한 정성 어린 답신을 받는 것보다는 빠른 답신을 받아 준비를 시작하는 편이 좋을 거다.

나는 그렇게 펜을 굴리며 하나하나 문장을 적어나갔다. 옆에서 기웃거리던 게오르그가 이따금 참견하며 내 문장과 표현을 알맞게 수정해주었다.

‘그러니, 신은 6월 1일로 하여 북부를 향해 출발하고자 합니다. 부디 윤허해주시옵소서.’

나는 마지막 문장까지 완성한 후 녹은 밀랍을 부어 인장을 찍었다. 나는 답신을 게오르그에게 전달했고, 답신이 든 봉투를 받은 게오르그는 어딘가 찝찝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편지 배달부가 된 기분이군.”

“내가 갈 수는 없잖아.”

게오르그는 내 뻔뻔한 대답에 헛웃음을 내뱉으면서도 품속에 서신을 고이 집어넣었다. 답신은 내 손을 떠났다. 나는 잔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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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로부터 마차로 삼 일 떨어진 한 도시의 여관.

파티를 나온 뒤로 시간이 꽤 흘렀다. 아르옌과 함께 다니겠다는 일념으로 용사 파티를 나선 아이시스는 자신을 찾을 수 있다면 찾아오라는 듯, 아르옌이 남긴 메모와 함께 몇 주째 길을 헤매고 있었다. 마차를 타고, 가끔은 걸으면서 도시와 사람들을 따라 여행한 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아이시스는 아르옌의 소식을 한 도시에서 간신히 접할 수 있었다.

아이시스는 조금씩 손을 떨면서 나무잔에 담긴 물을 마셨다. 오늘은 드디어, 아르옌과 다시 만나는 날이었다. 모험가 길드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수소문하며 힘겹게 찾아낸 아르옌의 근거지. 오늘은 아마 마물 사냥을 하고 온다며 늦을 것이라 여관 주인이 말해주었다.

“아르옌… 기다리고 있어요.”

그리 중얼거리는 성녀의 가슴 아래로 묵주의 줄이 흘러내렸다. 성녀는 잘그락거리는 묵주를 양손으로 잡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합류하게 된다면 무슨 말을 먼저 들려줘야 할지 모르겠다. 용사 파티에 도저히 남아있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그 용사 옆에 있을 수 없을 거 같다고?

“잘 모르겠네요. 그냥 당신을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걸까.”

조용히 물을 홀짝거리던 아이시스의 귀에 사람들의 대화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이번에 봤나?”

“보긴 또 뭘 봐.”

“네 번째 재앙 공략. 조만간 용사 파티의 출정식을 거행한다고 공고가 내려왔네.”

아이시스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청각을 더 곤두세워 모험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했다. 몇 주 전, 용사가 왕궁의 청문회에 불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후 좀처럼 파티의 소식을 접할 수 없던 그녀였다. 되도록 관심을 주지 않으려 했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 뭔가 왕궁에서 용사를 불러 야단이 났다던데, 그건 어떻게 된 건가?”

“나도 정확한 건 잘 모르지. 왕궁의 귀족들만이 알지 않겠나. 그래도 어떻게 공식 석상에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는 걸 보면, 잘 해결된 모양이지.”

청문회가 잘 해결되었다고. 아이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아르옌을 내보내더니,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만을 뽑아 대충 원정대를 꾸린 모양이다.

“날짜가 어찌 되나? 한 번 용사 얼굴이나 보러 가고 싶은데.”

“6월의 첫째 날이라 했던가. 내일이나 모레 중으로는 출발해야 할 걸세.”

“그 이야기.”

그때, 모험가들의 대화 사이로 새로운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아이시스가 눈동자를 크게 떴고, 모험가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의 대화에 개입한 외부인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만 해줄 수 있겠습니까.”

아르옌 엘미온. 새카만 머리카락을 지저분하게 기른 용병이 어느새 나타나 모험가들의 테이블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모험가들은 벙찐 표정으로 저들끼리 눈빛을 교환했다. 아르옌이 조금씩 기세를 내뿜기 시작하자, 그때야 모험가들은 화들짝 놀라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그, 용사가 이번에 청문회를 무사히 넘기고….”

“조만간 네 번째 재앙을 공략하러 출발할 텐데, 그 출정식 날짜가 잡혔다고 하네.”

아르옌의 콧잔등 위로 그림자가 졌다. 무언가를 곱씹는 듯한 표정이 되어, 아르엔은 등을 돌리더니 천천히 여관의 2층으로 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아르옌!”

아이시스는 자리에서 다급하게 일어나며 아르옌을 불렀다. 용병은 계단에 발을 딛고는 익숙한 목소리에 뒤로 돌아보았다. 신경질적으로 날카롭게 곤두서있던 아르옌의 눈은 후드 아래로 비치는 아이시스의 파란 눈을 보자마자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아이시스….”

아르옌이 뭐라 반응할 틈도 없이, 아이시스는 달려가 아르옌을 끌어안았다. 아르옌은 자신에게 매달린 아이시스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그 어깨를 감싸주며 토닥였다.

“…찾아왔군.”

아이시스가 아르옌에게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옌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는 걸 느끼고는 아이시스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자신이 묵던 방에 아이시스를 앉혀놓은 아르옌은, 맞은편의 의자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용사 파티를 나오게 된 건가?”

“예. 당신을 내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 당장 용사에게 가서 따졌지만, 합당한 설명을 들을 수 없었어요. 당신이 파티의 실질적인 버팀목인지 몰랐을 리가 없을 텐데….”

아이시스는 말꼬리를 흐리며 말했다. 용병은 입술을 꾹 깨물며 지난 용사 파티에 있던 나날을 떠올려 보았다. 자신의 출신을 무시하며 말을 지지리도 들어주지 않던 용사. 성녀에게 껄덕거리던 용사. 그런 용사의 편에 서서 아이시스를 매도하고 자신을 무시하던 마법사.

“…아니. 이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내가 그 녀석들의 오합지졸 원정대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것부터가 잘못된 것 같으니까.”

아르옌은 굳은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아이시스는 손을 모아 쥐었다.

“그런 이들은 세상을 구원할 수 없을 거예요. 차라리 당신이 강해지며 나아가는 길이 곧 세상을 구원하는 길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르옌이라고 세상을 구원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까. 다만 방법과 성격, 그리고 능력의 차이. 무능한 용사와 함께 있다가는 세상의 구원에 가까워지기도 전에 죽거나, 용사를 죽이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것 같았다.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다시 용병단에 들어갈 건지.”

“아니. 용병은 이제 하지 않아. 잠시 모험가로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그간 내가 볼 수 없었던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

아르옌의 말에, 아이시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어려운 이들을 도우며 그녀만의 구원을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괜찮으리라. 잠시 침묵이 내려앉은 방안, 아르옌이 의자를 두드리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일곱 재앙의 원정대가 6월의 첫 번째 날에 출발한다더군.”

아르옌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떠나기 전에 그들이 어떻게 될지는,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너도 그렇지 않나?”

아르옌이 모종의 분노를 다지며 말했다. 아이시스는 그런 아르옌의 검은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그 용사가 아직도 오만하게 자신이 세상의 구원자라 외칠 수 있을지 확인해야만 했다. 왕국에서는 아직 어리석게 그 용사를 인정할지, 성국에서도 그를 여전히 용사라 인정할 수 있을지 확인하고 싶었다.

“…예.”

아르옌과 아이시스의 눈이 마주쳤다. 용병과 성녀가 잠시 왕도로 돌아가는 것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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