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26화 (27/158)

Chapter 26 - 26. 떠나는 이와 남는 이 (2)

6월 1일, 오전 8시 10분 전.

5월의 마지막 주부터 왕도는 사람으로 붐비기 시작했다. 평소에 왕도에 거주하던 주민들부터 인근 도시에 사는 사람들, 멀리 외지에서 구경을 온 사람들과 해외에서 찾아온 사람들까지. 일곱 재앙을 쓰러트리러 다니는 용사 파티의 두 번째 출정식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것이다.

“세 번째 재앙을 쓰러트리고 겨우 두 달, 석 달 만이라지?”

“아무래도 이번에는 정말 카이로스 왕국에서 이를 갈고 재앙을 처단하려 하는 모양이야.”

사람들은 그리 웅성거렸다. 물론, 결코 흥미와 호의만이 함께하는 건 아니었다.

“용사의 자질이 의심되었다는 소문이 있더라.”

“어쩐지, 첫 번째 출정식 때 고개를 갸우뚱했다는 사람들이 있다더니.”

“난 그 용사 싫더군. 성녀님을 자기 손으로 방출했다지? 어떻게 그리 오만할 수가 있나. 누가 보면 자기 혼자 ‘세 번째 재앙’을 쓰러트린 줄 알겠어.”

“너는 그냥 성녀님이 아름다워서 좋아하는 거일 뿐이잖아. 뭐, 나도 성녀님을 파티에서 내쫓아버렸다는 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말이지.”

그렇다 해도, 좋든 싫든, 카이로스 왕국의 움직임과 용사의 동태는 온 세상이 주목하는 것이었다. 일곱 재앙은 사람들이 용사의 원정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바로 그 순간에도 조금씩, 팔방에서 인류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으니까.

나는 파티 멤버들과 함께 왕궁의 대기실에 앉아있었다. 예전에 청문회 때문에 방문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용사에 관한 이야기를 소문으로만 듣고 일로이라는 사람을 판단한 귀족들. 청문회 때에 나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거의 무시에 가까운 홀대였다.

“오전 8시 30분경에 출정식을 시작합니다. 8시에 이곳에서 출발할 테니, 10분 동안 남은 준비를 끝내시지요.”

저렇게 대놓고 경계하는 기색을 보이는 것보다는 그냥 나를 무시하는 편이 행동하기 편했으려나.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월레스 비그완 내무대신 보좌를 바라보았다. 내게 한 짓이 있었으니, 이리 경계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도 않았다만, 저 내무대신 보좌는 내가 혹여 복수라도 다짐하고 있을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월레스 백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내게서 멀어져, 도망치듯 방에서 나갔다. 대기실의 문이 열린 사이 바깥의 소란이 틈을 비집고 들어왔고, 닫히면서 다시 차단되었다. 나는 그 순간의 웅성거림이 지닌 혼란함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전쟁이군, 전쟁이야.”

“출정식은 첫 번째가 가장 관심이 많을 줄 알았는데, 아니로군. 되려 구경하러 온 사람이 더 늘어난 거 같아.”

게오르그가 창밖을 흘겨보며 말했다. 오늘 게오르그는 그답지 않게 말쑥한 남색 기사단 제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왼쪽 가슴팍에는 훈장 두엇에 약장이 다닥다닥. 게오르그의 자부심이 광을 내주기라도 하는 걸까, 오전의 햇살을 받아 약장이 빛났다.

“‘세 번째 재앙’을 정말 잡아버린 게 관심을 더 끌었겠지. 우리가 재앙 공략에 하나씩 성공할수록 관심은 더욱 늘어날 거야.”

나는 게오르그의 시선을 따라 빛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리는 보이지 않았고, 화창하게 갠 하늘만이 보였다. 나는 눈을 돌려 나머지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긴장되니?”

다프네는 내 말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녀는 처음으로 한껏 꾸민 모습을 내보이고 있었다. 사교회에라도 나가는 양 대놓고 화려한 치장은 아니었지만, 아름답고 강력한 마법사의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은근한 화장과 스타일링이 더해졌다. 굳이 화장이 필요했나 싶긴 하지만.

“…이런 건 처음이니까 긴장되네요.”

그렇게 꾸며진 다프네의 모습은 아름답다는 말밖에는 해줄 말이 없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예전 마법사의 흔적을 아예 지워버리고도 남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내 뜯어보는 듯한 시선에, 다프네는 뽀얀 볼을 더 빨갛게 물들이며 머리를 살짝 숙였다.

“괜찮을 거야. 자신감을 가져.”

내 말에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리고서 마리안느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프네보다는 수수한 모습인 마리안느는 자기 키보다 큰 창을 의자 옆으로 기대어놓고 있었다. 긴장한 기색이라도 찾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마리안느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긴장은?”

나는 마리안느의 빛나는 금빛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마리안느는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더니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예상한 대답이다. 나는 쓰게 미소 지으며 방 건너편의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 낯선 얼굴이 있었다. 다프네, 게오르그, 마리안느보다 훨씬 힘주어 치장한 모습이었다. 하얀 용사의 제복. 내 쥐색 머리는 머릿기름을 발라 쉼표 모양으로 한편은 가리고 한편은 넘겨져 있었다. 조금씩 분을 바른 얼굴은 평소보다 음영이 짙었고, 따라서 이목구비가 훨씬 더 강조되어 보였다. 거울 속에서 녹색의 경향이 짙은 청록색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제법 봐줄 만하게 꾸며놨구나. 시간을 들인 보람이 있겠어.]”

가만히 있던 성검의 한 줄 평이었다. 악담은 아니라 다행이다.

대기실의 문이 덜컹거리면서 열렸다. 바람과 소란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내 뒤를 따라 나머지 세 명이 일어섰다. 귀족들과 기사들의 시선이 날아들었다. 나는 그들에게 내 시선을 돌려주지 않았다.

가보자고.

복도 끝으로 환하게 새어 들어오는 햇살을 향해,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

“사람이 많군.”

아르옌이 중얼거렸다. 아이시스는 새카만 후드 아래에서 첫 출정 때보다 훨씬 늘어난 구경꾼들을 보았다. 3일간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왕도에 도착했지만, 피로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친 그들은 새벽부터 붐비기 시작한 왕도의 거리를 거슬러 올라가며 출정식이 거행될 왕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세 번째 재앙을 공략하고서 용사 파티의 활동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 모양이에요. 원정에서 돌아올 때 기억하시죠?”

아르옌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리의 가로등마다 왕국의 휘장이 그려진 만국기가 내걸렸고, 군악대는 희망찬 행진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아르옌은 그 음악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군악대로부터 멀어졌다. 거리 곳곳에는 노점상들이 일찍 문을 열었고, 숙박업소의 주인장이 호객하는 소리도 이따금 들려오고 있었다.

“희망이 넘치는군.”

아르옌의 목소리에는 환멸이 깃들었다. 아이시스는 그런 아르옌을 바라보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녀도 알았다. 결코 저런 희망찬 분위기로 있을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지금의 용사 파티만으로는 재앙을 공략하기 힘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조금 멀리 떨어져서 구경하는 게 좋겠어.”

아르옌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한층 커졌다. 왕궁의 발코니, 연설대로 여왕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이시스와 아르옌이 시선을 올렸다.

여왕은 행사 시에 입는 드레스가 아닌 군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온통 새카만 복색 위로 붉은색, 금색 수실이 놓여있었다. 바람이 불자 안감이 붉은 망토가 흩날렸다. 여왕은 왕도의 거리에 집결한 수만 명의 군중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친애하는 카이로스 왕국의 국민이여.”

여왕의 연설을 듣는 아이시스의 표정이 흐릿해졌다.

“네 번째 재앙을 쓰러트릴 때가 다가왔다. 왕국의 방패, 에버노드의 바깥에서 호시탐탐 진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거인’은 용사의 칼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여왕은 흘긋, 발코니의 안쪽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용사는 이길 거다. 모든 이들이 의심했던 세 번째 재앙의 공략에 성공했듯이. 전투를 거듭할수록 강해질 것이고, 우리에게 승전보를 전달해줄 거다. 내가 그리 강하게 믿고 있듯, 용사 일로이의 분전을 믿고 있듯, 그대들도 용사를 믿어주어라.”

믿음이라는 말은 무거웠다. 조용히 여왕의 연설을 듣던 이들 위로 한층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그들은 용사와 믿음이라는 말을 곱씹는 듯하였다.

“그렇다면, 용사 또한 우리에게 보답을 들려주리라.”

여왕은 아주 짧게 연설을 마쳤다. 아르옌은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뜨고 왕궁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여왕의 믿음이라는 말이, 불안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추측했다. 반쯤 해체된 용사 파티에 대한 불안함. 용사 자체에 가지고 있던 불안함. 부러 믿음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되풀이하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을 뿐일 거다.

“지금의 용사 파티가 어지간히도 미덥지 못한가 보군.”

아르옌이 중얼거렸다. 아이시스 또한 아르옌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덥지 못하다’라.”

목소리는 갑작스럽게 후방에서부터 들려왔다. 아이시스는 어깨를 흠칫했고, 아르옌이 표정을 날카롭게 바꾸며 아이시스를 감싸고는 손을 뒤로 휘둘렀다.

팍-!

그리고, 막혔다. 자신의 공격을 막았다고? 아르옌의 동공이 충격에 흔들렸다. 아이시스는 아르옌의 어깨너머로 나타난 존재를 확인하고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저는 생각이 조금 다른데 말입니다.”

뿌드드득.

힘과 힘이 교차하고 있었다. 아르옌은 자신의 힘에 밀리지 않는 불청객의 근력에 이를 앙다물었다. 사제복 차림의 불청객은 가늘게 뜬 눈 사이로 잿빛 눈동자를 빛냈다.

“사람이 많습니다. 용사님의 출정식에서 소란은 부디 자제해주시지요.”

차분한 목소리로 사제가 말했다. ‘용사님’이라는 말에 아르옌이 눈썹을 구부렸다.

“…싫다고 하면?”

“당신이 감싸고 있는 성녀가 소란에 휩싸이겠지요. 잠시간의 소란으로 끝나지도 않을 거고요. 그걸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소동을 피우셔도 좋습니다.”

그리 말하는 사제가 아르옌의 팔꿈치를 붙는 손에서 서서히 힘을 빼었다. 아르옌은 이를 부득 갈면서 함께 팔에서 힘을 뺐다. 두 사람의 팔이 서서히 내려가고, 아이시스가 아르옌의 팔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섰다.

“안드레 주교님.”

안드레 주교는 늘 지어 보이는 온화한 미소로 아이시스를 맞이했다. 주교의 미소는 온화했지만, 그 너머에 담긴 감정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이시스가 아는 체를 하자, 아르옌은 못마땅한 눈빛으로 아이시스로부터 물러섰다.

“아이시스,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냈나요? 모습을 보아하니 고생깨나 한 것 같네요.”

안드레 주교의 말에, 아이시스는 눈살을 확 찌푸렸다.

“예, 잘 지냈습니다. 저 용사 아래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훨씬 낫더라고요.”

“그건 유감이군요. 가능한 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서로를 도우며 지냈으면 바랐습니다만.”

“그게 불가능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이더군요. 지금 여기 있는 아르옌도 그렇고요.”

안드레 주교는 아이시스를 바라보았다가, 아르옌을 보았다가, 다시 아이시스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이시스는 그 한숨의 의미를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먼저 드는 건 모종의 반발심이었다.

“아이시스, 좀 쓴소리를 들려드려야겠군요. 이번에 당신의 처세에 상당히 실망했습니다. 너무 이르게 당신을 다른 세상에 내보낸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아이시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 나름대로 많은 걸 각오한 후 행한 겁니다. 성국의 질책도, 세간의 시선도. 하지만 사람들은 용사가 얼마나 이번 원정에서 제멋대로였고, 무능했는지 알지 못해요. 그러면서 자신보다 훨씬 강하고, 경험도 풍부한 용병은 질투라는 이유로 잘라버리더군요.”

“그렇기에 제가 실망했다는 겁니다, 아이시스. 왜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구는 걸까요. 그간 성국에서 제가 당신을 너무 오냐오냐 키운 걸까요.”

안드레 주교의 목소리가 사뭇 엄해졌다.

“당신은 어디까지나 용사를 돕기 위해 파견된 입장입니다. 그렇기에 설령 그가 잘못된 판단을 내렸더라도, 옆에서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알려주고, 충고하고, 용사의 부족한 면을 보충해야 마땅하거늘, 어째서 그렇게 투정을 부리냐는 말입니다.”

주교의 질책에 아이시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아이시스를 감싸며 아르옌이 나섰다.

“청교회와 아이시스는 분명 별개의 존재라고 했을 텐데.”

“일단 그 손부터 떼시지요, 용병. 당신이 함부로 그리 만져도 괜찮은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 또한, 추방된 외부인이 간섭해도 좋을 문제가 아니지요.”

안드레 주교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아르옌의 몸에서 마찬가지로 투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내 싸움이 의미 없다는 듯, 주교는 적의를 거두며 다시 아이시스를 바라보았다.

“용사님께서는 아이시스, 당신이 파티를 자의로 나간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추방한 것이라 알렸습니다.”

아르옌과 아이시스의 표정이 동시에 얼어붙었다. 그리고는 이내 아이시스의 표정은 있는 대로 일그러졌다. 파티를 나오면서 다졌던 그녀의 각오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용사의 잘못이 되어버린 것이다. 의문과 짜증이 동시에 끓어올랐다.

“대체 왜 그런 짓을….”

“여기에 당신이 파티에 있지 않아도 될 이유도 함께 덧붙여주었습니다. 아이시스. 그간 당신은 용사와 함께하면서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겁니까?”

정적이 흘렀다. 안드레 주교는 왕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용사님이 나오는군요.”

아이시스와 아르옌이 발코니를 바라보았다. 첫 출정에 나서던 날처럼 차려입은 용사가 여왕과 인사를 나누고는 연설대에 섰다. 안드레 주교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아이시스에게 말했다.

“용사님을 한 번 더 자세히 보십시오. 그간 당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

“…그렇다면, 용사 또한 우리에게 보답을 들려주리라.”

여왕은 짧고 강렬하게 연설을 마쳤다. 사람들의 박수와 함성을 뒤로하고, 여왕은 천천히 걸어 성안으로 돌아왔다. 여왕이 어렴풋이 입꼬리를 올리며 내 눈을 마주했다. 여왕의 붉은 눈이 미약한 기대감을 품고 빛났다.

“자, 용사 일로이. 네 차례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청문회 때의 활약을 기대하도록 하마.”

내 등을 밀어주는 말과 함께, 나는 발코니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 명 정도나 될까. 수를 헤아리는 게 의미가 없어 보일 정도로 많은 사람이 왕도의 거리를 꽉 메우고 있었다. 그저 저 많은 사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미 숨이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나는 답답하게 숨을 몰아쉬며 성검의 검자루를 매만졌다.

“[긴장되느냐?]”

내 마음을 읽고 있었는지, 성검이 말을 걸어왔다. 평소보다 조금 더 다정한 목소리다. 나는 어지러운 마음속으로 말을 만들어 내는 대신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그러게. 긴장되네.”

“[네가 긴장했다는 티를 내지 않는다면 괜찮다.]”

나는 피식 웃었다. 결국 보여주기라 이 말인가.

“[보여주기다마다.]”

성검이 내 마음의 말을 받았다. 나는 발코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대에 찬 눈, 의심하는 눈, 선망하는 눈, 미워하고 질투하는 눈, 믿음에 빛나는 눈, 간절한 눈. 부정적으로 보는 눈이 꽤 많았다. 지난 몇 주간의 소란이 확실히 용사의 평판에 영향을 끼치긴 했나 보다.

“[사람들의 눈이 보이느냐.]”

“응. 보이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저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지도, 이제 알 것 같다.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서라, 일로이.]”

성검의 마력이 한줌 내 몸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그 인도에 따라 몸을 곧추세우고 앞을 바라보았다.

“[의심하는 이들을 저버리는 게 아닌, 믿음으로 바꾸는 게 용사의 역할이다.]"

성검의 목소리가 나를 단단히 지탱했다.

"[저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어라. 믿음과 확신을 심어주어라. 의심과 불신에 잠긴 저들의 마음이 너 하나로 바로잡힐 수 있도록 만들어라.]”

몸을 편다. 호흡을 가다듬고, 심박을 진정시켰다.

“[재앙의 형태로 닥쳐오는 어두운 동굴의 끝에 아스라이 비치는 한 줄기 빛이 되거라.]”

나는 성검을 뽑아 낮게 들었다.

“[빛나는 존재가 되어라, 일로이. 저들이 너라는 빛을 보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설령 너를 의심한다고 하더라도, 믿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네가 그곳에서 계속 빛나는 한 사람들은 너를 보고 나아갈 거다. 내일이 있다고 믿음을 가질 거다.]”

숨을 내쉰다. 몸 속에 갇혀있던 뜨거운 마나의 고동이 밖으로 배출되었다.

“[나를 들어 보여주거라. 희망을 들려주어라.]”

설령 연기라 하더라도.

“[그래. 설령, 연기라고 하더라도.]”

나는 성검의 검끝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성검의 제1 단계가 개방되며 태양만큼이나 환한 빛무리가 모여들었다. 이제 성검을 개방할 때 느껴지던 고통은 없다. 조금씩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빛나는 성검을 바라보며 모두가 멍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저는 전장으로 갑니다.”

나는 입을 열었다. 마나에 의해 증폭된 목소리가 쥐 죽은 듯 조용한 광장에 울려 퍼졌다.

“긴 인사말은 하지 않겠지만, 하나만큼은 약속하고 가겠습니다.”

문득,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새카만 후드를 쓰고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나를 노려보는 듯한 새파란 빛이 비친 것 같다. 나는 그 사람에게까지 내 목소리가 한 글자 한 글자 와닿도록, 또렷하게 힘주어 말했다.

“저는, 용사는 패배하지 않을 겁니다.”

목소리를 높였다. 성검의 울림이 내 목소리와 함께 퍼진다.

“제가 다시 이곳에 서는 건, 오직 승전보와 함께일 때뿐일 것입니다.”

==

성검의, 빛을 보았다.

아이시스는 용사의 말이 끝난 후로도 계속 멍한 표정으로 그 자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태 그녀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신성하고 강력한 힘이 그 빛에 도사리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저런 힘을…?

아니, 힘도 힘이었지만, 용사의 태도와 모습은 그녀가 알던 것과는 달랐다.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진짜 영웅의 모습. 물론 평소의 모습을 생각하면 꾸며냈다고 보아야겠지만, 아이시스는 그 괴리감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 사이, 용사는 어느덧 새로운 파티원들과 함께 행진하기 시작했다. 용사 파티가 가까워질 때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또한 점점 커지고 있었다.

“짧지만 출정하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말이었군요.”

안드레 주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아이시스의 반응을 보고는 무기질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반면, 아르옌은 여전히 일그러진 표정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아이시스?”

“…저건.”

아이시스가 머리를 숙이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안드레 주교는 아이시스를 바라보며 작게 웃음을 내뱉었다.

“자, 아이시스. 그렇게 멍하게 있지만 말고 잠시 자리를 옮길까요?”

아이시스가 고개를 들어 주교를 보았다. 주교는 다가오는 용사 파티를 슬쩍 바라보고는 말했다.

“당신이 성녀로서 새롭게 맡아야 할 임무가 생겼습니다.”

3